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네스코의 의무적 희생자들 - 이오네스코의 부조리


1. 부조리극을 조리 있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조리가 없다’라는 뜻의 ‘부조리’라는 말은 불어 압쉬르디테(absurdit)를 번역한 일본식 조어입니다. 이를 우리말로 옮기면 ‘엉뚱함’, ‘당혹스러움’ 쯤 됩니다. -중략 - 부조리극은 조리가 없는 극입니다. 이를 조리 있게 이해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입니다. 」-주간지 한겨레21에 실린 홍기빈 연구위원이 기고한 “밀리면 죽는다”라는 기고문을 팸플릿에서 재인용.


엉뚱하고 당혹스러운 이 연극을 타인에게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 조리 있게 이해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라면 조리 있게 전달하는 것도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 된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카뮈에게 도움을 청했다. 「카뮈가 말하는 ‘부조리 인간’은 ‘부조리를 의식하며 살아가는 인간’, 즉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인간이란 뜻이지 결코 ‘부조리한 인간’이란 뜻이 아니다. 부조리는 인간‘에’도, 세계‘에’도 없다. 그것은 합리성을 열망하는 인간과 비합리성으로 가득 찬 세계 ‘사이에’ 있다. 말하자면 부조리는 합리도 아니요, 비합리도 아니다. 그것은 합리와 비합리의 뒤섞임, 즉 코스모스 이전의 카오스와 같은 것이다.」- 알베르 카뮈, 유기환 著. 살림.


‘부조리 인간’을 ‘부조리 연극’으로 바꾸자.( ‘바꾸자’라는 말은 쉬운 말로 ‘치환하자’라는 뜻임 )

「‘부조리 연극’은  ‘부조리를 의식하며 상연하는 연극’, 즉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진 연극이라는 뜻이지 결코 ‘부조리한 연극’이란 뜻이 아니다. 부조리는 연극‘에’도, 현실‘에’도 없다. 그것은 합리성을 열망하는 연극과 비합리성으로 가득 찬 현실 ‘사이에’ 있다.」


부조리극은 부조리를 의식하는 연극이다. 부조리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가, 부조리(엉뚱함)는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부조리극을 이해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이것이 ‘조리 있게 이해하는 것이 애초부터 불가능한 부조리극’을 이해하는 방식 중의 하나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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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극 속의 연극’의 모양이 가지는 의미.

 연극이 시작되면 세금을 결산하는 마들렌과 신문을 읽는 슈베르가 등장한다. 신문(현실)을 보면서 슈베르는 두 가지를 얘기한다. ‘정치’와 ‘연극’이다. 이 두 가지는 연극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고 있다.


‘정치’ - 슈베르는 정부의 인구 분산 정책을 비판하면서 ‘권장’이 ‘법’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권장’은 의무가 아니지만 ‘법’은 의무다. 의무를 행할 때의 모양은 복종이다.  사랑스러운 아내 마들렌은 ‘법’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슈베르에게 수사관의 말에 복종하라고 말하게 된다. 수사관은 처음에는 예의바르게 등장한다. 이 예의바른 수사관은 ‘권장’의 모습이고, 점점 난폭해지면서 폭압적인 강요를 하는 수사관은 ‘의무’의 모습이다.


‘연극’ - 슈베르의 말을 직접 읽어보자. “지금까지 씌어 진 모든 희곡들은 탐정극 스타일이야. 작품 전체가 멋진 결말로 향하는 일종의 앙케트라고 할 수 있지... 처음부터 모든 게 명확하단 말이야. 탐정극 스타일, 수수께끼 스타일이지. 자연주의 연극, 사실주의 연극! 근본적으로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정말 연극이 새로운 걸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새롭지 않은 탐정극 스타일의 연극이 시작된다. 말로를 찾아 왔다는 수사관. 말로의 이름이 T로 끝나는지, D로 끝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수사관에게 T로 끝난다고 알려주는 슈베르. 엄밀히 얘기하자면 탐정극은 여기서 끝난다. 수사관은 처음에 자신이 알고 싶은 것을 알았다. 말 그대로 ‘처음부터 모든 게 명확한 탐정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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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은 ‘연극 속의 연극’이라는 모양을 하고 있다. 연극이 연극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이 아니다. 타인을 향한 질문이 돌아와 나에게 꽂히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탐정극을 비판하던 연극이 탐정극을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늘날엔 드라마도 비극도 없어요. 비극적인 것은 희극적인 것이 되고, 희극적인 것은 비극적인 것이 되죠. 그래서 인생은 즐거워집니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했는데 나 역시 같은 잘못을 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런 경우 흔히 우습다고 하지 않는가!

   

  ‘말로는 누구인가?’라는 타인을 향한 질문은 ‘말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슈베르는 누구인가?’로 바뀐다. 그래서 말로에 대한 기억을 찾는 과정은 엉뚱하게도 슈베르 자신에 대한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바뀐다. 이 과정 속에서 수사관은 슈베르의 아버지가 되고, 슈베르의 연기를 감상하는 관객이 되고, 기억의 구멍을 메우는 의사가 되기도 한다. 슈베르에게 기억 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면서 자신이 기억 속에 들어와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남편에 대한 ‘의무’와 수사관에 대한 ‘의무’ 사이에서 방황하는 마들렌은 슈베르의 아내인지 수사관의 아내인지 헷갈린다. 또한 슈베르가 기억을 찾는 것을 도와준다고 하지만 결국은 수사관을 도와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슈베르의 친구인 니콜라는 슈베르를 고문하는 수사관을 죽이고, 수사관처럼 슈베르를 고문한다.


 ‘연극 속의 연극’의 모양은 정치 속에서도 찾을 수 있다. ‘권장’은 부탁이다. 그것도 정중한 부탁이다. 수사관의 처음 모습처럼. 그러나 ‘권장’이 ‘법’이 되면 부탁은 복종이 된다. 복종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마치 슈베르가 기억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철과 나무를 먹어야만 했던 것처럼. 법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문제는 법을 만드는 정치다. 정치는 ‘바르게 다스린다.’라는 뜻이다. ‘바르게’에 무게를 두느냐, ‘다스린다.’에 무게를 두느냐에 따라 정치는 희극이 되기도 하고, 비극이 되기도 한다. 문득 공자의 ‘예로 다스린다.’가 생각난다. 예의 바른 수사관 역시 정치의 모습이고, 폭압적인 수사관 역시 정치의 모습이다. ‘권장’ 역시 정치다. ‘권장’으로 다스리지 못하는 것은 ‘예’가 없기 때문이다. 즉 정치가 법으로 다스리는 것은 스스로 ‘예’가 없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다. 타인에게 ‘예’를 행하라고 하는 말이 ‘예’가 없는 자신에게 돌아와 박히는 꼴이다. 이것이 ‘연극을 말하는 연극’이 지닌 부조리다.



필자소개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