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결핍의 감각들을 경유하며: Shi-ne, <HOLE>

2022. 9. 11. 21:24Review

결핍의 감각들을 경유하며:

Shi-ne <HOLE> 리뷰

 

글_성혜인

 

 

“내가 인생에 있어서 흥미롭다고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것, 때로는 극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한, 인생에 뚫린 구멍들, 공백들이다. (중략)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구멍들 속에서 이다.” 

- 질 들뢰즈(김종호 역), <대담> 中 -

 

제공 : 수림문화재단

 

일반적으로 결핍은 채워야 할 존재로 여겨진다. 하지만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며, 결핍을 해소해야만 완전해질 것이라는 착각은 정서적 결핍을 더욱 심화시킨다. <HOLE>(2022년 8월 5일·김희수아트센터 SPACE1)은 “없음-결핍-구멍”의 부정적 도식에 의문을 갖고 내면의 결핍을 긍정하는 이야기를 그려낸다. 공연의 핵심을 서두에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는 건 여러 가지 위험을 수반하지만 그럼에도 서둘러 확언하는 이유가 있다. 음악가 스스로 자신의 결핍에 관한 내밀한 경험과 사유로부터 공연이 출발하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데다 여섯 개의 음악을 촘촘하게 연결해 결핍을 긍정하기까지의 여정을 일관성 있게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연을 갈음하는 ‘HOLE’이라는 제목은 논란의 여지없이 음악가의 의도와 공연의 메시지를 있는 그대로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HOLE>이 의도했던 결핍의 긍정이나 희망이 섞인 제언에서 당대적 의미를 도출하며 공연을 독해하는 작업엔 그다지 흥미가 없다. 음악 공연의 의미를 ‘위로’나 ‘공감’으로 축소 혹은 확장하는 논설에 많은 피로감을 느껴왔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의 관심은 <HOLE>이 가진 ‘명료함’에 있다. <HOLE>은 여러 측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한 공연이다. 정신혜의 선언뿐만 아니라 결핍을 다루기 위해 취한 전략도 직관적이다. 이 글은 명료함으로 수렴하는 <HOLE>에 대한 감상이 어떠한 경위로 형성되었는지 추적한다. 오해를 막기 위해 첨언하자면 명료함이 곧 높은 완성도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욕망이나 결핍이라는 다소 모호하고 추상적인 관념을 시·청각적 감각으로 통일성 있게 구현하는 책략은 그 자체로 음악가에 관한 풍부한 진술이 될 수 있다.

 

제공 : 수림문화재단

 

공연은 피리에 숨을 불어 넣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피리는 대나무로 만든 관대에 서(reed)를 끼워 지공이라 불리는 구멍을 막아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첫 곡 ‘Improvisation of piri’에서는 피리로 구현할 수 있는 음이 모두 배제되어 있다. 대신 피리를 관통하는 호흡의 미세한 떨림과 텍스쳐를 전면에 배치한다. 정적 속에 호흡의 이동만이 감지되는 피리 연주는 발현되지 못한 음과 선율을 끊임없이 상상하게 만들며 결핍, 미완, 부재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연주의 관성을 비트는 이러한 도입은 욕망과 결핍의 관념을 다루겠다는 직관적 선언과 맞닿아 있다.

 

‘O’는 ‘Improvisation of piri’보다 훨씬 직접적으로 결핍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먼저 노이즈 섞인 사운드와 긴 호흡으로 뻗는 태평소 연주에 무용수가 등장하는 영상을 병치하여 불안과 긴장을 증폭시킨다. 이어 영상을 지하 공간과 지상 공간으로 분할해 두 자아의 분열을 담아내고, 깨진 거울, 오염물이 담긴 잔, 폐허가 된 건물이 구멍, 구겨진 원고지와 담배꽁초로 가득 찬 재떨이 등 구멍을 연상케 하는 원형 이미지를 사용해 내면의 감정적 마찰을 드러낸다. 음악의 중반부터 등장하는 모티프 선율은 후반부까지 반복되며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한다. 이러한 분열의 이미지는 ‘암월(暗月)’까지 이어진다.

 

제공 : 수림문화재단

 

<HOLE>을 장악하고 있는 결핍과 욕망, 불안과 분열의 장면은 ‘다시’에서 돌연 중단된다. 정신혜는 2020년 5월 28일에 쓴 시를 읊조리며 자신의 목소리를 무대 위로 소환한다. 정신혜의 낭독은 시의 의미를 전달하는 것보다 목소리라는 재료를 활용하는 데 중점을 둔다. 시간이 흐르며 여러 개의 목소리가 분절적으로 중첩되면서 소리의 질감만을 남겨 놓기 때문에 몇몇 어절만이 파편적으로 포착될 뿐 시의 의미를 유추하긴 어렵다. 표면적으로 ‘다시’는 정신혜가 직접 쓴 시를 음악으로 재구성한 시도이다. 하지만 연주자의 호흡이 ‘빈 공간’을 관통함으로써 소리를 만들어내는 피리의 구조를 자신의 신체로 치환하여 결핍의 긍정을 다른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일, 일, 일’과 ‘초-록’은 이전의 곡들과 확연한 대비를 이루며 결핍을 대하는 태도의 긍정적 변화를 강하게 암시한다. 영롱하게 반짝이는 사운드와 서정적인 선율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따뜻하고 소박한 일상으로 채워지는 구멍의 이미지들은 관객들의 감각을 불안에서 희망으로 단숨에 바꾸어 놓는다. 뚜렷한 장면의 전환은 공연의 의도를 다시 한 번 단단하게 굳힌다. 결핍을 긍정하는 일은 결핍을 채우기 위한 투쟁에서 항복을 선언하며 패배자를 자처하는 것이 아니라 결핍을 나의 일부로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 욕망을 완전히 포기하는 좌절의 상태가 아니라 내면의 구멍에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라는 점.

 

제공 : 수림문화재단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HOLE>에서 연쇄적으로 등장하는 구멍의 이미지나 ‘다시’를 기점으로 이루어지는 뚜렷한 장면의 대비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며 공연에 통일성을 부여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명료함으로 수렴하는 공연의 전략들은 여러 개의 곡을 기계적으로 나열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음반과 공연이 가진 매체의 특성과 차이를 최대한 세심하게 고려하려 했다는 반증일 것이다. <HOLE>에서 영상은 음악을 단순히 부연하거나 압도하지 않으며 공연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자리해 긍정적 의미에서 음반과 차별화된 감상을 이끌어낸다. 결핍의 완전한 해소는 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로 판명되었지만 정신혜의 구멍 속에서 움트는 소리는 누군가의 어둠 속 침묵을 갈라놓을 것이다.

 

 

필자소개

성혜인(비평가)

전통예술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음악비평동인 ‘헤테로포니’ 필진, 비평지 ‘오늘의 작곡가 오늘의 작품’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공연소개

 

Shi-ne <HOLE>


일시 : 2022년 8월 5일(금) 오후 7시
장소 : 김희수아트센터 SPACE 1
연출 : 정신혜, 김민수, 성연준
음악 : 정신혜
기획 : 김민수
영상 : 성연준
기술감독 및 조명디자인 : 강경호
음향감독 : 김용현
음향크루 : 오승관
그래픽디자인 : 정김소리
음원 믹싱 : 재즈말
영상 촬영 : 김수빈 심우진
영상 출연 : 박세은
현장 운영 : 김세연 박종흠
후원 : 수림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