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010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②<무브먼트 당당>의 '떠나는 사람들'

2010. 6. 4. 20:44Review


<2010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두 번째 이야기




지금, 여기!
떠나는 사람들

<무브먼트 당당> 김민정 작/연출 

 정진삼






동족상잔의 비극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한국전쟁 60주년이다. 그간 전쟁이라는 주제로 얼마나 많은 희곡텍스트와 공연이 생산되었는가. 어림잡아도 수십 편이다. 내용들은 하나같이 암울하다. 전쟁자체도 참담한데, 연극도 우울하고, 의미도 암담하다. 대략 난감하고, 총체적으로 어둡다. 우리의 역사, 그렇게 ‘침울’ 밖에 없었나. 전쟁은 ‘명랑’과는 어울릴 수 없는 것일까. 그. 러. 나.


지금 여기.  


 서울 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꼭지에서 선보인 공연 <떠나는 사람들>은 ‘재현’ 에 사로잡힌 전쟁서사의 천편일률적인 시각화/의미화와 과감히 결별한다. 그리하여 한국 전쟁에 관한한 유쾌/발랄하며 동시에 처절하고 감각적인 퍼포먼스가 탄생했다.

  

 시체가 연상되는 즐비한 옷가지들. 황량한 무대. 첫 장면은 조촐한 결혼식으로부터 시작된다. 검은 옷을 입고 둥글게 모인 사람들 가운데 식을 거행하고, 마냥 즐거울 수도 없는 그 마당에 조용히/담담히 미래를 약속한다. 조촐하게 음식을 나누어먹고 길을 떠나는 사람들. 빈 무대에서 10명 남짓의 피난민들은 개울을 건너고 벼랑을 기어오르며 피난 공간을 형상화한다. 그간 ‘무브먼트 당당’이 선보이지 않았던(?) 진지함의 무게 덕분인지 관객들도 말없이 그들의 정처 없는 피난길에 동참한다. 그. 러. 나. 웬걸.


 도저히 힘들어서 못가겠다. 잠깐 쉬자, 라는 말을 뒤로 하고 그들은 그제야 본색을 드러낸다. 죽음의 그림자처럼 그들에게 덧 씌어진 검은 옷가지를 훌훌 벗어던지자 형형색색의 나시티와 반바지, 치마가 나타난다. 남자들도 뒤질세라 하얀 셔츠와 검은색 바지로 한결 가뿐해졌다. 하긴, 전쟁이라고 모두 죽을상을 하고 심각하게 고뇌에 빠져 있는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한국 전쟁 당시 피난의 메카(?)였던 부산은 밤마다 유흥이 벌어졌고, 여전한 교육열에 초등학교 수업은 거의 정상화를 이뤘으며, 심지어 그 와중에 총선거까지 치뤘다. 피난상황을 ‘울상’ 으로 일관하는 것이야 말로 오히려 ‘비사실’ 적인 셈이다.
 




지금 여기.


 인과의 내러티브로는 도저히 설명할 길 없는 탈(脫)현실의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피난 가는 이 마당에,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스카 밴드, 킹스턴 루디스카가 등장한 것이다. 노는 판에 음악이 없으면 서운하지, 우리가 음악을 들려주겠어요, 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대 한켠을 차지한 그들. 8인조의 브라스 밴드가 들려주는 ‘라이브’ 연주는 무대 위 역사적 시공간을 허물고, 현장의 공연성을 배가시켰다.


 어린아이들은 무대 위를 뛰어다니며 노는 것에 정신이 팔려있다. 그러나 그들의 놀이는 동족 상잔의 갈등으로 비화된다. 패가 나뉘고, 편이 갈리고, 싸움이 벌어진다. 논쟁에서 격투로, 몸 ‘싸움’ 이 ‘춤’ 으로 변모된다. 때리고, 맞고, 패고, 쓰러지는 과정이 흥겨운 군무를 통해, ‘예술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결국 ‘춤’ 이 된 ‘쌈’ 은 그들을 완전히 탈진시킨다. 승자도 패자도 없다. 이념도 개념도 없다. 바닥에 누워 학학대는 그들은 서로를 보듬어 함께 나아갈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몸’의 공동체인 셈이다.


 ‘당당’ 은 동료애와 휴머니즘을 억지로 강조하는 기존의 내러티브 대신 거리두기를 통한 유머로 전쟁 상황을 이채롭게 제시한다. 예를 들어, 갈증에 괴로워하던 그들은 무대와 객석을 누비며 물을 달라고 구걸하고, 겨우 밴드를 통해 얻게된 물통을 서로 나누게 된다. 허나, 그들은 서로를 위하는 마음, 눈치 때문에 쉽게 마시지 못하고, 결국 여자애에게 고스란히 물이 돌아간다. 서로의 우애를 확인하며 물을 원 샷 해버린 여자. 감동이 밀려오는 찰나, 그녀에게 발길질과 욕이 쏟아진다. 세상에 이런 비극적인 유머가 어디 있으랴. 전쟁판에서는 물은 피보다 진하다는 게 ‘당당’ 식의 유별난 화법인 셈이다. 게. 다. 가. 한 술 더 떠,



 지금 여기.


 물보다 피보다 진한 무언가가 등장했다. 배우들이 들고 들어온 대야에 담긴 그 하얀 액체. ‘설마?’ 했던 우려는 ‘진짜!’ 라는 관객의 감탄사로 뒤바뀐다. 리얼 버라이어티 퍼포먼스가 임박했다. 막걸리가 사발째로 등장하고 무대 위 배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관객들에게 술을 푼다. ‘지금 여기’ 고통과 암울의 전쟁판은 열정과 난장의 축제판으로 변모한다. 킹스턴 루디스카의 음악이 곁들여지니, 공연장은 무도회장을 방불케 하는 생명의 열기를 뿜어낸다.


 열 명의 배우들은 배나 많은 관객들을 끌고나와, 빈 무대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모두 함께 어우러진 막 춤판. 무대와 객석의 경계도 이렇게 허물어진다. 노골적이며,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도 인터랙티브 퍼포먼스를 가능케하는 ‘당당’ 의 시도가 더없이 기차다. 이렇게 한판 제대로 벌인 뒤 배우들은 무대 곳곳에 분위기와 알콜에 취해 나뒹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여기.


 다시 전쟁의 끔찍함이 엄습해온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 수 없는 폭격기가 지나가고, 총포소리가 난무한다. 한 사람이 죽고 나자 판의 여흥은 자취를 감춘다. 그들은 학살의 대상이 되어 무형(無形)화된 폭력 앞에 무릎을 꿇는다. 베토벤 교향곡 7번의 3악장이 흐르고, 그들은 명분도 이유도 없는 죽음을 맞이한다. 몇 분 전만해도 살려고 아등바등댔던 그들은 침묵으로써 흐느끼는 몸을 보여준다. 하나씩 아스러지는 생명. 망자의 원혼을 달래는 소복입은 여인네가 지나가면, 그제야 전쟁의 극악함은 더 없는 슬픔과 끔찍함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파고든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대신, 산자는 말 대신 ‘몸’ 으로 증언을 이어간다. 


 한명씩 등장하여 상의를 탈의하고 몸을 노출하는 듯 하다가, 다시 옷을 입고 사라지는 장면은 성적(性的)/물리적 폭력 앞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모멸과 수치를 감각적으로 형상화한 명장면이었다. 그들은 이제 완전히 떠나갔다.


 다시, 텅 빈 무대. 퇴장했던 킹스턴 루디스카 밴드가 자리를 잡는다. 시체들은 다시 깨어나 그들의 ‘원통(寃痛)함’을 노래한다.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당당. 처음에는 한스러운 곡조로 운을 떼더니 점점 신명을 회복하고서, 다시 그들만의 살아있는 ‘육체’ 로 현현(顯現)했다.

 

 <떠나는 사람들>의 배우들은 10명이 넘는 배우들이었지만, 각각의 개성이 빛을 발했다. 그들은 무대 위에서 ‘살아있기’ 를 멈추지 않았으며, 그간 ‘무용극’ 작업을 해왔던 ‘당당’ 의 무용수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현대 무대예술의 과제는 뛰어난 기교를 보여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진실한가를 제시하는 데 있으리라. 의외의 어울림으로, 동시대 감각을 불어넣어준 킹스턴 루디스카의 자메이카 음악도 빛났다.





 

지금 여기.


 세계 연극은 이미 탈 희곡 중심의 연극(postdramatic theater)의 흐름을 타고 있다. <떠나는 사람들>은 이에 조응하는 퍼포먼스일 것이다. 일방적 의미 지시의 한계를 넘어, 다양한 의미들이 쌍방향으로 생산되었으며, ‘시청각’ 중심의 재현적인 연극이 아니라 미각과 촉각, 후각으로의 감각 영역의 확장을 꾀했다. 일차원적인 폭력의 재현은 사라지고, 명랑과 발랄, 전율과 비탄의 신체언어가 무대 위에서 ‘전쟁’ 을 다시 보게 했다. “미래야 솟아라” 라는 그들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기회를, 지금 여기의 ‘현존’ 으로 거침없이 돌파한 시도가 실로 대단하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예술적 상상력을 통하면 된다는, 명쾌한 해답이 여기에 있다.


 머릿속으로, 이성적으로만 경험하지 못한 ‘전쟁’을 ‘나’ 자신이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으리라. 그러나 지금 여기, 무대 예술을 통해 내 몸에 각인된 전쟁, 내 감각이 경험한 전쟁의 끔찍함은 우리로 하여금, 도저히 전쟁을 반대할 수밖에 없게 할 것이다. 그리하여 ‘무브먼트 당당’ 은 무대 위에서 ‘살아있음’ 으로 동시대 관객들의 ‘옳음’을 증명했다. 지금, 여기. 연극만세!







무브먼트 당- <떠나는 사람들>


작/연출 : 김민정
  : 김현아, 김수진, 정마리, 백운철, 문창완, 정유미, 서재영, 윤종훈, 이현경나기환, 이설희, 박철수, 신지선, 이영훈, 이영묵 

<작품소개>
60년 전의 학살, 14년째 방치된 유해 990구!
삶과 죽음의 길을 넘나들며 겪는 흥미진진한 피난길 이야기. <떠나는 사람들>은 각 분야의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다양한 형식을 아우르는 한바탕 축제와도 같은 공연이다. 춤(움직임)을 무대언어의 기본으로 하여 독창적인 공연형식을 선보인다. 스카밴드인 킹스턴루디스카의 라이브 연주가 가세했다.


<2010 서울연극제> http://www.stf.or.kr



인디언밥에서는 <2010 서울 연극제> ‘미래야 솟아라’(5월 17일부터 22일까지 매일 한 편씩 공연,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 참가한 총 6편의 작품 리뷰를 릴레이로 연재합니다.

‘미래야 솟아라’는 “실험, 대안, 미래적인 연극 언어”를 모색하고 “한국연극의 미래를 가늠”한다는 취지로 올해 처음 신설되었습니다. 인디언밥은 “미래 연극 개발 프로젝트”를 표방하고 있는 ‘미래야 솟아라’에 선정된 작품들을 통해 연극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기회를 나누고자 합니다.

6편의 리뷰 후에는 이번 기획에 참여한 3명의 필자들과 함께 나눈 뒷담화 수다가 공개됩니다. 리뷰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작품에 대한 뒷얘기를 비롯해 '미래야 솟아라' 기획에 대한 소감, 수상 결과에 대한 수다들이 담길 예정입니다.



■ 인디언밥의 <2010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작품 리뷰 연재 순서

순서

단체명

작품명

공연날짜

수상

필자

1

씨어터제로

홀맨(Hall man)

5.17(월)

정진삼

2

무브먼트 당당

떠나는 사람들

5.18(화)

작품상

정진삼

3

극단 인

잃어버린 시간들

5.19(수)

연기상
(김송이)

조원석

4

극단

나비효과 24

5.20(목)

연출상
(이자순)

아데모모

5

극단 원형무대

세 마녀 이야기

5.21(금)

아데모모

6

라나앤레오

하이! 스마트월드

5.22(토)

조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