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말한마디 없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창작집단 '거기가면'의 <반호프>

2010. 10. 15. 14:53Review


말한마디 없이 사랑을 이야기하는
창작집단 '거기가면'의 <반호프>


글_해태 조형석





올 가을은 유난히 푸근하다. 하늘도 유난히 높고, 그 힘겨웠던 태풍과 폭우도 이겨내서 그런지 몰라도 바람에 담겨져 있는 공기의 냄새는 무르익을대로 익었다. 어느 해와 다르게 가을답다고 할까. 산과 들은 짙었던 푸른 옷을 벗고 황금빛으로 물들어 간다. 그 속을 꽉 채운 곡식은 완연히 고개를 숙였고 그로써 봄부터 참아왔던 열매를 조심스레 펼쳐보인다. 공연예술도 이와 같아라. 대학로에서는 지금 연극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황금빛으로 물들어가는 대학로에 처음으로 결실을 맺은 연극들이 있으니 바로 올해로 5회를 맞는 연극올림픽이다. 연극올림픽. 조금 생소할지도 모르겠다. 필자도 우연히 접하고선 어!? 이런 게 있었어!? 라고 말했으니까. 1995년부터 시작된 범국제적 행사인데 선정기준에 있어서 무척 까다로운지 몰라도 작품선정이 무척 괜찮다. 더욱이 이번 2010서울연극올림픽의 주제는 '사랑' 

 


사랑만큼 추상적인 표현도 없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구체적이다. 어찌보면 인류가 여기까지 온 것도 다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물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단순화하기에는 그릇된다 생각되지만 동시에 종교에서 학문에 이르기까지 사랑이 우리 삶에 닿지 않은 부분은 없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나누고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게 인생이 아니겠는가.
이런 사랑에도 많은 종류가 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에서는 아가페(agape), 에로스(eros), 필레오(philia), 스톨게(storge)등으로 사랑을 분류하였고 그 이후로도 Jhon lee나 Stenberg, Hendrick여러 학자들에 의해서 사랑은 더 많은 종류로 나뉘어 통용되었다. 거슬러 올라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 비쳐보았을 때, 그리스 연극이 비극과 희극으로 나뉜다면 사랑이란 소재는 이 둘 모두에게 통용되는 합집합적 요소임에는 틀림없다.

 


그래 그렇다면 나누고 받고 주고 하는 그 사랑을. 도대체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까. 말로? 몸짓으로? 눈빛으로? 아님 말하지 않아도 알려나? 사실 이 모든 것을 표현하고도 벅찬 것이 사람의 감정표현이다. 전달자들의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가끔은 잘못전달이 되니. 그래서 연애하는 이들은 그 순간순간에도 감정표현에 애태운다. 뭐 굳이 더 논하지 않아도 이 글을 읽고 있을 당신은 충분히 공감하리라 믿는다. 더구나 사랑을 하고 있는 당신은 더 더욱이.

 


이렇게 모든 걸 표현하여도 사랑에 있어서도 끙끙되면서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데, 이를 말 한번 없이 관객에게 전달하는 이들이 있다면 살짝 관심이 가지 않겠는가. 바로 nonverbal mask theatre <반호프>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 했던 소녀가 매일 아버지와 헤어진 기차역에서 아버지를 기다리며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무대 위에서 재현하였다. 

연극 제목답게[Bahnhof(독): 기차역] 기차역에서 일어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따뜻하게 풀어낸 작품이라는 게 대부분의 평이다. 소녀와 소매치기 소년의 사랑이야기가 주된 플롯인데, 이들의 사랑을 위협하는 소매치기 남과 이를 쫓는 형사, 그리고 매표소 아가씨와 자판대총각의 사랑이야기, 노부부의 사랑이야기, 다방아가씨와 중국집배달원의 사랑이야기등과 그 이외에도 일회성 인물들의 등장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 자칫 지루할 뻔한 극의 재미를 충분히 살렸다.

 



사실 nonverbal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은 대사의 전달이 없기에 심히 과장된 몸짓과 억지스러운 동선으로 이를 대신하였다. 하지만<반호프>는 여기에 몇 가지를 더 추가하였다. 첫 번째는 바로 관객과의 끊임없는 소통이고 두 번째는 춤과 음악이다. 

극의 처음 시작할 때부터 마이크를 관객에서 넘기면서 시작한다. 관객의 입을 통해 의사전달을 하고 그 순간에서 자칫 긴장될 극장의 분위기를 한껏 편하게 한다. 또한 극 중간 중간에서는 소매치기를 쫒는 형사가 관객에게 도둑의 행로를 묻는 모습, 청소부 아줌마가 압축기에 묻은 종이를 무심하듯 관객에게 던지는 모습, 장미꽃을 든 남자가 관객에게 구애하는 모습 등은 웃음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더하여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은 이상해 보일지도 모르나 관객의 환호를 이끌어 낸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사실 <반호프>는 그나마 조금 나은 그저 그런 nonverbal 연극일 뿐이다. 

<반호프>가 주목받을 만한 작품 이였던 이유는 바로 세 번째, 가면을 이용한 오브제이다. 단 4명의 배우가 38개의 마스크를 통해 제각기 다른 인물로 태어나는 놀라운 무대, 그리고 가볍지만 뛰어난 인물해석능력은 극의 부담감을 덜어주는 동시에 극의 휴머니즘과 드라마틱함을 더욱 살려냈고, 보는 이에게 전에 없는 신선함 마저 안겨주었다. 비록 커다란 코와 광대, 괴기스러운 눈동자와 각진 얼굴형체를 가진 마스크가 기이할 지라도 마스크가 언어이상의 표현을 담아낸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에 다양한 마스크들의 등장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고 4명밖에 안 되는 배우들의 뛰어난 인물해석능력과 섬세한 몸짓은 변화 없는 마스크에게 표정변화를 담아주기도 하였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극 전개는 전혀 복잡하지 않다.
다만 아쉬운 점은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뻔한 스토리였다는 거. 극의 후반으로 갈수록 영화 러브엑츄얼리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꼭 러브엑츄얼리가 아니더라도 그 흔한 사랑이야기들을 짜깁기 했다고 느껴진다. 마스크를 이용한 오브제가 있었기에 신선함으로 시선을 끌어 지루하지 않았을 뿐. 신선한 재료로 만들어 맛있게 먹고 나니 왠지 어제도 먹었던 밥맛이라고 하면 적당한 표현일까. 극중 있었던 암전실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 갈 수 있었지만 줄거리에 대한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2010년 서울 연극올림픽의 주제 '사랑'에 걸맞게 딸에 대한 아버지의 애틋함과 사랑, 소녀와 대한 소매치기 소년의 소설 「소나기」와 같은 풋사랑, 매표소아가씨와 자판대총각의 웃지 못할 과격한 사랑, 노부부의 웃음을 자아내는 사랑, 꽃을 든 느끼남의 껄떡되는 구애와 도망간 애완견을 사랑하는 여자. 그리고 이를 위협하는 여러 인물들의 애환이 녹여져 있는 연극 <반호프>.

 


열정적이고 격렬한 사랑이 녹여져 있는 이야기 보다 은은한 우리들 살아가는 세상의 휴먼러브스토리가 보고 싶다면, 한국 최초의 nonverbal mask theatre를 보고 싶다면, 그리고 내 옆에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올 가을 이 연극 괜찮을 듯하다.

 

 




2010 서울연극 올림픽
2010 0924-1107

창작집단 거기가면_반호프
1007-1010 대학로예술극장 3관

창작집단 거기가면의 넌버벌 마스크연극 <반호프>는 기존의 넌버벌 공연이 음악과 움직임 위주의 공연이었던것에 반해 '마스크'라는 오브제를 이용하여 인물들 간의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반호프>에 출연하는 4명의 배우는 28여명의 배역을 소화한다. 1년간의 제작기간을 거쳐 28개의 마스크가 공연을 위해 제작되었고 4명의 배우들은 28개의 마스크를 통해 여러가지 인간군상을 무대 위에 연출한다. <반호프>는 기차역을 오고가는 우리 주변의 인물들을 소박하게 그리고 있다. 평범한 일상의 그들에게도 사연이 있고, 사랑도 있다. 대사가 없는 연극이지만, 배우들의 움직임과 마스크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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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소개

해태 조형석.
잘하는 건 없고 부족함만 가득한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아! 잘하는 거 하나 있네요. 신도림역에서 1등하는 거. 출입문이 열리자마자 튀어나가는 필자는 스스로 뿌듯해 합니다. 아싸! 오늘도 1등! 뭐 맨날은 아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