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온앤오프 무용단'의 <붉은 시간>, 삶에 젖은 몸의 훌훌 대는 훌쩍임이란

2010. 7. 27. 22:48Review


온앤오프 무용단
<붉은 시간>


삶에 젖은 몸의 훌훌 대는 훌쩍임이란


 

 

글│ 김민관

 




강산이 변해도 의지는 푸르기에..

문래예술공장에서 열린 온앤오프 무용단의 <붉은 시간>은 ‘창단 10주년 기념 신작공연’이라는, 십 주년이라는 무게가 만만치 않아 찾아가게 됐다. 

보통 열린 춤판이 그들의 연습실이자 무대로 활용되는 ‘춤공장’에서 열렸기에 개인적으로 무대보다 평평한 마룻바닥 같은 곳을 예상했고, 여러 축하 공연 등이 벌어지는 파티와 같은 형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상상을 했다. 결과적으로 온앤오프 무용단은 온전한 공연 한 편을 무대에 올렸다.

한 무용단의 주축인 김은정과 한창호가 주인공으로 부각되지 않은 채 그들의 무용수 두 명을 포함, 뇌성마비 작가 강성국까지 모두 다섯 명이 현대인의 실존을 절절하게 울부짖는 평등한 공연을 펼쳤다. 이는 다소 의외였다. 물론 공연 후에 김밥과 막걸리 등의 음식이 소담하게 차려져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춤공장의 전경이 이어졌지만, 입 꼬리가 올라가 얼굴을 반쯤 덮는 미소의 김은정 씨, 과묵하게 입을 다물다 쑥스럽게 저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한창호 씨의 모습을 무대에서 더 가깝게 마주하지 못해 좀 아쉽기도 했다.


십 여 년의 자취를 반추하기에는 개인적 내공이 턱없이 부실하다. 그럼에도 그동안의 이미지는 한의 정서, 실존적 고독, 절절한 몸부림, 슬픈 날갯짓의 표현을 비롯하여 왜 춤을 추는지에 대한 이유가 몸의 자국으로 묻어난다 할까, 곧 온앤오프 무용단은 ‘춤을 추면서 삶을 마주한다.’, ‘춤을 추면서 슬픔을 승화한다.’ 이러한 움직임이 춤에서 읽히는 건 그들의 춤이 솔직하고 투박하며 구조적 접근이나 배열, 질서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롭게 스스로를 불사르기 때문에 가능하다.


온앤오프 무용단은 춤공장을 운영하면서 무용이라는, 예술계 안에서도 소수의 향유층만이 찾는 무용신, 그 안에서도 주류의 흐름에 멀찌감치 물러나서 인디신[각주:1]
에서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활발히 만들어오며 물레아트페스티벌이란 큰 축제를 삼년에 걸쳐 치러오기도 했다.

제안을 받아 오로지 무대가 필요한 많은 아티스트들에게 기회를 주기도 하고, 때론 친분을 기반으로 하여 친근하게 접근시키거나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 문래동 기반의 아티스트들이 문래동을 마주하고 예술을 펼쳐냈다. 이는 꽤 미디어의 가십적 관심을 끌기도 했었다. 





뜨거운 시간, 너와 난 울부짖는다!

<붉은 시간>은 그로테스크한 피가 넘쳐나는 잔혹극과 거리가 멀다. 차라리 민중미술의 걸개그림이 저항의식을 고취시킬 때인 팔십 년대의 인간 냄새가 진득하게 배어나오는 듯한 정서에 가깝다. 인간과 인간이 살을 맞대고 술을 걸쭉하게 들이켜고 하는 관계맺음은 이들 춤을 존재케 하는 단순하고도 단단한 원리에 가깝다. 


<붉은 시간>이란 것이 몇 번의 트랜스를 거치지만, 특별한 내러티브나 구조는 미약하기 그지없다. 


현대 사회를 모사하며 짜증과 허무, 고통으로 얼룩진 현대인의 내면을 반영하는 도구로서, 언어를 덧대는 상징화 전략을 취한다. 이는 무용수가 연극을 하는 형국이라 어색하지만 무엇보다 춤으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온앤오프 무용단의 방식과는 좀 거리가 있다. 친숙하게 다가가기 위해 이해를 돕기 위한 단서로서 전략적 차용이겠기에 그러려니 한다.

사실 그렇다. <붉은 시간>은 내러티브를 나름 가져가고 있는 이른바 무용연극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물론 시놉시스나 드라마투르기가 없이 안무만 존재하는 데서 오는 불가피한 전략이라고도 하겠다.


앞선 트랜스의 층위를 점프하는 대립과 병치의 ‘구조 아닌 구조’는 실존적 층위에서 ‘왜 세상이 이렇지?’, ‘난 이러고 있지?’하는 식의 자신의 무의식적 징표를 눈치 채지 못한 채 히스테리를 부리는 인간의 모습, 곧 상징계에서 그 아픔과 고통이 내재되어 마구잡이로 뒤섞이는 꿈을 꾸는 세계, 상상계로 넘어갔다, 온 몸을 떨고 몸 그 자체를 현현 시키는 실재계로 점프한다. 이러한 변화는 갑작스럽고 개연성과 단절하지만 당연한 수순이기도 하다. 


우리는 가상의 매트릭스를 벗어나 고통의 참 세계를 보아야만, 내지는 일상의 단조로운 호흡에서 축제의 광기 어린 일탈을 통해야만 다시 그 일상을 재역전시키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몸을 가늠하는 매체라는 존재, 사운드


이(일상의 재역전 내지 고통의 실재계를 나타내는 몸)와 조응하는 사운드는 싱잉 보울(singing bowl)과 이펙터(effector) 등을 연결해 독특한 사운드를 선사하는 조영민의 라이브 연주를 통해 펼쳐짐으로써 극 층위의 전환을 보다 쉬이 가져갈 수 있는 측면이 컸다.

싱잉 보울은 쉽게 말해 놋쇠로 만든, 각기 다른 크기의 그릇들로, 실제 연주에서는 그것들을 배열해 두고 이는 소리들로 멜로디나 화음을 구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릇을 치고 가를 돌리거나 하여 윙윙거리는 루프 음을 만들어 내는데, 이것이 신비롭고도 독자적인 소리들을 직조해내는 측면이 크다. 현악기나 건반악기와는 다르게 은은하고도 정갈하며 깊은 울림이 공간의 전위를 일으킨다.


싱잉 보울과 노이즈 사운드의 배합이 깊숙하게 무대를 에너지로 메우는 가운데 몸부림치는 다섯 인자는 그 에너지에 절절하게 몸을 내세운다. 살갗을 찢는 치열한 날갯짓이 처절하다. 마치 사운드가 파생하는 다양한 범위에 몸을 맞세우는 즉흥 방식들을 점층적으로 쌓아가며 이 작품을 만들었으리라는 생각이 자연 드는 지점이다.







몸의 뜨거움이 삶의 느슨함을 부르는 순간

중간 중간 모두가 단출한 군무를 몸에 체화시켜 나갈 때 마치 권법을 닦는 것 같은 광경도 눈에 뛴다. 권법과 춤은 밀접하고, 특히 우리가 경시하거나 잃어버린 춤의 넘실대는 에너지를 오롯하게 표현하는 자연스런 경로이다.

여기에 강성국의 떨리는 신체의 한정 없는 움직임에 실리는 미약한 바람과 온 몸을 싣는 찰나의 전위가 유독 눈에 들어온다. 여기
에 맞춰 모두 느리게 움직임을, 그러나 꼿꼿하게 펼쳐내는 무용수들의 움직임이 어쩌면 <붉은 미소>의 주요한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렇게 이들은 같이 추고, 누군가가 주인공이거나 주역이 아니라 상처받는 어리석은 인간의 한 전형으로서, 솔직하게 자신을 대입하고 또 표출하며 삶을 자연스레 추는 것이다.

 

‘쿨하다’란 말이 대세인 요즘 ‘뜨겁다, 뜨끈하다, 뜨듯하다’ 등의 표현이 왠지 구식이거나 철지난 것만 같은 지금에 있어 춤이 얼마만큼 구성지고 또 인간 냄새를 머금고 튀어나올 수 있는지 문래동의 매캐한 냄새 가득한 공간에서 건져 올린 춤, 곧 삶의 환경과 냄새, 이야기를 품고 튀어나온 춤의 결은 아무래도 그 자체로 독특한 데가 있다.


이를 표현하는 것에 커다란 무대 장치나 계산, 짜인 군무의 정교함 없이 표현하는, 그러나 절절하고도 치열하게 뿜어내는 에너지에 온앤오프 무용단의 춤의 에너지, 그 십년의 정신의 추와 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다만 어떤 내러티브를 만들어 육십 분 정도의 긴 한 편의 서사시 같은 짜임새를 구축하려고 한 첫 번째의 시도는 얼기설기 짜인 다소 어설픔과 무모함도 같이 자리했으리라 보인다. 아쉬움을 일단 접고, 이후 조금씩 더 다듬어 나가며 일반적인 구조와는 다르지만, 그 자체로 단단한 유기적 조응의 극이, 뺄 건 빼고 단단하게 붙잡을 건 붙잡는 식으로 더 끈끈한 극이 만들어지리라는 기대를 보내본다.

 



공연 정보

일시: 2010년 7월 16일(금)~17일(토) 금요일 오후 7:30 / 토요일 오후 5:00
장소: 문래예술공장 mullae.seoulartspace.or.kr
제작/주최 : 온앤오프 무용단cafe.naver.com/onandoffdance
주관 : 춤공장, 서울변방연극제www.mtfestival.com
후원 : 서울문화재단
출연 : 강성국, 김초슬, 김동석, 한창호, 김은정
안무 : 한창호, 김은정
음악 : 조영민
조명 : 한희수
사진 : 최성복, 박김형준, 이호진
비디오기록 : 지윤석 (제로베이스)
디자인 : 이소주
무대감독 : 홍기향
기획 : 임인자
홍보 : 물레아트페스티벌 http://miaf.co.kr


 

필자 |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예술 프리랜서 기자 및 자유기고가
문화예술 분야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 중


 

 

 

 

  1. 이 말을 대중음악이라는 상업적이고 대중적으로 특화된 장과 그것으로부터 독립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려는 장의 대비되는 구도라고 할 만큼의 무용이 대중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바 없어 실은 좀 어폐가 있다. 몰론 음악신에서 오버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의 매개와 재매개 현상의 어떤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 전거들이 많이 포착되는 편이기는 하다. 곧 인디신의 활동이 고스란히 tv의 지상파 방송, 케이블 방송을 타고 흘러나오고(가끔 오버그라운드 음악을 인디신에서 재매개하기도 한다), 이것은 인디신 역시 대중문화의 다양한 섭취 영역으로, 곧 콘텐츠로 흡수되며 문화로 소비되는 것이다. 이는 인디신을 다시 양분하고, 인디신으로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는 그룹이 지상파로 흡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tv는 진정성을 도출해내는 순수한 창구가 아니라 뭔가 신선한 자극을 자본의 힘(=시청률) 아래 흡수해내는 것이다. 사실 언더그라운드의 오버그라운드로의 매개보다는 케이블(=다양한 자극)의 tv로의 매개 현상이 tv의 콘텐츠 다양화(그 안에 인디신)에 기여했다고 보는 게 더 나을 듯하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