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연희하는 여자들과 연희하기: <연희하는 여자들>

2022. 10. 6. 03:05Review

연희하는 여자들과 연희하기

공연 <연희하는 여자들> 리뷰

 

글_김재훈

 

드넓은 하늘 아래, 탁 트인 공터에서 상모를 쓴 채 연희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각자의 악기를 신명 나게 연주하며 빙 둘러앉은 관객들과 노랫가락으로 소통한다. 상모를 돌리고 온 공터를 누비면서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한다. 연희하는 그들의 입가에는 웃음이 가득하다. 짐작컨대 그들에게 연희는 삶의 이유인 듯 하다.

연희가 끝나고 열기가 가라앉은 무대 뒤편에서 그들은 이 자리를 떠난 다른 연희자를 떠올린다. 함께 있었으면 더 즐겁게 뛰어놀았을, 누구보다 연희를 아꼈던 그들. 임신과 출산으로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여성 연희자들을 떠올리며 그들은 관객들이 떠나고 텅 빈 공연장을 초연히 바라본다.

 

사진 : 안수민

 

공연 <연희하는 여자들>은 그렇게 떠나간 연희자, 혹여나 떠날지도 모를 연희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이냐 가정이냐,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만을 고르라 요구하는 무언의 압박 속에서 연희자들은 이번 공연으로 새로운 길을 찾아본다.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가 버려지는 세상이 아니라 두 선택지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그려본다. 

 

공연의 시작은 연희자들의 인터뷰 영상이다. 영상은 공연장 뒤쪽 상단에 걸린 천들 위로 하나하나 맵핑된다. 하나둘 얼굴이 떠오르고 그들의 목소리가 점차 공연장 내부로 깃든다. 각자 연희를 접한 사연도, 시기도 다르지만 그들에게 연희는 ‘또 다른 나’이다. 연희를 한다는 건 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자 세상으로부터 받아들여질 나를 준비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연희의 순간은 환희의 순간인 셈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에도 여성 연희자들이 겪는 고뇌와 불안은 쉽사리 해소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자아와 사회적 자아가 격렬히 충돌하는 과정 속에서 끝나지 않는 고충을 겪으며 더더욱 깊은 불안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공연의 첫 장면, 여성 연희자의 인터뷰로 무대가 시작된다. 사진 : 안수민

 

무엇 하나 명쾌하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혼란하고 불안하며 흔들린다. 그러한 혼란은 결국 마지막을 상상하게 한다. 도저히 그러고 싶지 않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을 상상한다. 연희가 멈추는 순간이자 삶이 멈추는 순간. 그 광경을 눈앞에 그려본다.

이 다음이 있을까. 이후에 다른 길이 보일까. 무엇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고민의 끝은 쉬이 보일 생각을 않는다. 이 고민이 제대로 된 고민인지, 끝을 향해 잘 찾아가고 있는지, 길이 너무 험하진 않은지, 애초에 끝이 있기는 한 건지. 이 모든 것은 보일 듯 말 듯 한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 답답하고 암담한 마음에 어딘가에 있을 신을 찾아보기도 한다. 온 마음을 다해 신을 찾고 기도하며 기원한다. 

 

<Prayer>연주 장면 사진 : 안수민

 

그런 고민들 뒤로 무대를 꿈꾸는 어린 연희자들의 인터뷰 영상이 새롭게 떠오른다. 어딘가에서 활발히 연희하고 있을 미래를 꿈꾸는 그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맞닿는다. 이전 인터뷰 영상 속의 은퇴한 연희자, 무대 위에 올라있는 지금의 연희자, 티 없이 맑은 미소를 짓고 있는 어린 연희자까지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다.

모든 시제가 맞물리는 곳이자 각 시제의 연희자들이 오르고자 고군분투하는 이곳, 무대 정중앙에서 현재의 연희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결의에 가득찬 손으로 상모의 매듭을 묶기 시작한다.

 

인터뷰 영상의 끝, 상모의 매듭을 짓는 것으로 공연은 마무리된다. 사진: 안수민

 

일반적으로 ‘끝’을 의미하는 매듭 짓기는 연희자들에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끝난 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매듭을 묶고 다시 일어선다.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제는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다. 연주를 하고 싶다는 간절한 바람, 무대에서 힘차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그리는 소망, 자신이 존재해야 할 곳에 당당히 서겠다는 결심, 그리고 무엇 하나 놓치지 않겠다는 다짐은 기어코 그들을 움직이게 한다. 

 

일상적인 영상과 편지를 읽는 장면이 연주 사이 삽입되었다. 사진 : 안수민

 

<연희하는 여자들>은 공연이 지속되는 1시간 동안 기본적인 악기 연주에 영상과 목소리 연출을 얹어 연희자들의 심정을 간접적으로 전해준다.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타임라인에는 연희자들의 불안이 고스란히 드러나 관객에게서 깊은 몰입을 이끌어 낸다. 그와 동시에 곡과 곡 사이에 들어간 내러티브 요소는 전반적인 공연의 구성을 탄탄하게 만든다.

전체적인 구성은 치밀하게 설계되었고 관객들은 자연스레 연희자들에게 몰입하며 그들의 내면을 함께 공유하게 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이야기로 들여오며 먼 거리의 초점을 바로 앞까지 끌어오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시도들로 인해 이번 공연의 연희자들은 앞으로 나아갈 의지를 천명할 수 있게 된다. 공연은 막연하게 아름다운 희망을 보여주지 않고 현실 그 자체를 드러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앞으로 걸어갈 것임을 이야기한다. 

지금의 문제들은 쉽게 해결되지 않고 오래도록 이어질 테지만, 연희자들은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아가고자 노력한다. 끊임없이 매듭을 묶고 악기를 연주하며 삶 그 자체인 연희를 즐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무대가 존재하는 한, 연희자들이 설 자리가 있는 한, 길은 조금씩 보일 테니 말이다.

 

사진 : 안수민

 

설령 길이 보이지 않더라도, 만들어서 나아가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길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남는다. 이후 그 길을 따라온 수많은 연희자들은 또 다른 길을 개척한다. 답을 찾는 여정, 그리고 답에 근접하려는 시도 중에 생긴 상흔 아래 연희자들의 의지는 꾸준히 계승된다. 

앞으로 마주할 무대가 연희자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는 자리길 바라본다. 막연한 불안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갈 힘은 남아있다고, 그런 힘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할 수 있는 곳까지 가보겠다 이야기하는 그들을 멀리서나마 묵묵히 응원하는 바이다.

 

 

필자소개

김재훈

작디 작은 것에서 크나큰 의미를 발견하기 위해 글을 씁니다

 

공연소개

<연희하는 여자들>
국악브라스밴드 시도 / Tory / 민수민정

일시 : 2022년 8월 27일(일) 오후 3시, 7시
장소 : 서울돈화문국악당
기획연출 : 김민수, 박원진, 우성희, 최은영
출연 : 우성희, 임채현, 은구, 박은경, Shi-ne, 손성목, 용균, 남택윤, 박원진
작,구성 : 김민수
음악감독, 편곡 : 추명호
미술감독, 그래픽디자인 : 이민정
음향감독 : 김용현
음향크루 : 오승관
사진촬영 : 안수민
영상촬영 : XOBOO(정지헌)
편지낭독 : 이상희
자문 : 김원민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