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Festival場 - The Wall :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의 기술적 전유와 시현의 측면에서의 실험




Festival場 - The Wall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의 기술적 전유와 시현의 측면에서의 실험


글_김민관
 




Ver 1. Remixed Convention

 

카탁(Kathak)이란 춤은 명확한 인지의 차원을 제공하지 않는다. 카탁의 본질이 이것이라고 전해지기에 앞서 카탁이라는 전통적 춤이라 명명되어지는 하나의 언어적 정의에 소급되어 신비한 분위기로 비치는 가운데 그 아우라의 형체는 무색하게 빛을 잃고 그 형체의 탐구는 시간의 역전 현상 속에 미끄러진다.


넓은 스크린, 곧 무대 전면을 덮는 그 스펙터클의 자취 이후 등장한 몸의 부분 부분을 떨고 흔드는 카탁 무용수 오인욱은 미약하게 자신의 몸을 드러내며 소통의 춤을 구가한다. 더딘 시간의 차원을 누적시키고 미디어는 이를 흡수한다. 그는 하나의 재료 차원으로 쓰이지만 그의 춤은 이에 대한 의식 없이 꿋꿋하다.


 




무대 뒤쪽을 채운 스크린 밑에 앉은 여러 명의 노트북 군단은 강력한 미디어로서 노트북 앞에 앉아서 표현에 있어 신체의 확장적 전이를 자유롭게 구가한다. 반면 노트북은 신체를 그 앞에 확정시키고 다양한 이미지와 사운드는 신체 표현에 결부된 것이 아닌 단순하고 단속적인 움직임으로 일관되어 나타날 뿐이다.


이들은 노트북 스크린과의 일관된 대화쯤으로 카탁 무용수와의 정확히 관객의 시선을 향한 바(실은 그것은 미끄러지지만)와는 전혀 다른 식으로 그들의 시선을 채운 스크린처럼 우리의 신체를 잠식하는 이미지들을 쏟아낸다. 이들은 보이든 보이지 않든 공연 내내 자리하고 있다.


카탁 무용수는 의식을 치르는 듯한 엄밀한 궤적을 남기고 그 흥이 차오르는 절정의 순간을 어느덧 예고 없이 지정하며 관객의 박수를 유도한다. 그의 움직임은 뒤 스크린에 재매개되는데, 그는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마치 기술과 과학의 시대 이전의 전근대적 인간의 표상으로 일임된다.


그의 움직임을 순간적으로 기록해서 저장된 컴퓨터에 단기기억의 단위로서 빠르게 그것을 재생시켜 실제적 시간의 단위를 수정함으로써 리듬을 만들어 낸다. 또는 움직임의 잔상을 만들어내 움직임의 단위를 만든다. 춤은 일종의 단순한 인풋과 변형된 아웃풋의 생성들로 인한, 그리고 스크린을 채색하는 회화적 성취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고, 이에 카탁 무용수는 원재료를 제공하는 하나의 사라지는 원본의 초상으로 자리하게 된다.

그가 중앙에 물이 담긴 판에 올라 춤을 추는 것이 어떠한 인터랙션 스크린의 디자인을 이루는지는 알기 어렵다. 그 물소리가 특별히 인풋으로 재매개되어 아웃풋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페라의 아리아 역시 미디어에 잠식된다. 마치 전통적 미디어와의 극명한 대비를 가져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일까? 곧 신체로서 단순한 미디어를 재편된 미디어의 세계에 가져다 놓기 위한 전략적 차용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아리아는 끝없이 펼쳐지지 않는다. 발산의 어느 한 극점은 프랙털 이미지의 심연으로 치환된다.

 

이는 디지털 미디어의 유연한 재매개일까? 어느 것에도 환원되지 않고 발산되지 않는 아련한 자취만을 남기는 것일까?

새로운 이미지의 표상일까? 표상되지 않는 이미지의 무한한 미끄러짐일까?

단지 기계를 작동하는 이의 재매개의 시선에 대입되는 것일까? 어느 한 지점에 몰입하여 둘의 융합적 지점이든 어떤 지점이건 간에 기존 미디어의 몰입 감각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일까?

 







박호빈은 작은 상을 하나 놓고 제의식을 치르듯 자신 앞에 유형의 누군가를 상정하고 술잔을 올리는 등의 동작을 반복한다. 무대를 가르는 프로젝터로 투사된 조명이 무대와 관객석을 180도경 회전하며 부채꼴의 모형으로 좌우를 훑고 지나간다. 이는 일시적으로 부채꼴의 면적이 사라지며 관객의 시선에 기계의 눈이 직접적으로 마주하며 시선을 파고들어 눈을 감게 만드는 의식을 시행한다.


이 경계는 빛이지만 분명한 면적과 두께를 가진다. 박호빈은 이를 이승과 저승의 경계로 상정하여 그것을 통과하며 영혼을 위무하고 슬픔을 체현한다. 그러나 그의 신체로 우리는 우리의 의식 모두를 기울일 수 없는데, 그것이 훑고 지나가는 가운데 이승의 경계에 접속하는 직접적 체험으로 이어지는 어느 한 순간에 형태나 움직임에 대한 의식 역시 사라지는 역설적 과정의 구현에서, 오히려 더디 분배되는 박호빈의 안무는 그 천천히 가는 속도의 조명에 신체는 맞추어 미약해지고 삶과 죽음의 어느 한 경계에서 통과 의례적 자아로서 불명확함은 주체를 명시적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프로그래밍된 프로젝터에 거스를 수 없는 역설을 보여주는 지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미디어를 입고 태어나는 내지는 미디어에 적응하는 공연의 첫 번째 주체적 입장에서 드러난 그는 여전히 미디어가 주체로 드러나며 그 안에서 대상으로 신체를 매개하는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곧 중요한 것은 일차적 미디어 내지는 아날로그 미디어는 디지털 미디어의 매개를 겪는 와중에서 정보량을 최소화하며 표피화되고 단순화된다는 것이다. 곧 맥락은 전자에 있어 예술가의 자율적 작품의 구상에서 작품이 출현하는 것에서 많이 벗어나 임시적으로 구성되는 과정으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라 뮤지카」, 이 연극은 곧 하나의 시도 차원에서 하나의 극으로 삽입된 것이기에 환영을 구축하는 원만한 과정의 단계를 가져갈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뒤에 나오는 이들을 재매개하는 회화 이미지에 가깝다. 이는 이차원의 회화에 일부 이미지가 삼차원의 영상으로 나타나는데, 충동적인 총격 사건의 두 남녀 사이의 관계에서 남자는 자신의 판단의 시점에 소급되어 자신이 한 말을 반복하고 여자는 죽기 전의 관계로 현전되어 끝없는 관계를 반복 지속한다. 사실상 하나의 프레임을 만드는 그림과 무대는 그 그림을 보고도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의 남자 배우의 모습에서 이러한 융합적 차원의 시도가 실질적인 융합을 만들지 못함으로써 실재에 대한 혼선을 일으킨다.

 



이미지는 첫 번째 이미지로 소급되어 체험과 뒤섞인 사유 차원에서의 사건적 환영을 암시하며 끝을 맺는다. 이러한 연극 투의 낯섦과 갑작스러운 사건의 제시는 삽입되어 무대에 녹아나지 않는다.










 

Ver 2. Blended Eyes 2 
 

피아노와 해금 두 남녀의 첫 만남은 타자와의 조우, 서양과 동양 (악기)의 만남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등의 문학적 텍스트의 차용과 함께 피아노는 청명한 울림에서 온 몸을 떨어뜨리며 건반을 뭉개며 출현하는 절망으로 내재화되며 출현한다. 해금은 그 안에 더디게 조응하며 중간 중간에 삽입된다. 피아노의 좌측 건반과 우측 건반의 활용은 두 목소리로 공간을 채운다. 가령 좌측은 공간에 정박된다면 우측은 싱그럽게 뛰어노는 식이다.


피아노에 해금이 가녀린 듯 살짝 얹는 데서 후차적으로 따라온다면 둘의 뒤섞임은 어느새 해금이 앞세운 공간에 피아노가 격렬히 따르는 순서의 뒤바꿈으로, 그리고 해금이 좌측 공간을 점유하고 피아노가 우측 공간을 점유하는 놀라운 공간의 뒤섞임을 경험하게 된다.





 

디지털 미디어의 힘은 비교적 미약하다. 이는 프로젝터로 바닥에 단속적인 텍스트로 투영되는 게 주다. 그럼에도 시적 언어와 내면적 심경의 토로 실제 가 발화하는 그리고 음악적 발화는 복잡 미묘한 심경 낭만주의의 극점으로서 명확한 상을 표상하기보다 제멋대로의 과잉적 여운을 갖고 알 수 없는 심연을 직접적으로 맞닿게 하지 않는다.

 


인터액티브한 연주를 보여주는 침은의 작업은 랩톱이 주요한 미디어로 차용된다. 관객석부터 내려온 이들은 가까이서 미디어의 물결을 체현시키고자 하지만 랩톱이 만드는 영상과 사운드, 색소폰을 불며 그것을 일정 단위로 입력하여 변형시키는 과정 등 컴퓨터에 의한 재매개 현상의 기술적 실현 가능성과 구현된 바의 일정 부분을 단절된 맥락 하에 보여준다.






 

곧 인터액티브는 신체가 기계로 전이된 어느 경계를 넘는 지점에서 자연스레 신체에서 옮아가는 대신 단지 이러한 가능성이 실현될 수 있는 바 그 길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지라도 설사 실상 그 결과물은 초라한 편이다. 곧 기계가 완전히 신체와 결부되어 의식을 원활히 치환시키거나 미디어 자체의 결을 갖고 새로운 표현물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어느 지점에서 기술 그 자체를 드러내는 데 이 작품은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는 인터액티브 예술의 방향설정에 대한 조심스러운 진단에 대한 한 선례를 명확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곧 이 기술이 지금 이 아날로그 미디어를 재료로 취해 이렇게 즉각적으로 변용하여 나타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까지가 인터액티브로, 실상 그 결과는 내세울 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Dj Psytonic, Galaxy Express의 합동 연주는 더 월의 리믹스 디제잉을 시작으로 방방 뛰는 울림의 공간적 선취와 기타의 실재적 마찰과 순간적인 조응과 이끎으로 반복되며 스크린 이미지는 후차적 배경으로 무의식적 유희의 분출의 기조를 이어간다. 이러한 환상적 연출에도 무대라는 규약을 벗어날 수 없이 하나의 전시적 차원에서 여전히 이 공연 역시 삽입되어진다.

 

곧 몇 개의 공연들은 실험적 차원에서 신체 미디어와 디지털 미디어와의 만남 또는 순수 예술 장르와 기계 장치의 현전의 조우 등을 거쳐 미디어와 미디어의 비교적 동등한 입장에서 발산하며 충돌과 조응의 실험을 할 때 그 묘를 어느 정도 획득할 수 있음의 가능성을 보인다. 시도 차원으로 삽입된 이 작품들은 작품의 진정성을 말하기 전에 그 표피적 분출과 치환 매개의 여러 가능성에 주목한바, 그것의 새로움에 도취되기 힘든 만남과 충돌 인위적 환영의 직조로 대변되는 어설픈 표피로 다음을 불안정하게 기약하게 되는 것이다.







Festival場 - The Wall
2010 0916-0918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대한민국 대표 VJ/미디어 아티스트들이 모인, Nebular Factory 가 최첨단 기술과 퍼포먼스를 결합한 공연을 선보인다. <Remixed Conventions>는 국악과 인도전통무, 오페라, 추상미술, 연극, 현대무용이 미디어아트와 만나는 지점의 다양한 형태를 실험적으로 무대에 펼치고, <Blended Eyes 2>는 디지털 미디어를 기반으로 본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VJ와 사운드아티스트들이 펼치는 jam Concert가 열린다.





필자 | 김민관
mikwa@naver.com
공연예술 프리랜서 기자 및 자유기고가
문화예술 분야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