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2010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③잃어버린시간들-극단 인


2010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세 번째 이야기: <잃어버린 시간들> 극단 인 / 박성준 연출



 
3개의 작품, 하나의 접점?

"환상이 주는 환상"



 조원석






이야기가 있다.


머레이 시스갈이 쓴 <타이피스트>의 이야기가 있고, 송종헌이 쓴 <세속 도시에서의 사랑> 이야기가 있고, 테네시 윌리엄스가 쓴 <유리 동물원>의 이야기가 있다.

이 세 이야기가 하나의 이야기로 재구성되어 연결된다.


박성준이 재구성하고, 박성준이 연출하고, 박성준이 출연한 연극.

한 배우가 여러 명의 인물을 연기하고, 한 인물을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하는 연극.


이야기는 연극에 등장하는 큐브 모양의 퍼즐처럼 풀기 어렵다.

이 복잡하고 독특한 연극을 이해하기 위해 이 글 역시 퍼즐 같은 질문의 형식을 빌린다.


큰 질문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환상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혹시 사랑이 아닐까.




<타이피스트>의 사랑


회사 동료인 성준과 영학. 타이피스트의 일은 단조롭고 무료하다. 사장은 5분 지각한 영학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은 재미없는 일을 하고 있다. 유일한 재미는 둘이 떠드는 수다다. 처음에는 티격태격 하던 수다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과정 속에서 일치를 보인다. 그리고 느닷없는 포옹과 사랑을 고백하는 두 사람. 영학은 결혼까지 생각 하지만 성준은 결혼이라는 말에 영학의 품에서 떨어진다. 지켜야할 가정이 있다는 말과 함께.


그리고 퇴근.


다시 출근하는 성준. 하지만 영학은 등장하지 않고 혜선이 등장한다. 그 사이 많은 세월이 지났다. 성준과 혜선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성준과 영학 사이에서 벌어진 일들과 비슷하다. 수다를 떨다가 의견의 일치를 보이면서 다시 사랑을 고백하는 두 사람. 그리고 포옹과 떨어짐.


아마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 둘의 사랑은 일상처럼 출근과 퇴근을 반복했을 것이다. 이 둘의 사랑은 메마른 일상에 내리는 단비였을 것이다.



작은 질문 "영학은 왜 갑자기 혜선이라는 인물로 바뀐걸까?"

성준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준은 영학을 영학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다.

 성준은 혜선을 혜선이기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다.


성준이 사랑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관심과 자신이 느끼는 무료함을 달래줄 수 있는 환상이었다. 그래서 영학과 혜선이 환상 속에 현실을 끌어들이자 포옹을 풀고 떨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준에게 현실은 아내와 자식들이다.


작은 질문 "영학은 왜 갑자기 혜선이라는 인물로 바뀐걸까?"

혜선이 시간을 잃었기 때문이다.

영학과 혜선은 한 인물을 두 명의 배우가 연기한 것이다.

시간을 잃어버린 혜선은 자신이 한때, 영학이었다는 것을 잊었다. 그리고 성준을 사랑했고 사랑을 포기한 사실 조차 잊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성준을 사랑할 수 있었고 사랑 속에 현실을 끌어들이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작은 질문 "영학은 왜 갑자기 혜선이라는 인물로 바뀐걸까?

성준이 시간을 잃었기 때문이다. 

성준의 시각에서 보면 영학과 혜선은 다른 인물이다. 시간을 잃어버린 성준은 영학과의 사랑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혜선에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혜선이 또다시 사랑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실수를 할 것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

 

큰 질문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환상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사랑일 수 있겠다.






<해리>의 사랑

나이트에서 만난 성준과 미숙은 하룻밤을 지낸다. 성준보다 먼저 잠에서 깬 미숙은 전화 한 통을 받는다. 전화를 건 사람은 성준의 친구, 성준이다. 친구 성준은 미숙에게 자신이 갈 때 까지 기다리라는 말을 한다. 미숙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전화 속 성준에게 호기심이 생긴다. 잠에서 깬 성준이 미숙에게 이제 그만 가라고 하지만 미숙은 성준의 친구, 성준을 기다려야 한다며 나가기를 거부한다. 성준은 자신의 친구 중에 성준이라는 친구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미숙은 친구 성준을 끝까지 기다릴 심산이다.


성준은 식당에 갔다가 오면서 음식을 사오기도 하고, 미숙과 수다를 떨면서 가까워지기 시작하지만 친구 성준을 기다리는 미숙을 놔두고 성준은 떠난다. 

 

송종헌의 <세속 도시에서의 사랑>에서 모티브를 따온 이 이야기에서 사랑은 희미하다. 나이트와 하룻밤의 열정은 사랑이 아니라 욕망이다. 욕망은 다가갈 수 있지만 사랑은 기다리는 것이다. 잠에서 깬 성준은 미숙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전화 속의 친구 성준은 미숙의 이름을 알고 있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는 친구 성준에게 미숙은 기다림으로 대답한다. 이 기다림 속에서 성준과의 사랑이 싹 트려고 하지만 결국 성준은 떠나고 미숙의 기다림은 끝을 맺지 못한다.


작은 질문 "성준의 친구, 성준은 미숙에게 어떤 존재인가?"

욕망 속의 사랑이다.


욕망과 사랑이 분리된 도시. 욕망과 사랑이 분리(해리)된 성준. 미숙과 하룻밤을 보내는 성준은 욕망이고, 미숙에게 전화를 건, 성준의 친구, 성준은 사랑이다. 그래서 <세속도시에서의 사랑>은 욕망 속에서의 사랑이 된다.

 

작은 질문 "욕망 속에서의 사랑은 정말 사랑일까?"

혹시 욕망이 주는 착각은 아닐까.

 

욕망은 뜨겁고, 사랑은 따뜻하다. 미숙은 뜨거움을 먼저 느끼고 따뜻함을 나중에 느낀다. 뭔가 어색하다. 따뜻함이 먼저 와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미숙이 느꼈던 사랑은 사랑이 아닐 지도 모른다. 식어가는 욕망의 마지막 온기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온기를 미숙은 사랑이라고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미숙이 세속 도시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마치 성준의 친구, 성준을 기다리며 방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큰 질문 "사람들이 갖고 있는 환상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타이피스트의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세속도시에서 욕망을 분출하는 성준은 과거로 돌아가 <유리동물원> 속의 성준을 만난다.


 현실과 환상이 분리된 성준. 욕망과 사랑이 분리된 성준.

 성준은 현실과 환상이 하나가 되고, 욕망과 사랑이 하나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 두려움의 시작을 보여주는 것이 <유리동물원>이다.

 

성준에게는 아버지의 기억이 없다.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성준은 어머니와 절름발이 누이를 부양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성준은 자신을 놔주지 않는 어머니와 그냥 놔둘 수 없는 절름발이 여동생으로부터 도망 치고 싶어 한다. 성준이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선택한 것은 매일 밤 영화관에 가는 것이다.


어머니는 성준에게 의존하지만 그 의존을 표현하는 방식은 끊임없는 잔소리다. 가족의 미래와 딸의 결혼까지 성준이 책임져 주길 바란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길 바란다.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불만족을 자식들을 통해 풀고 싶어 한다. 


절름발이 딸은 세상이 자신을 절름발이로 보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이 동물원의 동물을 구경하듯이 자신을 구경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동물원의 우리처럼 우리를 만들고 타인과 만나는 것을 기피한다. 딸이 수집하고 있는 유리동물은 자신의 분신들이다. 만지면 깨질 것 같은 불안한 동물. 딸 역시 타인의 손길을 두려워하는 동물원의 동물이다.


작은 질문 "왜 성준은 환상과 현실의 일치를 거부한 걸까?"

환상이 현실이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현실이 된 환상이 있다.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어 했던 사람들

 그리고 하늘을 새처럼 나는 비행기

 그런데 정말 새처럼 날고 싶어 했던 사람들의 환상이 이루어진 걸까?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어 했던 사람들은 새처럼 나는 비행기를 타 보고 싶어 했던 걸까?


동화책에는 서로 사랑하는 공주와 왕자가 등장한다. 둘의 사랑을 방해하는 적들을 까고 공주와 왕자가 결혼에 골인하면서 동화책은 끝이 난다. (축구공도 아닌데 왜 골인하는 걸까?)  마침내 사랑을 이루고야 마는 공주와 왕자. 마치 사랑의 끝이 결혼인 것처럼 얘기한다. 공주와 왕자는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이미 사랑은 이룬 것이다. 더 이상 이룰 사랑은 없다.


환상은 환상일 때 그 가치가 있다.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사랑스러운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환상과 현실을 혼동할 때 생긴다. 성준은 이 혼동을 어머니와 누이를 통해 충분히 습득했다.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는 어머니. 그 세계 속으로 성준과 누이를 끌어 들이려는 어머니.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는 누이. 그 세계 속으로 그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누이. 이 둘은 환상 속에서 현실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자의 역할을 바꿔서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환상과 현실의 혼동에서 오는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성준은 환상과 현실을 해리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관객은 성준을 통해 해리된 환상과 현실을 본다.

 


 


극단 인 <잃어버린 시간들>


  : 송종헌 <세속도시에서의 사랑>, 
           
테네시 윌리엄스(Thomas Lanier Williams) <유리동물원>, 
           머레
이 쉬스갈(Murray Schisgal) <타이피스트>
재구성 : 박성준
  : 박성준
  : 박성준, 이미윤, 이훈경, 김송이, 동하

<작품 소개>
3개의 작품이 무대 위에서 하나의 접점을 찾는다
송종헌의 <세속도시에서의 사랑>을 모티브로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동물원>과 머레이 쉬스갈의 <타이피스트> 2개의 번역 작품과 연결시켜 무대에 올린다. 하나의 주제로 여러 극단들이 공동으로 공연하기, 또는 서로 다른 작품을 공동으로 공연하기, 그 중간쯤의 형식을 취한다.
—다중시간, 다중공간, 다중인격
 <세속도시에서의 사랑>에는 2개의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선택해 <해리>라는 제목으로 11회 공연을 했다. <해리>는 매번 새로운 배우들과 만나 변화 했고, <유리동물원>, <타이피스트>와의 접점을 찾아 작년에는 <해리유리동물원>, <타이피스트해리>로 공연되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 <잃어버린 시간들>이란 제목으로 3개의 작품이 접점을 찾아 공연했다.



인디언밥에서는 <2010 서울 연극제> ‘미래야 솟아라’(5월 17일부터 22일까지 매일 한 편씩 공연,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 참가한 총 6편의 작품 리뷰를 릴레이로 연재합니다.

‘미래야 솟아라’는 “실험, 대안, 미래적인 연극 언어”를 모색하고 “한국연극의 미래를 가늠”한다는 취지로 올해 처음 신설되었습니다. 인디언밥은 “미래 연극 개발 프로젝트”를 표방하고 있는 ‘미래야 솟아라’에 선정된 작품들을 통해 연극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기회를 나누고자 합니다.

6편의 리뷰 후에는 이번 기획에 참여한 3명의 필자들과 함께 나눈 뒷담화 수다가 공개됩니다. 리뷰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작품에 대한 뒷얘기를 비롯해 '미래야 솟아라' 기획에 대한 소감, 수상 결과에 대한 수다들이 담길 예정입니다.



■ 인디언밥의 <2010 서울연극제> '미래야 솟아라' 작품 리뷰 연재 순서

순서

단체명

작품명

공연날짜

수상

필자

1

씨어터제로

홀맨(Hall man)

5.17(월)

정진삼

2

무브먼트 당당

떠나는 사람들

5.18(화)

작품상

정진삼

3

극단 인

잃어버린 시간들

5.19(수)

연기상
(김송이)

조원석

4

극단

나비효과 24

5.20(목)

연출상
(이자순)

아데모모

5

극단 원형무대

세 마녀 이야기

5.21(금)

아데모모

6

라나앤레오

하이! 스마트월드

5.22(토)

조원석

 


글쓴이 조원석은 서울 271번 버스 승객, 진로 마켓 손님, 이 현수의 남편. 상추를 키우는 정원사. 구피 열아홉마리를 키우는 어부. 도장 자격증이 있는 페인트공. 시나리오 '벽에 기대다'를 50만원에 팔고 남들한테 자랑하는 사람. "현실"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다가 말다가 하는 게으른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나"가 있어 어떻게 소개해야 할 지 모르는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