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5. 14:55ㆍReview
"출구는 없다"
극단 작은신화 28th 공연
최원종 작, 신동인 연출「두더지의 태양」
글_ 정진삼
1.
칼이어야 한다. 상대에게 내가 당한만큼의 고통을 주기위해서는. 왕따와 몰매와 주먹다짐에 시달린 중학생이 쉽게 더할 수 있는 힘. 칼로 급우를 찔렀다는 엽기적인 사연이 소설과 영화가 아닌 연극 무대에 올랐다. 극단 작은 신화의 스물 여덟 번째 레퍼토리 <두더지의 태양>은 무대에 피를 낭자하게 흩뿌리는 그간의(?) 방식 대신 번뜩이는 칼날의 날카로움을 보여준다. 희생자의 윤리 보다는 폭력 주체의 불가피성에 초점을 맞췄다. 2009년 신작희곡 페스티벌 선정작인 이 작품은 현 한국사회의 고등학생 이야기를 다룬다. 학원물이라, 산뜻하고 발랄한 면을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무대 위 실상은 암울하고 전혀 유쾌하지 않다. 프로그램에서 “하드코어 코메디” 를 표방했다고 하지만, 코메디보다는 하드코어가 훨씬 세다. 폭력과 욕설, 비아냥과 조롱이 난무하는 이 극은 우리 사회를 미화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고, 문제적 현상을 그대로 무대화 하고 있다. 한마디로 불편하다. 무대에 만연한 폭력의 실상은 관객을 괴롭게 만든다. 교내에서 벌어지는 집단 따돌림, 원조교제, 패거리 문화, 은둔형 외톨이, 온라인 폐인, 학업지상주의 등등 교육문제의 종합선물세트처럼 펼쳐진다. 인터넷, TV, 영화 등의 매체를 통해 접했던 문제적 실상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이러한 자극적 ‘흥미’ 는 관객을 충격과 사유의 미로 속으로 더욱 빠져들게 한다.
폭력을 고발하는 이 작품은 폭력의 ‘재현’ 을 통해 문제의식을 환기시키면서, 한편으로 이를 청소년의 ‘성장’ 과 연관시키고 있다. 성장 드라마는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감정이입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서 ‘성장’ 자체를 아픔과 고민을 동반하는 성숙 과정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때, 이 연극은 뭔가 어긋난 지점을 지향하고 있다. 외톬이 주인공이 살인을 하고 나니 세상이 달라져 보였고, 뭔지 모르게 앞으로 나아간 듯한 느낌을 깨달음처럼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성장’ 이고 ‘진보’ 일까? 과연 발전을 위한 성장통이 맞는 것인가?
2.
뒤엉킨 원한과 폭력의 사슬 관계는 다음과 같다. 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세진은 인호 패거리에게 돈을 뜯기거나, 얻어 맞거나, 굴욕을 당한다. 전교 1등인 슬기는 학교에서 인호에게 원조교제를 강요당한다. 담임은 그러한 슬기를 임신시켰고, 낙태를 위해 산부인과에 같이 간다. 일식집 운영으로 바쁜 중에도 자식이 걱정되어 찾아온 세진의 어머니는 자꾸만 물질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인터넷을 통해 세진과 마음을 나누고 있는 민석은 몇 년째 은둔형 외톨이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기이한 삶을 취재차 찾아온 PD는 알고 보니 학창시절 그를 괴롭혔던 ‘인호’ 같은 존재다. 조금은 맥을 잡기 쉽지 않은 인물 관계를 지니고 있지만, 인물간의 뚜렷한 가해 - 피해 구도가 있고, 매 장마다 친절하게 자막으로 공간을 제시하는 등, 내용을 파악하기엔 무리가 없다.
이러한 먹이 사슬은 세진이 그를 괴롭히러 찾아온 인호를 칼로 찔러 죽이면서 일방향에서 쌍방향으로 변한다. 세진은 인호가 사라진 뒤 그들 패거리에게 쉽게 굴복하지 않으며, 민석은 그를 괴롭혔던 PD에게 악을 쓰며 대든다. 슬기 역시 그를 옭아매던 담임을 뿌리치려 애를 쓴다. 일견,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듯 사회의 약자들이 강자들에게 대항하는 모양새다. 소(小)영웅적 행위의 캐릭터들의 반란을 연상할 수도 있겠으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관객으로서도 어떠한 통쾌함이나, 사라진 적(敵)에 대한 안도감,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느낌이 전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또 다른 비윤리적 면면이 펼쳐진다. 칼을 든 괴물이 된 세진, 짱이 사라진 학교에서 1인자를 자임하며 세진과 슬기를 괴롭히는 백곰, 설치는 그를 좌시하지 않고 조직적 폭력을 행사하는 인호 일당들, 중재자 대신 방관자를 자임하는 담임 등이 그러하다.
작품에서는 폭력 혹은 살인의 원인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강자는 약자를 구속하고, 약자는 강자가 되기 위해 칼을 든다. 더해지는 폭력의 연쇄적 고리. 원인이 편재되어 해결할 수도, 해결하기도 어려운 무방비의 폭력 상태. 문제 해결의 당사자인 담임의 말은 이 사안이 ‘회피’ 말고는 ‘답 없는’ 문제임을 여실히 반증한다. 학교를 찾아온 세진의 어머니에게 전학을 종용하던 담임은, 사정하던 그녀에게 성을 내며 답한다. “아예 청와대에 가서 말하세요. 그러면 교육청에서 조사에 들어갑니다. 그럼 교장한테 연락이 갈 거고, 교장은 담임인 저에게 조사하라고 시켜요. 결국 제가 하는 겁니다.”
이쯤 되면 성장드라마에서 그 ‘성장’ 이라는 말은, 영화 제목처럼 “공공의 적”이 판을 치고, “부당거래” 가 빈번한 그 살육과 경쟁의 장 가운데 부당한 폭력에 길들여지고, 비윤리적 ‘타협’에 적응하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인호를 토막살해해서 유기하던 세진과 민석, 현규 일당은 또 다른 대상을 찾아, 피해자의 정당함으로 위장한 가해자의 ‘칼날’ 을 들이댄다. 그 와중에 왕따는 연대를 하게 되고, 히키코모리는 은둔을 포기하며, 찌질이는 용기를 내는 아이러니컬한 사태가 벌어진다. 엽기적인 살인 행각이 성장 모험담의 외피를 입게 되는 셈이다. 담임 살해를 실패하고 그의 발밑에서 ‘귀찮아서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고 오열하는 세진과, ‘너희 쓰레기들 때문에 자기 인생이 망가졌다’ 며 세진을 밟는 담임의 절규하는 모습에선, 가해자와 피해자의 성격이 결국 한데로 섞이게 되는 ‘폭력성’ 의 무참한 본질을 깨닫게 된다.
3.
동시대 청춘을 대상으로 삼은 작품답게 어두우면서도 젊음이 요동치는 무대였다. 작은 신화의 젊은 배우들을 주축으로 한 깡패 무리들도 하나하나 개성이 남달랐다. 성인 어른보다도 더욱 비열한 모습의 고등학생 싸움짱(김대업 분)은 마스크를 쓴 찌질이 왕따로 상반된 두가지 역할을 연기했고, 머리를 하얗게 염색한 백곰(김주희 분)은 처절하게 몰락하는 2인자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새로 짱으로 등극할(?) 여자깡패(박지은 분)는 거침없는 모습으로 넘치는 에너지를 소화했다. 큰 키의 어눌한 말투의 민석(박윤석 분)은 무기력한 성인 히키코모리의 모습을, 작은 키의 PD 우진(박종용 분)은 성인이 되어도 여전히 야비하고 비양심적인 캐릭터를 무난하게 형상화했다. 풍만한 몸집의 세진 엄마(최현숙 분)의 억센 말투와 행동이 인상적이었는데, 시종일관 이어졌던 ‘머뭇거림’ 의 표현은 이 시대 ‘학’ 부모의 무지와 무력한 모습을 잘 포착해냈다.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고된 선생질에 힘겨워 눈 풀린 얼굴을 하다가도, 원조 교제 대상에겐 눈을 반짝이며 인기가수의 가요를 들려주려고 연습하는 담임(고병택 분)이다. 현실에선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척 하지만, 뒤에서는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퇴폐적인 모습이 실감을 자아냈다. 힘을 소유했지만 그 공공의 칼날을 자기 방어에만 사용하는 이 시대의 나약하고, 이중적인 공권력을 형상화했다.
젊고 음습한 배우들의 기운이 몰아치는 이 작품에선 의아하리만치 세진의 폭력성에 대해 이유를 대주고 있다. 그러나 이는 현대 사회에서 변칙적으로 용인된 약자의 저항일 뿐,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약자를 괴롭히는 것, 약자를 괴롭히는 것을 방관한 것, 방관을 참지 못하고 손에 칼을 쥐는 것, 분명 모두 비윤리적이다. 폭력은 합법적 권력에 의해서 정의롭게 사용되어야만 하기에, 공권력을 가진 존재들은 더더욱 윤리적이며, 공적이어야만 할 것이다. 한편, 언론의 임무는 이러한 공권력을 감시하며 사회적 약자를 조명하는 것일 텐데, 그런 점에서 성공지향만을 보여주는 PD 캐릭터의 모습은 일말의 절망감을 더해준다. 담임에 이어 백곰까지 살해한 세진 일당은 경찰에게 쫓기게 된다. 최후의 순간, 로드무비의 주인공들처럼 “로그아웃” 을 외치며 현실을 빠져나가려 하나 그들의 모험이 악(惡)의 그물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다. 그들의 외침은 우리에게 “no exit" 라로 들려오는 것이다.
4.
극 속에서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 혹은 방관자를 지켜보며, 우리는 새삼 폭력의 무서움을 자각하게 된다. 허나 불편함을 추스르며 우리 자신을 돌아본 이후에도, ‘폭력’ 에 대한 ‘해결’ 을 모색해 보아도, 별 뾰족한 수가 없다. 되레 무기력함이 밀려든다. 과연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인식한다고 폭력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아니면 우리가 반성한다고 사회가 덜 폭력적이 되는가. 연극을 보고 나서, 답답함이 나아지지 않는 것은 그 안에서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쩌면 복마전이 되어 버린 무대가 우리 사회와 별 다를 것이 없어서일 지도 모른다. 관객들은 <두더지의 태양>을 통해서 누구도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이지 않음을 공감했다. 두말할 것 없이 학교와 학교 밖, 연극과 사회는 별반 ‘다를 바’ 없다. 국회의 폭력적인 예산안 날치기 통과, 힘센 형님에게 조아리는 조폭 정치, 평화적 노력 없이 더 큰 폭력으로 응징하겠다는 군사정책, 매 값으로 한대에 백만원이 넘는 돈을 던져준 깡패같은 재벌 3세, 이러한 사건 사고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왜곡하고 편집하는 언론. 비윤리와 부도덕의 극적인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현실을 그대로 무대로 옮겨오면 그대로 연극이 된다. 연극 속에서 ‘출구 없음’ 을 일깨우는 각성의 메시지를 품고 빠져 나와도, 여전히 사회는 ‘출구 없음’ 의 미로 속 인 것이다.
<두더지의 태양>은 하드코어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하드코어하게 텍스트에 풀어냈고, 정리된 무대로 옮겨졌다. 즐길 수 없이 불편했던 두 시간 내내 누굴 죽여야지만 성장하게 되는 불쌍한 어린 존재들에 대해 곱씹게 되었다. 사회를 모방하는 ‘유사’ 범죄 현장이 된 학교. 누군가를 죽일 수 없다면 스스로는 죽을 수밖에 없는 현실. 태초에 두더지로 주어진 존재에게 태양을 보는 일은 그 자체로 파국을 예감한 일일 테다. 눈먼 자의 손에 칼이 주어지는 것. 그것은 자기의 성장이 아니라 괴물의 성장이며, 발전이 아니라 절벽으로 내딛는 발걸음인 것이다. 과연 출구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2010 1210-1219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최원종 작 / 신동인 연출
공연내용
학교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세진은 집으로까지 찾아와 자신을 괴롭히는 인호를 칼로 찔러 죽이고 만다.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혼자 고민하던 세진은 유일하게 인터넷을 통해 마음을 나누고 있는 친구 민석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채팅으로 알게 된 세진의 유일한 친구 민석은 6년 동안 집밖으로 나오지 않은 은둔형 외톨이다. 몇 년간 집밖을 나간 적이 없는 민석은 망설이게 되고 그 또한 아버지의 제보전화로 모 케이블 방송사의 ‘은둔형 외톨이 실태보고 프로그램’의 취재 대상이 되어 방송사 폐쇄회로 텔레비전의 감시를 받고 있는 실정인데..
극단 소개
극단 작은 신화는 86년 창단이래 진지한 자세와 열정을 생명으로 순수연극만을 고집해오고 있다. 극단 작은신화는 창단공연으로 제작되었던 카페순회공연을 비롯하여, 구성원 모두가 작품구성에 참여하는 공동창작, 우리창작극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우리연극만들기, 실험단편연극제 자유무대, 고전을 새롭게 해석함과 동시에 그 가치를 발견하는 고전넘나들기, 연극을 통한 사회봉사를 추구하는 특별공연, 관객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야외공연 등 다양한 방법의 실험과 공동작업을 통하여 공연문화의 활성화에 노력해 왔다. 실험의식, 아카데미즘, 공동체의식, 관객과의 적극적인 교류로 요약될 수 있는 작은신화의 작업방향은 성년이 되는 지금에까지 ‘젊은 극단’으로 불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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