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린지에서 "이름 부르기" - 용산, 그리고 <타인의 고통>

2010. 10. 4. 11:35Review



프린지에서 “이름 부르기” -

용산, 그리고 <타인의 고통>

 


글_요끌로딘

 



#1

                         한 노작가가 특정치킨회사의 이름을 넣은 트윗을 올리면 그 회사로부터 돈을 받아 장학금으로 적립한다고. '이름'을 말하는 행위에 일정한 값이 매겨지고 숨가쁘게 재생산되며 그러면서도 그 매커니즘은 말끔하게 표백되는 일련의 과정이 나에겐 다만 혼란스럽다.

                         정신없이 팽창했다 쭈그러들고,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탈바꿈하는 서울이라는 도시. 그리고 그 주변(fringe), 도시에서 밀려난 이들이 서울을 굽어본다. 프린지는 공식(公式)의 지위를 얻지 못한 - 심지어는 언제 어느 때라도 삭제되어 버릴 지도 모를 모든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장이다.


                        
그 이름 부르는 행위는 그 자체로 몹시 처연하다. 우리는 어느 장소에 모여 앉아서 그 과정을 시간을 함께 나누며 동참한다. 두려워하며 힘겨워하며 그것을 밖에까지 가지고 나올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아무런 문제없이 내 안에서 소화되고 혼효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너무도 부담스럽게 목에 탁 막히기도 한다.

 

                         이 글은, 그 한없이 부담스러운 어느 이름 부르기에 관한 것이다.

 









#2

                         이 극은 미래의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을 배경으로 한다. ‘미래’ 속에서 현재의 기억이 된 과거를 불러내는 것. 그리고 그것의 이름은 용산이다. 그렇지만 ‘이름을 불러야 한다’라는 도덕적인 명령이 어딘가에 부딪쳐서 메아리도 되지 못하고 그저 표표히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음을 고백한다.

 

주제의식에 비해 너무 장황했고,

인디언 부족(!)의 영웅과 용산참사 희생자의 아들(!)을 유비관계로 놓는 등 영웅-민족-가부장중심주의.

'잊지말자'는 메시지로 이 모든걸 변명하기에는 무리.

 







인디언의 삶과 용산철거민의 삶을 평행선상에 놓음으로서 얻으려한

미학적&윤리적 효과가 무엇이었는지를 이야기해 보아야할 듯하다. <타인의 고통>이

한국 사회에 내리는 진단은 매우 절망적이다. 인디언과 용산 철거민들을

나란히 세워놓고 스카이팰리스 아파트를 떠돌게 하는 것은

경제적 조건이 인종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탈출할 수 없는 '존재의 양태'가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선 이러한 발견과 진단이 너무도 새로운 것이라면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이 연극의 공명은 시작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은 인디언이 고급 아파트에 사는 이들을

'스카이팰리스 부족'

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의 특성을 마치 들판의 짐승들의 그것처럼 묘사할 때

공허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 웃음 앞에서 스스로 낯설어졌다.

이것은 경제적 계급이 모두의 몸에 일종의 유전자(붉은 피부)로 자리잡아 버린데다,

사회 자체가 경제적 계급을 뒷 세대에게 조직적으로 재생산하는

기계가 되어버렸다는 선언이다.

 

(물론 남의 느낌까지 독점할 수 없다는 비판도 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공연에 있어 가장 중요한 핵심인 ‘함께 봄’이라는 의미에서,

그 웃음 앞에 어쩐지 낯설어져버리는 스스로를 꼭 고백하고 싶었을 따름.)

 

지나치게 힘이 들어간 연기, 과잉 감정에의 강요,

진지한 접근을 넘어선 엄숙함에 대한 강박을 집약적으로 보여준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극중에서 간간히 보였던 몇몇 흥미로운 시도와 적절한 상징의 사용 등을

뒤로 하고 눈을 꼭 감고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같은 느낌. 사실 전형적인 인물들에 의지한다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아마도 이 ‘이름부르기’의 핵심이 되었을 법한

용산 아파트 꼭대기에서 술을 마시는 장면은 속상할 만큼 상투적이었고

아기 소원이가 죽은 것을 '업보'로 돌리는 부분에서는,

단순히 민중들의 소박한 울분과 인간적 연민의 표현으로 이해하고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용산 철거민들은 무슨 업보가 있어서 그런 죽음을 당했단 말인가? 소원이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의 답으론 참 석연치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무릎을 꿇은 인디언의 뒤로 지나가는

용산 참사의 슬라이드 화면은 결코 나를 몰입시키지 못했다.





 

도원의 야뇨를 사이렌과 함께

참사의 불 이미지와 결부한 부분은 아주 매력적.

 

‘인디언과 희생자의 영혼이 용산의 아파트를 찾아온다’라고 하는,

이 가정형의 이야기가 완벽하게 희화화되지 않은 것은 바로 이 장면 때문이었다.

밤에 오줌을 싼다는 행위.

뿌리 깊은 수치심과 죄책감의 행위.

그리고 ‘불.’ 사이렌 소리.

계속해서 형사의 질문에 ‘꿈’과 ‘현실’ 중 어디인지를 혼란스러워하는 도원.

야뇨는 그 ‘저 편의 기억’과 고통이 현실에 남겨놓은 흔적과도 같다.

추상적인 팔자와 업보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그 고통들이 증발해버리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

 





#3

                         이것이야말로 이 연극 전체를 통해서 거의 유일하게 다가온 “이름 부르기”였다. 타인의 몸에 새겨진 고통은 결코 공유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그저 한 곳에 머물러있지도 않으며, 그 누군가는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한다.


                        
그 말은, 흐느끼거나 외치거나 손가락질하거나 발을 구르거나 할 필요 없이, 한 번의 사이렌소리와 정적 사이에서 들려왔다. 마치 너의 고통이 나의 고통으로 넘어오는 그 짤막한 순간의 아찔함처럼.

 



극단 드림플레이 - 타인의 고통
2010 서울프린지 페스티벌 참가작
0819-0821 산울림소극장

2010년의 대한민국, 우린 과연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고용의 불안정, 사회안전망의 붕괴, 빈곤의 확대로 인한
‘워킹 푸어(working poor)’들이 길거리에 넘쳐난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이고,
고통 없는 세상에 대한 기대는 환멸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의 삶은 뿌리째 흔들리고 있는 형국이다.
공동체의 붕괴의 순간이 온 것인가?
우리 인생에 더 이상 “타인의 자리”는 없는가?
타인의 고통은 나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위험요소’일 뿐인가?

파란만장했던 2009년의 시작을 알리는 죽음의 행렬 맨 앞에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자들”의 죽음이 있었다. 2009년 1월 20일 용산동 4가 남일당 건물에서 평범한 사람들이 살기 위해 망루에 올랐다. 그리고 그들은 불길 속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들은 원주민이었다. 대한민국 용산동 4가의 원주민. 그 원주민들은 “불타는 몸”이 되어 영원히 현실세계에서 사라졌다. 과연 누가 그들을 내쫓은 걸까?

창작극 <타인의 고통>은 지금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20년 뒤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 불타던 남일당 건물은 20년 뒤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 자리를 지키려던 철거민들, 그리고 그들을 내쫓고만 경찰들과 용역들, 그리고 대한민국을 분할해서 소유하고 있는 그 땅덩어리의 주인들. 타인의 고통 앞에서 무기력했던 우리 모두는 20년 뒤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우린 여기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원주민 한 사람을 불러본다. 미국의 기병대에 최후까지 맞서 ‘성난 말(Crazy Horse)’라고 불리었던 인디언 수우족의 영웅 “타슈카 위트코.” 아직도 눈을 부릅뜨고, 침략자 백인들을 응시하고 있는 그 거대한 돌산 조각상의 얼굴을 기억하는가? 그가 깨어나 21세기 ‘대한민국 원주민’들을 들여다본다. 그는 아메리칸 대륙을 잃고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쫓겨 나가 격리되어 살고 있는 인디언들의 운명이, 21세기 대한민국 서울에서 ‘뉴타운의 꿈’에 희생되어 토건개발주의자들에게 쫓겨난 ‘대한민국 원주민’들의 운명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과연, “성난 말(Crazy Horse)은 우리를 어떤 눈으로 바라볼까? 그가 우리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그 말에 귀 기울여보자.


극단 드림플레이는?
한 편의 꿈처럼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잊기 쉬운 인생의 신비를 독창적인 무대 언어로 풀어보려는 팀. 대안적인 무대공연을 지향하는 퍼포머들의 정체성을 확보해 나가면서 인디 씬을 개척해 나가는데 힘쓰고 있다.






필자소개

8월의 어느 더운 날, 함께 서울의 fringe를 헤집고 다녔던 사람들. 요끌라+끌로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