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논리 너머의 것, "죄악의 시대"展 (2)

2010. 2. 23. 13:36Review


죄악의 시대 (2)

글 ㅣ 개쏭

-T와 F로 나타낼 수 없는 전시

 
죄악이란 무엇인가, 또한 그 죄악이 사회 속에서 표현되는 범죄란 무엇인가.
대안공간 루프에서 전시된 ‘죄악의시대’는 이러한 것들에 대한 흩뿌려진 스프레이같았다.

죄악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를 살펴보자.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누군가를 죽였다. 나는 그 한 사람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왜 죽였
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누군가를 죽였고, 그 모습을 본 누군가가 경찰서에 신고를 했고, 경찰들이 달려
와서 그를 체포해갔다. 몇 날 동안 그 사건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자기 어깨를 부여잡고 떨었고, 그 후
몇 주 동안 그 사람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욕을 퍼부었고, 그 후 몇 달 동안 사람들은 자기들은 그 사람
같지 않다고 자신했으며, 잠시 지나가는 사형이란 소동이 있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사람들은 죄와 벌에 대해 아이들에게 설교할 꺼리가 생겼다.


이러한 죄인에 대한 이해는 무엇을 불러오는가. 죄에 대한 질문, 혹은 그러한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질
문일 것이다. 어떠한 죄인가, 그 죄를 저지른 죄인은 적절한 처벌을 받았는가, 등. 이런 질문들은 언어
를 통해서 사고하는 한에는 끊임없이 지속될 수밖에 없다. 언어는 생각의 질문의 틀을 구성한다.

니체는 이러한 언어의 문법적 한계에 대해서 지적한다. 죄를 지었다는 말을 할 때, 죄라는 단어가 나타
내는 무엇인가가 실재할 거라 생각하게 되고, 지었다라는 말을 통해서 그 행위가 죄를 짓지 않는 행위
와 구별될 수 있는 개별적이고 단절된 행위라고 여기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는 죄인이다’라고
말할 때는 어떠한 전제가 깔려있는 것인가. 너라는 구별된 개체가 있고, 죄인이라는 구별된 개체가 있
다고 여기게 된다. 이러한 언어의 틀 안에서 나올 수 있는 문제의식이라봐야 두가지 뿐이다. 너는=죄인
이기에 처벌받아야 한다-다만 어떤 종류의 처벌을 줄지는 생각해보자, 라든가, 너는 죄를 저질렀지만
그 죄와 불리된 인(人)이기도 하다-그러니 죄를 미워하더라도 그것과 개별적으로 있는 인(人)인 너는
미워하지 말자, 정도의 것들이다. 이러한 질문들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 문장의 의미를 이루는 기본요소인 단어들에 대한 정의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마치, 언어로 표현했기에 ‘죄’나 죄와 분리된 ‘너’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식으로 말이다. 이러한 믿음에 대해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그 믿음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일종의 긍정이 최초의 지적 활동인 것이다. 처음에는 <참이라고 굳게 여기는 일>이 있다. 그러므로 어째서 <참이라고 굳게 여기는 일>이 발생했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참>의 배후에는 어떠한 감각이 도사리고 있는가?” -[권력에의의지]. 506.

 

 



전시의 사진들은 끊임없이 죄악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죄악을 정의하는 것은 누구이고, 그러한
정의 끝에 남는 것은 무엇이냐고. 파괴된 놀이터의 모습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아니, 과연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실은, 말로 할 수 없는 것은 아닐까.

즉, 진리값으로 나타낼 수 없는 전시라는 것이다. 진리값이란, 명제로 구성된 언어의 경우 갖게 되는 것
으로, 그 명제의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틀을 말한다. 이는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구상되었는데, 그는 기존의 철학이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없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고 했던 시도라고 말하며, 그러한 행위가 의미가 없음을 이야기한다. 즉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고 하기에 헛소리이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죄악의 시대’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한다. ‘범죄에 대한 조사기록부’는 말이 안되는 말을 해버리고,
‘사적비극의서’는 이 말할 수 없음을 말하려다 아예 그 말할 수 없다는 속성을 간파하고 책을 실로 꿰매
어 봉인을 해버린다.

그렇다면 이 전시는 말이 안되는 것을 말하려고 한 의미를 잃어버린 전시인가. 그렇게만은 볼 수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그 스스로는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을 하지만,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는 이유는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말
할 수 없는 것들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대화들, 예술이나 종교가 말하는 것들은 언어의 논리적
틀로 설명불가한 말할 수 없는 것들인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러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더 중요하
게 보았다. 다만, 논리성을 따르는 철학적 언어를 통해, 명제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나 실은 말할 수 없
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즉 의미를 잃은 언어에 다시 의미를 부여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논리는 침묵해야한다. 논리를 벗어나있기 때문에.

말했다시피, ‘죄악의 시대’는 이러한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한다. 논리 너머의 것들, 법칙-RULE의 너머
에 있는 것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논리적인 범죄가 어디 있겠으며, 논리적인 삶이 어디 있겠는가. 말
할 수 없는 삶에 대해서, 설운舌耘- 혀를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너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그렇기에 지극히 보편적인 상처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한명한명의 사람들의 언어를 잘라내어 버리는 RULE-뭉뚱그려 말해버리면 국가라는 것은 과연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실은 국가라는 것도 논리적인 말의 틀을 사용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있
지 않은가. 국가가 내세우고 있는 법칙들이 과연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 법을 집행하는 한명한명의 사
람들이 사는 삶은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용산 철거민들을 때려잡는 사회초년생 용역들의 삶은 과연 논
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음영짙은 태극기 아래에는 목을 얽어매는 훈장과 표창장에 가려 잘 보
이지 않는 조그만 글자가 새겨져 있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친구들의 얼굴을 몽타주로 그리면 범죄자의 얼굴이 되듯이, 국가라고 불릴 RULE은 모든 사람들을 설
운舌耘, 혀를 잃어버린 사람들로 만든다. 자신만이 빛을 받으며 자신이 T라고, 자신을 따라 T가 되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T는 조용히 말한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비판하지 말고, 꼬투리잡지 말고, 당
연하게 보이는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범죄자는 좃같은 것으로,
대한민국은 우러러볼 것으로,
엄마 아빠 말잘듣고,
일찍 일어나 일찍 발딱고 잠이나 잘것을,
그렇게 아르헨티나의 GNP와 축구경기에 대해서나 생각하라고.

이렇게 거대한 폭력을 만날 때, 니체의 외침은 그 진리의 폭력에 휘둘리는 우리에게 강력한 대항의 무기가 된다.

Q. ‘그 믿음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A 中 a. 그 믿음의 배후에는 자신이 진리라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의 배후에는 자신이 진리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과연 진리를 상정하고 자기 스스로 진리라 말하는 국가의 배후에는 무엇이 있는가? 과연 그 배후에는
어떠한 말할 수 없는 것도 없는 것일까. 가치판단의 가장 깊은 심연에는 어떠한 말할 수 없는 것이 또아
리틀고 있는 것인 아닐까. 이 모든 물음에 대해서 국가는 단 한가지 태도를 취한다. 혀를 뽑는다. 모내
기를 하듯, 돈과 시선과 처벌의 낫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없다고 말하는 모든 혀를 잘라내는
것이다. 혀가 뽑히고, 누군가는 감시자가 되고 누군가는 범죄자가 된다. 마을 순찰을 도는 설운마을 사
람처럼. 
 


나의 고향은 설운이다. 舌耘. ‘잃어버린 혀’라는 뜻이다.
때문인지 이곳 사람들은 퍽이나 말이 없다. 다행히도 나는 간혹 말을 할 줄은 아는데,
별 쓸모가 없다. 아마도 돌아오는 맞장구 한 줌 없는 이유일 것이다.
물론 그들이 실제로 말을 못하는 것인지 안하는 것인지에 대한 사실 여부는 의미를 잃은지
오래다.
요즘 나는 변변찮은 어떤 무리에 가담했다. 마을 자율 순찰대. ......
이상하게도 밤길 순찰을 돌때 나는, 설운에서 원정 온 정의로운 기사에 대한 자긍심이라기보
다 정체모를 탈선과 이탈의 흥분으로 떨리곤 한다는 것이다. (사적비극의 서 中)

 


이를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니, 벗어날 수 없다. 그래도) 벗어날 수 없다면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철학을 스스로 뒤엎는다. 언어가 일종의 게임과도 같다는 것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말장난을 보면서, ‘논리-철학논고’의 전제인 언어는 세계의 무언가와 1:1로 대응
한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죄’란 단어는 어디에 놓이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미
를 발한다. 뉴스에서 말하는 범죄의 뉘앙스와, 직접 부딪힌 범죄자의 뉘앙스가 같을 수는 없다. 이런 의
미가 배치에 따라 변한다는 이해가 바로 우리가 ‘설운’을 벗어나기 위해 밟아야할 징검다리이다. 그리
고 이러한 ‘진리의 파괴’ 혹은, 하나의 단일한 T와 F를 재단하는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이제까지 감춰
져왔던 수많은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시작은 비명을 되찾는 일이다. 남김없이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전할 수 있도록 (사적비극의 서 中)



세상은 T와 F로 나타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T와 F를 말하는 것은 그것들로 나타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너무나도 많은, 이 T와 F로 나타낼 수 없는 것들을 말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다름아닌, ‘비명’을 되찾는 것이다. 논리정연한 명제로 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말할 수 없는 것들을 그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비명으로서 지르는 것. 남김없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의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고통을 전할 수 있도록. ‘죄악의 시대’는 그러한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비명으로 가득 차있다. 이것이 바로 필자가 그냥그냥 리뷰를 풀어나가지 못했던 이유, 전시장을 벗어나서도 벗어난 것 같지 않았던 이유이다.

<죄악의시대>

장소 대안공간루프
일시 2010.1 15 - 2010.1.31

오늘날 매체는 저옛날 무당처럼 제의를 주재한다. 하지만 차이점이 있다. 현대는 초자연의 신비가 제거된 시대라는 것. 그렇기에 제의가 연출되는 무대는 일그러진 난쟁이 꼬마들이 아웅다웅 할 수밖에. 신비는 고사하고, 희극이 연출되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 같은 제의는 결국 오락에 가깝다. 매체는 각본도 쓰고 연출도 하며, 입맛에 맞게 범죄를 요리한다. 당연하게도 개별적 범죄를 일으켰던 사회적 인과관계는 희석되고, 일회적 볼거리만 양산된다. 여기에 권력의 입김이 들어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오락과 도덕은 그렇게 통일된다. ■ 김상우

8명의 작가와 8명의 연구자가 참여하여,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범죄에 대한 생각과 성찰을 작품과 에세이 등으로 풀어내었다. 이 전시는 범죄와  관련한 내용을 소개하고,  국가와 시대에 대하여 의심하지 않는 요즘의 세태를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