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거문고팩토리 - <난중다이어리 심난가>




한 음악극에 대한 18개의 단상[각주:1] -

“잔인한 세상이여, 그러나 우리에게는 음악이 있다.”


거문고팩토리 - <난중다이어리 심난가>
 


글_ 요끌라





 

[서] 연극 하나 보고 와서 리뷰를 쓰다보면 으레 찾아오는 어떤 답답함- 넓든 좁든 무대라는 공간을 왔다갔다 쥐락펴락하는 배우들을 보다가 골방에서 발 디딜만한 넓이도 못 될 노트북 모니터에 글자를 채워 넣으며 낑낑대는 모습은, 스스로 생각해도 퍽 애처롭다.

 


[1] 지금부터 거문고 팩토리와 그들의 음악, 그리고 연극 <난중 다이어리-심난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 한다. 특히 그들의 음악에 대해 꼭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는 ‘참신한 실험’이라는 말만 우려먹다 그것이 결국 뭔지 대답을 못할 것 같아서.

 


[2] 음악과 극의 만남은 사실 우리가 가장 흔히, 쉽게 경험하는 예술 양상 중 하나이면서도 -당장 TV에서 소비하는 멜로드라마를 생각해보자- 그럼에도 그 자체로 어떤 새로운 것이 있으리라 기대하게 하는 희한한 힘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3] 그들의 앨범 7번 트랙, <눈먼 소리의 악몽>을 듣는다. 전체 앨범 중 가장 비(非)거문고적으로 들리는 소리들로 가득하다. ‘첼로 거문고’라 하는, 거문고를 세로로 세워 활로 켜는 소리가 또 다른 소리에 미친 듯이 가위눌리다 서서히 지쳐간다.

 


[4] 앨범 전체에 걸쳐 이들은 한 곡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구축하기 위해서 집요하게 노력하고 있다. 사실 이런 시도는 지루해지기 쉽다. 음악은 언어적 내용에 얽매였을 때 그 풍성함을 잃고 결국 ‘모두 그 결말을 아는 이야기’로 전락하기 일쑤다.

 


[5]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앨범은 그런 우려를 말끔히 해소시킨다. 우선 이들은 거문고가 가지는 풍부한 표현력을 십분 활용한다. 거문고 자체의 소리로 구성된 <지지라리루>부터, 현을 직접 때려서 내는 영롱한 소리가 돋보이는 <별금자>까지.

 








[A] 줄거리: 심청은 인당수에 몸을 던져 아비의 눈을 뜨게 하지··못하고, 왜군에게 유린당해 심난을 낳고, 사라진다. 심난은 “내가 누구냐”는 질문을 모두에게 던지고, 결국 장님인 할아버지를 앞세워 어머니를 찾아 나선다. 그들은 서로 끝없이 엇갈린다.

 


[B] 관객들이 서로 마주보는 가운데 마련된 무대. 다시 양쪽에는 악단이 자리하고 건너편엔 배우가 등퇴장하는 벽이 놓이고. 창문을 통해 가끔 전황이 보고되기도 하고, 그 너머의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놓기도 하고.

 











[C, 6] 소리꾼과 악공들이 공간과 침묵을 메우고 사이사이에 여백을 심어 넣는 과정은 전적으로 이들이 연주하는 음악의 즉흥적 에너지에서 비롯한다. 성미산 마을극장, 그 공간은 어느덧 팔도강산이 되고 그 사이를 누비고 다니는 주인공들.

 


[D, 7] 그들은 결코 음악이 액자에 담긴 삽화가 되거나 서사의 흐름 사이에 가로놓인 걸림돌이 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장면의 전환에서 동원되는 짤막한 간주는 결코 이질적이지 않고 관객과 소리꾼의 흥과 함께 너울댄다.

 


[E] 그들이 리플렛을 통해서 이야기했다시피, 논개며, 난중일기며, 사명당이며, 허준이며··.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심난이가 엄마를 찾아 종횡무진하듯이 속사포처럼 등장하여, 흥겨운 해학의 흐름에서 저마다 얼굴을 비죽비죽 내민다. 얼쑤!

 








[F] 극이 주는 웃음만큼이나 이 극의 출발은 암울하다. 심청은 결국 인당수에 몸을 던지지 않았고 심 봉사도 눈을 뜨지 못한다. 희생을 통한 기적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 느낌. 소리꾼은 심난의 모험을 알콩달콩 ‘보여주는’ 동시에 심청의 심리를 ‘이야기한다’.

 


[G, 8] 전쟁이 꼭 아니어도, 이 세계 자체는 기본적으로 난해하고 파괴적이다. 눈을 잃은 심청은 묘사되지 않고 ‘스스로 말한다.’ 소리꾼은 발성을 바꾸어 드라마틱한 창법으로 심청이 되어 노래한다. 음악을 통해서 극 안에 또 다른 층위가 만들어진다. 심청의, 그리고 심난과 심봉사의 - 단순히 인물의 차원이 아닌, 이 두 층위의 ‘만남’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끊임없이 유예된다.

 


[H] 심난과 심봉사의 여정과 평행하게 심청이 산천을 두루 다니면서 무술을 배우고, 왜군을 척살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이 극은 심청의 “분노”를 그려낸다. 유린당한 몸. 몸에 새겨진 치욕. 그것을 지우기 위해 심청은 죽이고, 또 죽인다. 그러나 몸의 상처는 결코 다시 회복될 수 없는 것.

 








[I] 상처의 고통은 구체적이되 그 상처가 어디에서 비롯하는지를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서로 악머구리 같이 들끓으면서 또 다른 상처를 입히는 것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은, 땅끝에서 심난이 일본군을 구해주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지 않을까. 언제나 ‘왜놈의 딸’이라고 놀림을 받던 심난이 사람들에게 쫓기는 일본군에게 밥을 주고 또 구해주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J] 사물을 볼 수 있되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는 심난과 사물의 의미는 알지만 정작 그것을 볼 수 없는 심봉사가 세계 앞에서 느끼는 무력함. 이 둘의 탐색은 결국 그들이 지닌 결핍에 주목하게 한다. 심난이는 왜 엄마를 찾아 나섰을까? 심난은 모두에게 묻는다. “내가 누구요?”

 


[J] 심청이 심난의 일기를 보면서 우는 이유를 단순히 모성의 문제로 축소시키고 싶지 않다. 이 마지막은, “내가 누구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 모두가 음미해보아야 할 장면. 나에겐 공감의 눈물이었다. (극 내내 찾아다녔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하는, 서로를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와 딸 사이에 상투적인 모성이 끼어들 자리가 있는가.)

 







[K] 이 장면에서 심난의 천진한 눈에 비친 세상의 불가해함은 심청의 앞에 놓인 세계의 잔인함과 조응한다. 그리고 심청은 자신의 ‘분노’를 비로소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 허망함을. 그렇기에 마지막 장면은 씁쓸한 달관(아, 이 말은 도대체 얼마나 오염되어 버렸나!)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연극이 끝나고 ‘난중다이어리’라는 한 권의 책이 무대 한 가운데에 갈앉는다. 마치 “소리 죽은 가을 강(박재삼)”처럼.

 


[L, 9, 결] 잔인한 세상이여. 그러나 우리에겐 음악이 있다. 말로는 풀 수 없는 고통이여, 그렇다면 말을 유예하고, 걸음을 멈추고 음악의 한가운데로 들어가자. 옴짝달싹할 수 없는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워, 우리를 허락지 않는 이 공간과 시간을 휘저어놓는 음악!















2010서울프린지페스티벌 참가작
거문고팩토리 - 난중다이어리 심난가

0821-0822 성미산 마을극장 


작품의도

‘판소리’ 에 대한 장르를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한국의 관객들과 외국인 관찰자를 은밀하게 동일선상에 두어, 무의식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효과를 꾀하고자 하는 것이다. 즉, 난중 다이어리는 ‘판소리’ 장르에 대한 역발상을 통해 동시대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난중일기와 심청전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야기를 현대의 관객들이 굳이 판소리로 들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의 스펙타클과 인간적인 영웅담을 넘어서고자 한다. 다른 관점과 형식에서 접근한 '심난'의 이야기는 타자의 관찰과 우리의 소리가 결합된 ‘난중 다이어리’가 되어, 비단 몰입뿐만이 아니라, 거리두기와 놀이로써의 공연으로 탈바꿈된다. 이는 결국 새로움과 실험에 주목하고자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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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요클라 (트위터 ID @yocla14)

자기 소개하는 순간이 가장 난감하고 힘든 사람. 활자중독증. 언제부턴가 근원을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떨며 글쓰기를 시작. 노트 속에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공화국이 하나, 아무도 죽지 못하는 희곡이 두 편,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세 개의 음표, 그리고. 영원히 끝나지 않고 채워져 나가는 ‘잠언’들. 관심 있는 이들은 부디 구원해 주시길. (무엇을?)



  1. 단상은 “한 권의 온전한 책을 엮을 줄 모르는 작가들을 위한 천우신조의 자산”이라고 이탈리아의 작가 피티그릴리(Pitigrilli)는 말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