[리뷰] 제4회 페미니즘 연극제 관람기 (상편)

 

 

 

제4회 페미니즘 연극제 관람기 (상편)

 

<사라져, 사라지지 마> <첨부파일_서식01_이력서> <이벽아전>

 

김민조 (프리랜서 비평가)

 

 

페미니즘 연극, 연대에서 연결로 

 

2018년 연극계 미투 해시태그 운동의 해에 시작된 페미니즘 연극제가 어느덧 4회를 맞았다. 4년 동안 페미니즘 연극제를 둘러싼 한국 사회와 연극계의 지형은 숨가쁘게 바뀌어 왔다. 그 변화란 감히 페미니즘의 이름을 걸고 연극을 올리는 것이 점차 당연해져 가는 과정, 페미니즘 연극이 새로운 관극의 모드와 모럴을 갖춘 장르로서 정착되어가는 과정, 나아가 이 플랫폼이 배태시킨 양분이 연극제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이었다. 대학로의 한가운데에서 페미니즘을 외치며(제1회) 호기롭게 시작했던 연극제는 관객과 연극인들의 뜨거운 성원에 힘입어 더 많은 연대를 상상하는(제2회) 방향으로 확장해 나간 것이다. 

그러나 지난 4년은 페미니즘 외부에서 덮쳐 오는 백래시와 내부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직면해야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I am a Feminist” 라는 슬로건 아래 개최된 제3회 페미니즘 연극제는 백 명의 페미니스트에게 백 개의 페미니즘이 있음을 전제하며 시작했다. 개개인의 몸을 연대체(solidarity)로서 비끄러매는 동시에 그 내부의 차이를 직시하고 교차성을 사유하는 성찰의 시선이 요청되고 있던 시점이었다. 페미니즘을 퀴어링하는 가운데 ‘누가 여성인가’와 ‘여성은 누구인가’를 교차시켜 질문하는 목소리가 들려왔고(<스탠드 업, 그라운드 업 vol. 2), ‘페미다운 것’이라는 자격의 정치를 둘러싼 내부의 갈등이 극화(<2020 메갈리아의 딸들>)되기도 했다. 아울러 대학로라는 중심지를 벗어나 신촌 1M SPACE로 페스티벌의 거점을 옮겨가며 탈영역을 시도했고, ‘드라마 연극’이라 불리는 헤게모니적 형식을 탈피해 플라멩고, 무용, 마임, 퍼포먼스, 스탠드업 코미디, 관객 참여형 공연 등 표현 형식의 다원성을 최대치로 추구한 해이기도 했다. 요컨대 1회에서 3회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페미니즘 연극제는 페미니즘과 연극을 함께 탈중심화하고, 차이 속의 연대를 구상하는 축제로 점점 확장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매년도 페미니즘 연극제는 그 당시를 살아가는 페미니스트의 ‘시기특정적’인 화두를 반영해왔다. 더듬거리는 언어로 나의 몸이 체험해온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놓아야 했던 시기, 남성 문화와의 단절을 선언하며 단호하게 여성 연대를 외쳐야 했던 시기, 연대 이후의 지속 가능성을 성찰해야 하는 시기의 페미니즘 연극들은 각기 조금씩 다른 표정과 몸짓으로 우리 앞에 출현해왔다. 제3회 페미니즘 연극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양상은 고통어린 시간 속에서 눈을 뜨는 상처들을 세밀한 감각으로 묘사하고 회복의 가능성을 향해 몸을 열어가는 과정이었다. 나이들어가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루키즘적 억압의 구조를 퍼포먼스로 재현하거나(<늙은 여자, 못생긴 공작부인>), ‘사랑’으로 불려온 친밀한 관계 내에서 감내해온 폭력과 상처의 문제를 서사화하거나(<레인보우 인 달고나>, <공기의 딸들>), 상처를 공유하는 새로운 관계 속에서 다시 움직일 힘을 얻는 몸을 보여주거나(<계절을 잃은 숲>), 자신이 헌신해온 예술로부터 배신당한 여성 예술가가 그 ‘경계’ 바깥을 더듬는 위태로운 과정을 현시하는(<죽는 장면>) 공연들이 관객을 향해 다정한 손을 내밀고 있었다. 제3회 페미니즘 연극제는 투쟁 이후 점점이 흩어져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페미니스트 각 개인의 안부를 묻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는 축제이기도 했던 것이다. 

2021년 7월에 어김없이 돌아온 제4회 페미니즘 연극제는 지난 축제들이 확장해온 스펙트럼의 영역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반영하고 있다. 그 총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하편에서 언급하게 되겠지만, 우선 축제의 기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연결’이라는 키워드이다. 팬데믹이 장기화된 이후로 연결은 모두에게 절박한 화두가 되었다. 젊은 여성의 자살률이 폭등했고, ‘집합 금지’의 벽 너머에 고립된 소수자들의 가난과 우울이 매일 위험한 수치를 오르내리고 있다. 그렇기에 이번 페미니즘 연극제가 우리가 가까스로 닿을 수 있는 연결의 가능성들을 언급하며 시작된 것은 놀랍지 않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연결은 신뢰와 자신감의 표현으로도 느껴진다. 지난 몇 년간 여성서사극, 여(성)배(우)극, 당사자 연극 등에 쏟아진 관심은 창작자들이 더 복잡하고 정교한 페미니즘 연극을 상상하고 실험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해주었다. 연결이라는 키워드는 각자의 위치성을 존중하면서도 메인 스트림의 시야 너머에서 새로운 방식의 페미니즘 연극이 실험되고 있으리라는 믿음을 표현하고 있다. 아직 페미니즘 연극이 낯설고 각 개인의 힘이 미약했을 때 연대로서의 기능이 요청되었다면, 이제는 무수하게 분기한 선택지들 속에서 자기만의 조합을 이루며 페미니즘 연극을 창안하고 있는 각각의 주체들을 네트워킹하는 기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리즈는 상편과 하편으로 나누어 제4회 페미니즘 연극제 참가작 7편을 차례대로 살펴본다. 상편은 <사라져, 사라지지 마>, <첨부파일_서식01_이력서>, <이벽아전>을 세 작품을 다루고 하편은 <수페로 프랑켄슈타인>, <밑낯>, <순희, 지현, 영숙>, <여기, 한때, 가가> 네 작품을 다룰 예정이다. 전수 리뷰인 만큼 각각의 공연이 보여준 깊이와 넓이를 파고드는 데는 한계가 있다. 다만 피켓팅에 실패해 분루를 삼켜야 했던 많은 관객들에게 이번 페미니즘 연극제를 수놓은 다채로운 공연들의 면면을 전반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진1_<사라져, 사라지지마>  / 출처_페미니즘 연극제

 

사라지지 않도록 만들게

- 도은 <사라져, 사라지지마>

 

매년 페미니즘 연극제의 무대에는 당시의 페미니즘 이슈와 실천적으로 동행하는 액티비즘적인 공연이 오르곤 했다. 예컨대 친밀한 관계 내의 교제폭력과 가스라이팅 문제를 비판적으로 조명했던 2019년 <남의 연애>(제2회)나 일부 페미니스트 진영의 성기 환원주의와 트랜스 혐오에 맞서 유쾌한 펀치라인을 날렸던 2020년 <스탠드 업, 그라운드 업 vol.2>(제3회)이 그러했다. 올해 제4회 페미니즘 연극제가 용화여고 스쿨미투와 비동의 성적촬영물 유포의 문제를 연결지은 <사라져, 사라지지마>로 막을 올렸다는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뜻깊게 다가왔다. 

다른 한편으로 이 작품은 대코로나 시대의 초입에 상연되었던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 김이박이 고등학교에 입학한다>(2020)와 자매결연과도 같은 긴밀한 대화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김이박들은 스쿨미투의 목소리가 들리던 어느 날 “없던 것처럼 흘러”간 고등학교 시절의 수많은 기억들을 상기해냈다. 도은은 그에 화답하듯이 “소문 속 ‘그런 여자애들’은 왜 사라졌을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연극을 시작하고 있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메시지가 올라오는 범상한 반 카톡방 공간에 어느 날 불쑥 올라온 정체불명의 비동의 성적 촬영물, 그리고 그 영상의 주인공으로 지목되어 친구들 사이에서 자취를 감춰버린 소문 속의 ‘그런 여자애’, 고유영을 세 명의 친구들이 찾아 나서는 것이 서사의 뼈대를 이룬다.

이 공연에서 고유영을 증언하고 회상하며 추적하는 인물들은 부모님이나 선생님 같은 ‘보호자’들이 아니라 같은 학급의 여성 청소년들이다. SNS에서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루머에 맞서 은소, 고나, 남정은 그들이 알고 있던 유영이라는 친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를 되짚어 간다. 이번 공연에서는 구현되지 않았지만 (필자가 운 좋게 읽어볼 수 있었던) 희곡 초고에는 교실에 놓여 있는 유영의 빈 책상이 중요한 오브제로 등장한다. 청소년 당사자의 시선으로 일상에 틈입한 상실과 부재의 자리를 응시한다는 점에서 이 공연은 심지어 세월호 연극을 떠올리게 하는 면도 있다. 세월호가 접어놓은 기억을 미투가 펼쳐 읽는 어떤 ‘이후’의 시간성 속에서 관객은 유영이라는 인물의 평범한 형상과 차츰 대면하게 된다. 유영은 무책임하게 확산되는 루머와 달리 “엄청 시끄럽고” “말해야 할 땐” 말하는 친구로 기억된다. 별로 잘 추진 않지만 고나가 일하는 편의점에 놀러와서 뜬금없이 막춤을 추던 유영, 성추행범을 만난 은소를 위로하며 함께 시원한 욕설을 내지르던 유영, 교실에서 이랑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틀어놓고 친구들과 연애 이야기를 나누며 노닥거리던 유영의 모습이 무대 위에 재현된다. 

그러나 그 유영이 사라졌다. 끝내 사라지지 않는 카톡방 메시지 옆의 1을 남겨둔 채 유영은 어디론가 잠적한 것이다. 비동의 성적촬영물이 유포된 이후 가장 친했던 친구들 앞에도 선뜻 나타날 수 없는 유영의 두려움과 불안이 침묵의 형태로 무대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 바다를 어떻게 건널 것인가. 이 질문 앞에서 <사라져, 사라지지마>는 중요한 선택을 하고 있다. 피해 당사자인 유영을 등장시켜 심리를 서술하게 하거나 가해자가 처벌받는 과정을 그려내는 대신 피해자의 주변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은소를 시작으로 하여 세 명의 친구들은 영상 속의 여자아이가 ‘사실 나였다’ 라는 메시지를 반 카톡방에 올린다. 물론 소문의 과녁이 된 유영을 스크럼 속에 가려주기 위한 행동이지만, 다르게 본다면 유영이 당한 일은 여성으로 간주되는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음을 지적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왜 유영이만 소문이 퍼졌지 / 꼬영도 우리랑 똑같은데 / 왜 고유영만 튕겨져 나갔지” 라는 세 친구의 혼잣말 같은 대사는 극중 사건을 유영이라는 특정한 개인이 당한 일로 환원하지 않고 구조적 폭력의 문제로 확장시키는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결코 가깝지 않은 개인과 구조 사이의 거리를 세 명의 여성 청소년들이 진실한 고민과 행동으로 좁혀나가는 과정이 페미니즘 연극제를 찾은 뭇 관객들의 심금을 울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사진2_<사라져, 사라지지마>  / 출처_페미니즘 연극제

  

결국 유영은 돌아온다. 세 친구들이 학교에 붙일 색색깔의 궁서체 대자보를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끝내 사라질 것 같지 않았던 카톡방의 1이 모두 사라진다. “나 안 사라져” 라는 메시지와 함께 유영이 귀환하는 이 결말부는 정당하고 아름답지만, 동시에 가장 많은 고민이 엿보이는 파트이기도 하다. <사라져, 사라지지마>의 제작진은 유영의 극적인 귀환을 통해 서사 공간을 봉인하는 대신 유영을 환대하던 세 친구들이 ‘하던 일을 계속하러 가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연극을 현실 쪽으로 다시 열어놓았다. 세 친구가 극장 곳곳에 붙인 대자보에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의 최유경 활동가가 작성한 <스쿨 미투를 통한 학생들의 요구 4가지>1가 빼곡이 적혀 있다. 연극을 얼음의 책처럼 녹이는 기법을 통해 제작진은 스쿨미투가 여전히 진행 중인 현실 쪽으로 관객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관객석에서 연극을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고유영’들을 위한 배려이기도 할 것이다. 피해 당사자를 향해 섣불리 일상으로 돌아오라 주문하는 대신 연대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수행하는 것. 사라지지 말라는 직접적인 명령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쌓아올리기 위한 하나의 벽돌로서 연극이 그 자리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 누구를 위해 연극을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누구를 가장 중요한 관객으로서 정향(定向)할 것인지를 섬세하게 고려한 이 개막작을 보고 나오며 아, 페미니즘 연극제가 돌아왔구나를 실감하게 된 것은 비단 필자만의 경험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진3_<사라져, 사라지지마> / 출처_페미니즘 연극제

아쉬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상하지만 잔혹하게 흘러가는 일상의 대화들을 보여주는 장치로서 후면에 투사된 카톡방 영상들은 극장 층고의 한계 탓에 종종 배우들의 그림자에 가려지거나 조명에 간섭받곤 했다. 또한 유영이 당한 일을 ‘충격적인 사건’으로 힘주어 재현하지 않으려는 의도를 십분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일상의 흐름 속에서 어떤 변곡점이 돌출하는 순간을 캐치하는 연출적인 템포 조절의 기술이 미흡하게 느껴졌던 것도 사실이다. 비록 배우 중심의 공연팀 운수대통에서 활동하고 있는 강다현, 김별, 백소정, 정은재 배우가 저세상 텐션을 발휘하여 무대 위를 날아다니며 웃고, 떠들고, 춤추는 통에 사소한 기술적인 문제쯤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가급적 기술적 요소를 보완하여 돌아온 <사라져, 사라지지마>를 페미니즘 연극제 이후에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진4_<첨부파일_서식01_이력서>  / 출처_페미니즘 연극제 ⓒ혜영

가장 자기다운 것이 페미다운 것이다

- 배우다컴퍼니 <첨부파일_서식01_이력서>

 

페미니스트‘를’ 연기하는 것 말고, 페미니스트‘로서’ 연기한다는 것은 가능할까. 지난 몇 년 사이 주의 깊은 관객들은 그 가능성을 감지해온 듯하다. 페미니즘의 지향을 지닌 연극에서 배우들이 펼쳐보이는 연기는 뭔가 다르다. 그런데 그 정체가 무엇인지 언어화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현 단계에서는 필자도 어떤 부정태로서만 그 정체를 어렴풋이 소묘할 수 있을 뿐이다. 공연 전체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한 부품으로서 배우의 몸을 동원하지 않는 것, 무대 위에서 실행되는 폭력이 배우 개인의 심신에 과도한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그 톤과 연출 방식을 섬세하게 조절하는 것, 성적 대상화나 고통 포르노에 해당하는 요소를 아예 들어내는 것 등등. 

그런데 배우다컴퍼니의 <첨부파일_서식01_이력서>는 매우 다른 관점에서 페미니스트 연기를 보여준다. 여성 배우들이 공연시간 내내 무대 위에서 ‘자기다운’ 모습으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두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서서희, 송원, 안혜진, 최미향은 자기 자신을 배역 삼아 무대를 점유한다. 물론 그것은 연기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연기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자연스럽게’ 무대에서 움직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척 봐도 훈련받은 배우들로 보이는 네 명의 여성이 우리가 흔히 ‘연극적인’ 연기라 부르는 기술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함께 몸담은 일상을 재현한다. 그 일상이란 (여성) 배우로서의 자격과 자질을 심사하는 오디션 또는 지원사업의 규격화된 틀에 담길 수 없는 예술가/자연인들의 진솔한 삶이 마구 풀어져 나오는 공간이다.

사진5_<첨부파일_서식01_이력서>  / 출처_페미니즘 연극제  ⓒ혜영

공연장에 들어서면 배우들의 이력서가 갈무리된 서류철이 객석마다 하나씩 놓여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어서 울려퍼지는 오프닝 멘트는 관객들이 심사위원의 자격으로 이 자리에 초대된 것임을 알린다. 저마다 서류철을 하나씩 무릎 위에 올려놓은 관객들은 살짝 긴장되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저 무대 위에서 오디션에 통과하기 위한 여성 배우들의 눈물겨운 사투가 벌어지겠구나. 나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어야 할 것인가. 괴롭다… 이런 종류의 상념들이 관객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 공연의 최대 반전은 그런 일이 끝끝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네 명의 배우는 그저 노트북을 들고 테이블에 모여 앉아 오디션 지원서류를 열심히 읽고, 증명사진을 남다르게 찍어보겠다는 호언을 날리고, 지원서를 내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일진일퇴로 입씨름 공방을 벌이고, 그러다가 시립극단이 원하는 이상적인 지원자의 자격에 대한 불평으로 넘어가고, 지원서 항목에 번듯하게 기재할 수 없는 각각의 삶의 이력을 풀어내는 시간으로 자연스럽게 이행한다. 그들의 모습에 심사의 요소란 존재하지 않는다. 심사 자격을 부여받았으나 아무것도 심사할 것이 없다는 것만 확인하게 되는 관객의 아이러니가 “우리의 치열한 삶이 어째서 자격미달이냐”라는 배우다컴퍼니의 외침에 부지불식간 얽혀들고 마는 것이다. 

<첨부파일_서식01_이력서>는 기관이나 협회를 위한 예술가의 증명노동에 대한 연극이기도 하지만, ‘서울’이라는 특권적인 문화 중심지를 향해 지역 예술인들이 스스로의 매력과 가치를 어필해야 하는 상황 또한 일정 부분 겨냥하고 있다. 비록 이번 공연에서 그 지점이 신랄하게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지역-청년-여성-예술인의 상황이 ‘주목할 만한’ 이슈가 되기 위해서는 서울에서 공연을 올려야 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그 뒤에 엄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는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소극장에서 상연되었던 <강진만 연극단 구강구산 결과보고서>(2019)에서도 감지되었던 적이 있다. <구강구산>은 고용노동부 주관 일자리 창출 사업의 일환으로 꾸려진 강진아트센터 산하극단 구강구산이 일방적인 사업 종료로 인해 7개월만에 해체되었던 상황을 보고하는 연극이었다. 강진에서 매일 합숙 훈련을 하고, 완비되지 않은 연습실에서 땀을 흘리고, 마침내 국악과 창을 곁들인 연극 공연이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치열한 과정을 함께 하며 명실상부하게 극단으로서 발을 내딛은 구강구산이 무책임한 행정 처리의 결과로 해체되어 버리는 부조리한 상황이 서울 관객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극단을 잃은 강진의 멤버들이 서울에 도착하여 공연을 벌인 것은 일종의 사건이었으나, ‘상경 공연’을 둘러싼 불평등한 보고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 사건 뒤에도 여전히 남아 있게 되었다.2    

<첨부파일_서식01_이력서>는 페미니즘 연극제에 지원하고 상경을 준비하는 과정 또한 메타적으로 그려낸다. 다행하게도(?) 페미니즘 연극제 지원 과정은 배우들을 괴롭게 하는 전주시립예술단 오디션이나 여타 지원사업과는 달리 긍정적인 톤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관객들이 지금 보고 있는 이 서울 공연이 제작비 확보를 위해 햇반을 싸들고 가느냐 마느냐를 가지고 찬반 논쟁을 벌이는 과정을 거쳐 여기 당도한 공연이라는 점을 잊지 않게 해준다. 배우다컴퍼니가 실시간으로 펼쳐보이는 ‘진짜’ 이력서에는 이처럼 지역, 청년, 여성, 무명 예술가로서 감내하는 가지각색의 차별과 편견의 문제가 녹아들어가 있다.

사진6_<첨부파일_서식01_이력서> /  출처_페미니즘 연극제  ⓒ혜영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은 자기답지 않은 무언가를 부풀려서 보여주는 일을 끝까지 수행하지 않는다. 그들이 자신의 기예와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오디션에서 보여줄 연기와 특기 파트를 서로에게 보여주는 후반부 장면이 유일한데, 이 장면 또한 서로를 가리키며 깔깔거리는 웃음으로 가득 차 있다. 송원은 한국 오디션 지정대사에서 “순수함의 끝판왕”3 배역을 담당하고 있는 <갈매기>의 니나를 그럴싸하게 연기하더니 그 청초한 이미지를 와장창 깨트리는 잔망스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유혹적인 붉은 원피스를 입고 나온 최미향 또한 자신이 배역으로서 발산해야 하는 치명적인 매력을 어필하다 말고 자지러지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 관객이 풍자와 희화화만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공연이 무대 위의 배우들을 우리와 똑같은 동등하고 평범한 사람들로 바라보게 만들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들이 예술가로서의 기량을 무심히 드러내는 순간 지금껏 누적되어 온 공감의 힘을 다해 환호하게 되는 측면이 있다. 가령 경력 단절로 고민하고 있는 성악가 서서희가 홀로 목을 가다듬다가 혜화동1번지 지하극장을 뚫고 나가는 성악 발성을 선보일 때, 관객은 그 무심한 간지에 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막별의오로라의 <메이크 업 투 웨이크 업> 시리즈(2017/2019)를 기억하고 있는 관객이라면, 마침내 우유박스를 밟고 관객 앞에 선 배우들이 이력서 뭉치를 시원하게 찢어버리는 퍼포먼스에서 그때 그 당시의 해방감을 다시 한 번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성에게 주어진 시선의 감옥, 배우에게 주어진 배역의 감옥, 예술가에게 주어진 자격의 감옥을 찢고 나오는 몸들의 환성이 제4의 벽을 뛰어넘는 광경 속에서 모두가 느꼈으리라 믿는다. 페미니스트로서 연기한다는 것은 바로 저런 것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이 공연을 다 보고 나면, 그래서 배우다컴퍼니가 관객에게 제안하고 싶었던 관계성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고 나면, 오히려 관객을 심사위원의 자격에 묶어두고 시종 거리를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배우들이 마주 앉아 수다를 떠는 테이블은 혜화동1번지의 ㄴ자 객석 양쪽으로부터 모두 멀리 떨어져 있었다. 초장부터 관객에게 공감과 밀착을 요구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에서 비롯된 설계였을 수도 있지만, 페미니즘 연극의 관객들이 티만 안 냈지 냉정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겪어본 입장에서는 다소 기우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배우다컴퍼니의 연극이 보다 가깝게,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앉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진7_<이벽아전> /  출처_페미니즘 연극제

 

너를 구하려고 원작을 부쉈어

- 우로보로스 <이벽아전>

 

연극계에 ‘여성서사극’을 만들고 보고 싶어하는 욕구가 형성되고 있음을 언급하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이 되었다. 벡델 테스트나 마코 모리 테스트를 충족시키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그 이상의 여성 주체성을 추구하는 연극은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도식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할 만큼 여성서사극은 장르적인 문법 자체를 정교화하는 단계에 진입하고 있는 듯하다. 우로보로스의 <이벽아전>은 특히 그리스 비극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 하나를 각색의 재료로 선택함으로써 고전의 페미니즘적 비틀기(feminist twist)에 도전한 공연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연이어 상연된 창작집단 파란의 <수페로 프랑켄슈타인>과 여러모로 교차시켜 논의할 수 있겠지만, 지면 관계상 이는 하편으로 미루도록 한다.

아이스퀼로스가 ‘오레스테이아 3부작’을 발표한 이래 아가멤논 일가의 비극은 수많은 작가들의 영감을 불러일으켜 왔다. 이 이야기에는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다시 조명하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는 인물들이 가득하다. 딸을 죽였다는 이유로 남편을 살해한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말할 것도 없고, 예언의 능력을 가졌으나 누구도 그 예언을 믿지 않는 저주에 걸린 카산드라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상응하는 엘렉트라 콤플렉스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엘렉트라가 여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고전 각색의 역사에서 <햄릿>의 오필리어만큼이나 고통받아온 존재 또한 여기에 있으니, 그가 바로 아버지 아가멤논의 원정을 위해 희생물로 바쳐진 이피게네이아이다. 오필리어가 그렇듯이 원작의 틀을 유지하는 가운데 이피게네이아를 재조명하려는 시도는 대부분 그 인물을 더욱 괴롭히는 결과로 이어졌다. 어떻게 각색하더라도 희생과 용서로 정향되고 마는 이피게네이아의 기구한 운명은 반항적인 기질이 다분한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조차 제대로 구제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사진8_<이벽아전> / 출처_페미니즘 연극제

그래서 <이벽아전>은 원작의 틀을 부쉈다. 에우리피데스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저본으로 삼되 그가 이야기를 끝낸 지점에서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기로 한 것이다. 이피게네이아는 이벽아라는 부여의 신관이 되어 새로운 운명을 마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고구려나 부여라는 국가는 역사적인 배경으로 기능하고 있지 않다. 차라리 고구려와 부여는 1950년대 여성국극이 시대적 배경으로 즐겨 차용했던 모호한 고대 국가들처럼 역사 시대의 여명기에 위치하고 있으나 아직 설화 시대의 황혼이 가시지 않은 어떤 시공간,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에 있기에 모든 이야기가 회귀할 수 있는 마법적인 균열의 상징으로 소환된 것처럼 느껴진다. 

고구려의 왕녀였으나 승전을 위한 희생양으로 바쳐졌던 이벽아는 가까스로 살아남아 적국 부여의 신관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세월이 흐른 뒤, 고구려 왕가에 내린 저주를 풀기 위해 부여에 숨어든 남동생 오려수와 해후한 이벽아는 고국의 이야기를 전해듣게 된다. 여기까지는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와 비슷하다. 그러나 고구려 왕가의 파국을 전해들은 시점에서 이벽아는 그가 승전의 제물로 바쳐지던 먼 과거의 날로 타임 슬립하고, 이 SF적인 설정의 개입으로 인해 이벽아는 이미 결정된 운명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벽아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창작집단 LAS의 <줄리엣과 줄리엣>(2018/2019)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유명한 고전 작품을 여성 주인공의 관점에서 재구성한다는 점에서 그렇고, ‘2차 허구’라 할 수 있는 새로운 상상력의 공간을 원작 내에 틈입시켜 작품 속에 기록되지 않은 비화를 창조해낸다는 점에서 그렇다. <줄리엣과 줄리엣>은 우리에게 알려진 세계적인 비극 이전에 줄리엣 몬테규와 줄리엣 캐플렛이라는 두 여성 간의 사랑이 있었다는 파격적인 설정을 통해 가문뿐만 아니라 사회, 국가, 종교, 나아가 역사 자체의 반대에 부딪히는 두 여성 간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려냄으로써 원작을 퀴어링하는 데 성공했다.4 <이벽아전> 또한 타임 슬립 설정을 통해 이벽아를 희생양으로 몰고 가는 원작의 궤도를 비틀고, 분노할 줄 모르던 이벽아가 자신의 운명을 뒤바꾸는 과정에서 마침내 정당한 분노를 각성한다는 여성서사적인 플롯을 그 자리에 삽입하고 있다.

그러나 <이벽아전>은 결말에 이르러 <줄리엣과 줄리엣>과 크게 달라진다. <줄리엣과 줄리엣>에서 두 여성의 사랑은 결국 잊혀지고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이성애 중심의 비극만 남아 현전하게 된다. 그래서 공연의 마지막 장면은 잊혀진 여성들의 슬픔과 한을 봉인하고 있는 것처럼 어둡고 서글프다. 그러나 <이벽아전>의 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뒤바꾸는 데 성공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원작의 틀 바깥으로 탈출한다. 비록 국왕 아감난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이벽아는 자신을 옭아매던 운명의 사슬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진 것처럼 보인다. 오려수가 가문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 부여에서 찾아 헤매고 있었다는 여신상은 자신의 힘으로 운명을 바꿔 새로운 결말에 도착한 이벽아 자신이었던 것으로 판명된다. 

사진9_<이벽아전> /  출처_페미니즘 연극제

<이벽아전>은 스스로 분노를 깨우치는 여성 영웅의 서사를 통해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영원히 고통받아 온 이피게네이아를 구출해낸다. 그러나 이벽아라는 1인 여성 영웅의 형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다른 인물들이 무능하거나 납작하게 그려지는 양상이 감지되기도 한다. 특히 원작의 클뤼타임네스트라에 상응하는 길담란의 경우 ‘가부장제의 속박에 매어있는 구시대 여성’의 역할로 배치되어 있다는 인상이 강한데, 원작과의 싱크로율 문제를 떠나 이벽아만을 오롯이 빛나게 만드는 서사적 배치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천진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 이벽아와 ‘나이든’ 길담란을 계몽하고 구원하는 ‘젊은’ 여성 영웅의 구도는 현재 페미니즘의 세대론적 지형도 내에서도 위험하게 읽힐 수 있다. 그러니까 페미니즘이 2015년부터 홀연히 시작되었고 탈코르셋 세대의 20대 여성들이 아직 눈뜨지 못한 구여성들을 해방으로 이끌고 있다는 식의 이상한 구도와 겹쳐 보이는 면이 있다는 뜻이다. 여성 주체성 담론이 영웅주의와 만났을 때 다른 주체성을 지우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 재권력화될 수 있다는 것은 2021년 현재 가장 민감하게 성찰되고 있는 부분 중 하나인 만큼, 여성서사의 구성에 있어서도 치열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아울러 텍스트 내에서 개연성이 튀는 지점들이 산견된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는 작품에서 타임 슬립은 얼마든지 도입할 수 있는 장치이나 그 설정 자체가 다소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면이 있고, 이벽아나 길담란의 각성 과정도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못하는 인상을 준다. ‘어떻게 하면 여성의 승리를 위한 합목적적인 배치로부터 예술적 거리를 둔 채, 연극이 그려내는 세계의 내부에서 그 가능성과 희망을 발견해낼 수 있는가’는 여성서사극을 만드는 이들에게 주어진 공동의 고민일 것이다. 우로보로스의 <이벽아전>이 더욱 정교해진 여성서사극으로서 관객들과 다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려본다.

 

1. 최유경 활동가가 제시한 4가지 요구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학교 성폭력에 대한 전수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교원 대상 페미니즘 교육이 의무화되어야 한다. 셋째, 사립학교법 개정을 통해 사립학교의 공공성을 보장해야 한다. 넷째, 학교 성폭력에 대한 검찰과 경찰의 적극적 수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2. 사실 <구강구산>은 극적 연기와 프레젠테이션, 당사자 발화와 연희 퍼포먼스를 종합적으로 활용하는 등 하나의 독립된 공연으로서 매우 우수한 연극성을 보여준 공연이었으나, 그 당시에는 ‘지역 이슈’를 보여주는 공연으로서만 담론화된 측면이 있다. ‘지역 예술에 무엇을 기대하는가’와 관련된 편향된 시선의 문제 또한 서울과 지역 사이의 문화적 위계가 노출되는 대표적인 지점이라 할 수 있다.

3. 셰끼스피어, <니나: 순수함? 그게 뭔데. 그게 어떻게 하는 건데.>, 《월간 시선》 2021. 6.

4. 김민조, <젠더 게임의 효력>, 웹진 연극in, 2019. 7. 11.

필자소개
김민조: 프리랜서 비평가. 연극답지 않은 것과 평론답지 않은 것 사이에서 출퇴근하고 있다.   

 

사진10_페미니즘 연극제 포스터 / 출처_페미니즘 연극제 

  1. 인디언밥 제작진분들
    메일도 방명록도 답을 안주신다면 어디로 연락을 드려야합니까?

  2. 회신안왔습니다. llowlight19@gmail.com 로 회신기다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