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몸 쓰는 맛이 살아있는 무대를 위하여

2009. 6. 15. 11:01Review

 







몸 쓰는 맛이 살아있는 무대를 위하여

제4회 피지컬씨어터 페스티벌

보이첵 그리고... & 의자들


몸이란 소통의 매체인가, 혹은 그 자체로 실존하는 기반인가. 아마 그 어느 쪽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답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후자가 전자에 선행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즉, 보다 근본적인 것이며 평소에 의식하기 힘들지만 언제나 전제되어 있는 조건인 것이다. 연출가 유제니오 바르바는 이를 ‘선(先)표현적’인 층위라고 했다. 피지컬씨어터 페스티벌이 전자, 즉 표현적 층위에서 마임, 춤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하지만, 이 행사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아무래도 후자의 층위가 아닐까.


선표현적 층위는 심지어 어떤 메소드가 덧씌워지더라도 그것을 초월하여 무대에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물론 표현적 층위를 걷어내면 걷어낼수록, 혹은 몸을 쓰는 기존의 문법과 마찰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근본적인 차원이 활성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일종의 밑그림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그것의 발견은 일상의 매트릭스에 가두어진 무감각을 휘저어 각성의 계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 페스티벌의 취지처럼 텍스트에 의지해 말을 거는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만큼 몸을 통해 말을 거는 방식 역시 세심하게 재고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결국 어떤 방법이든 자기부정성을 껴안지 못한다면 근본적 층위까지 파고들 수 없을 것이다. 메소드가 훌륭하더라도 그 자체를 재고할 수 없다면 도그마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적 층위 자체까지 되씹는 작품은 사실 만나기 힘들지만, 적어도 선표현적 층위의 작동 여부에 따라 관극 체험의 질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가령, 정보소극장에서 펼쳐진 이번 제4회 페스티벌에서, 지난 5월 12일 공연된 작품들을 살펴보자.

<보이첵 그리고...>의 경우,
두 주인공 프란츠와 마리, 그리고 제3의 캐릭터 간의 차이가 분명하다. 그것은 주인공들과 달리 구체적인 인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관계 형성에 있어서의 변수이자 예측 불가하고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의 개입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것은 해석상, 주인공들 사이에 끼어 갈등을 유발하는 장교일 수도 있고, 도덕성 이면에 감추어진 욕망의 얼굴일 수도 있다. 그처럼 복합적인 상황을 제3의 무엇으로 뭉뚱그려 압축한 것은 상당히 흥미로운 재해석이다.


확실히 안무가 장원정이 직접 분한 제3자의 등장은 작품에 모종의 긴장감을 부여하며 시선을 끌었고, 표준적이고 아카데믹한 몸과는 대조적인 지점을 형성했다. 다소 평면적인 듯한 주인공들과 달리 심지어 초현실적으로 보이거나 언캐니(uncanny)한 무엇으로 작용했다고 할까. 움직임의 설계를 넘어서 몸 자체의 에너지나 질감이 훨씬 우세하게 지배하면서 공간을 획득하고 해석의 욕구를 자극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적 층위, 즉 움직임 구성이나 연출에 있어서의 전형성을 떨치지 못했고, 제3의 인물의 복합성을 좀 더 풍부하게 살리지 못하면서 갈수록 느슨해졌던 점은 여전히 아쉽게 남는다.




도도댄스와 극단 행복자의 공동창작 <의자들>의 경우, 일단 캐릭터를 고정시키거나 서사를 꿰어내려는 욕망을 덜어낸 점이 눈에 띈다. 일상 속에서의 통찰에 의해 끄집어낸 조각들을 이어 붙이는 방식을 주로 택하면서, 통상적인 연극하기의 방식에서 벗어나 삶 자체를 텍스트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이 사용하는 제스처나 마임은 다소 관습 의존적인 면이 있지만, 맥락을 펼치면서 구체성을 획득하는 미덕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당연시되는 방식 이외에 형식에 대한 고민이 좀 더 가미된다면 탄츠테아터(tanztheater)처럼 친숙함과 이질성을 넘나들며 삶 자체를 들여다보는 힘을 더욱 파워풀하게 가져오는 차원까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실 의자라는 것은 얼마나 평범하고 흔히 쓰이는 소품인가. 대부분의 작품에서 그것은 주로 고독하게 무게 잡고 고민하는 용도로 사용되곤 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러한 전형성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들의 의자는 추상적인 의자가 아니라, 바쁜 출근길에 비좁은 지하철 의자이거나, 역할과 경쟁에 짓눌리는 의자이거나, 한 치도 틀림없이 지켜야 하는 강박적인 척도가 되기도 한다. 즉, 용도와 상황에 따라 살을 입고 구체성을 지니는 의자이다. 그만큼 은유적 지평의 구성이 치열하게 연구되었음을 뜻한다. 이에 따라 의자도 퍼포머도 무한하게 변신하는 것이다.



물론 표현적 층위가 지나치게 친숙함을 지향하거나 잘 알려진 방식에 의존하는 면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장면마다 운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많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배우-무용수마다의 개성과 질감의 독특성은 가장 큰 자산이다. 그것은 전통적인 방법론 자체를 거쳐서 뚫고 나오는 것이며, 거기에 충실하지만 결코 구애되지 않는 차원의 것이다. 심지어 눈 밑의 다크써클까지 삶 자체에서 배어나오는 모든 것이 감각소로서 살아있다. 이 작품이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입체감을 획득한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그들의 몸에서 엄청난 트레이닝의 양이 짐작이 되지만 거기에 짓눌리지 않고 각자의 것을 뽑아낸 것은 놀랍다. 자칫 지나친 기술은 독소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그 안에 들어갔다 나오는 길도 그들만이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어떻게 용감하게 부딪히느냐 하는 것도, 어느 갈래로 길을 터나갈지 하는 것도 알 수 없다. 이런 것이 아마도 피지컬씨어터를 보는 매력일 것이다. 



필자 | 허명진 무용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