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리뷰가 아니다

2011. 5. 9. 13:57Review

 


이것은 리뷰가 아니다

  글_ 정진삼



1.

리뷰를 쓰지 않기. 이번에 떨어진 임파서블한 미션이다. 그럼 무엇에 대해 쓰지, 에 앞서 왜 쓰면 안되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신기하게도 리뷰를 쓰지 말기라는 미션에는 아무것도 쓰지 말라는 요청이 숨어있는데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다. 딴 거 하지 뭐,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딴 거 하기는 쉽지 않다. 일단, 이유가 없다. 딴 거를 여기서 왜 해야 하는가. 여기서 딴 거란 리뷰(혹은 프리뷰)가 아닌 것을 말한다. 시나 소설, 희곡 등이 떠오른다. 됐다. 여긴 그런 걸 쓰는 데는 아니다.

딜레마에 빠진다. 리뷰를 쓰지 않아야 하지만, 리뷰 아닌 것을 쓰기도 어렵다. 공연을 봤지만 사유할 수는 없다. 아니, 사유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쓸 수는 없다. 아니, 쓸 수는 있지만 지금, 여기의 매체를 통할 수는 없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니, 굉장히 슬퍼졌다. 공연을 보는 내내, 리뷰 쓸 이유가 없음에, 사유는 시도되었다가, 중단되었다가를 반복했다. 딴 거 하지 뭐, 는 결국 이 딴 거 안해, 가 되었다.

공연을 보고 글을 쓴다는 것이 이토록 사소한 것이었나... 소설가 김사과는 말했다. 글을 쓰지 않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나이지만, 글을 쓰는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다. 물론, 리뷰어는 소설가와는 다르며, 뭐든지 할 수 도 없다. 외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글을 써왔던 것이다. 또다시 한결 더 슬퍼진다. 공연을 보고 글을 쓴다는 것이 이토록 사소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리뷰를 읽는 독자의 핑계를 댈 수 밖에. 핑계라고 하면, 완전 슬프니 이유라고 해두자. 리뷰를 써야 하는 이유는 바로 관객들, 창작자들로부터 온다. 얼마나 본다고 난리냐? 라는 의문은 오히려 괜찮다. 인간에겐 수많은 대화상대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점을 생각하면, 지금의 식구만으로도 충분하다. 여기까지. 아직은 리뷰가 아니다.

 

 

2.

리뷰는 일종의 제도다. 리뷰를 쓰는 스타일이 연극-제도권이 아닌 글쓰기일수는 있지만, 공연을 보고, 생각을 하고, 글을 쓰고, 발표하는 행위는 철저하게 제도적이다. 독립예술이라고 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제도권의 테두리 밖에 있지만, 그렇기에 독립예술 리뷰는 더욱 필요한 것이다. 기록으로써, 비평으로써 리뷰는 결국 독립 예술의 상태, 홀로된 존재를 기억한다. 언제, 어디서, 누군가에 의해 벌어지고 있는 독립예술을 우리는 다 알지 못하기에, 본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의 소식을 나누어야 하는 셈이다. 리뷰는 독립예술작품을 제도권에 안착시키기도 한다. 창작자들이 제출하는 다양한 기금 지원서에는 리뷰도 포함된다. 독립예술을 목격하지 못한 심사자들에게 최후의 판가름은 리뷰일 것이다.

이처럼 리뷰는 독립예술을 기억하고, 유지시켜주며, 주변에서 중심으로 밀어주기도 한다. 평생 독립운동만 하고 살수도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독립예술 창작자들, 관객들, 지지자들이 그때, 거기있었음을 환기시켜준다.

여기까지 비장한 각오로 말해왔지만, 독립예술 리뷰가 얼마나 예술가들에게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자신도 없다. 무엇보다도 지금, 얼마 전 본 공연에 대해 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주저하게 된다. 어쨌든 공연으로 돌아가자. 리뷰를 쓰는 대신에 프로그램을 읽기로 한다. 따라서 이것은 리뷰가 아니다.

 


3.

"the A-" 로 시작되는 공연을 보았다. 2009년 영국 로열코트 극장에서 초연되었으며 팀 크라우치가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한 작품이다.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없앤 독창적인 형식으로 연극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 이 작품은 섬세한 무대언어를 보여주는 김** 연출이 재해석하여 무대에 올린다, 라고, 프로그램은 말하고 있다. 실제로도 공연은 그랬다(Yes!). 아니, 그렇기 때문에 프로그램에 썼을 것이다. 물론, 아닐 때도 있다. 대체로, 많다. 그런 것들을 가려내는 작업이 리뷰가 될 것이다. 다행히 공연은 그랬다’. 고로 리뷰를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그 거 말고는 또 뭐가 있지?" 이라는 질문이다. 이 공연은 할 얘기가 많다. 관객이 극에서 더없이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쓰지 않는다. 못한다. 쓰는 순간 편집장은 울상을 지을 것이며, 그런 모습을 떠올리면 또 다시 슬퍼지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어서 프로그램을 읽기로 한다.

“the A-” 는 오로지 이라는 수단만 사용하며 때론 이렇게 말로 보여주는 것이 매우 충격적이기도 하다. 이 연극은 아동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며 그야말로 청중을 위한 것이다, 라고 프로그램은 말한다. 역시나 그랬다.(Yes!) 지금까지 두 번의 예스! 를 한 것 외에는 공연에 대해 어떤 논평도 하지 않았기에 다행히 이것은 리뷰가 아니다.

사부님은 말했다. “너희들이 공연을 관객들보다 잘 본다는 착각을 버려라. 오히려 관객들은 너희들보다 낫다. 다만 너희들은 언어로, 글로 풀어쓰는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그 작업이 수월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말대로 하면 리뷰어는 일종의 기술자다. 쌍용에서 해고된 노동자처럼, 두리반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처럼, 콜트콜텍 때문에 수난을 겪는 사람들처럼, 리뷰어도 나름 기술자였던 것이다. 자원봉사자가 아니었다. 다행히 인디안밥은 기술 대신에 개성을 존중해준다. 그렇기에 고용도 해고도 없다. 사업장이, ‘뿐 이다.

요새 예술가와 예술작업의 탈신비화가 하도 유행처럼 번지기에, 업계의 비밀을 누설해 보았다. 따라서 이것은 리뷰가 아니다. 오히려 위키리크스(폭로)에 가깝다.

 



4.

예술가의 탈신비화는 작품의 탈권위화를 의도한다. 무대를 가린 빨간 커튼을 들춰내어 그 뒤에 숨겨진 실체를 폭로하는 것이다. 갤러리의 불을 환하게 밝혀, 전시장의 전모를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보여주자는 공개주의다. 이러한 방식은 전작인 <우리 말고 또 누가 우리와 같은 말을 했을까?>에서도 시도되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개되는가? 업계의 비밀이 누설된다. 배우와 작가의 신화가 벗겨진다. 연극 만들기의 비법이 전수된다. 이 작품에서는 어떠했을까? 당연히, 밝힐 수 없다. 이것은 리뷰가 아니니까.

이러한 공개주의, 혹은 탈신비화라는 방식을 역이용하는 예술가들도 있다. 신비화된 작가의 죽음, 모든 저자의 비밀이 공개된 시대에, ‘관객 = 작가라고 해놓고, 정작 자신이 작가

위치를 꿰차기도 한다. 일견 탁월해 보이는 주제로, 지적인 수사로, 심미적인 표현법으로 관객들을 현혹하고 선동한다. 그리고는 환히 밝힌 블랙박스(극장) 혹은 화이트박스(갤러리)에서 자신의 우월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드라마와 전시물이 사라진 그 자리에, 무형의 개념들을 쌓아놓고 관객을 내려다보는 것이다. 또 다른 억압의 권위가 작동한다. 이런 경우 차라리 진공청소기와 사랑을 나누고, 북을 치며 배우 이름을 호명하는 누군가가 더 솔직할 것이다.

폭로는 공개라는 행위 그 자체보다도 그것의 배후에 있는 진짜의도, 폭로 이후에 불러내고자 하는 화두에 초점이 맞춰져 있을 것이다. 정보 공개는 스캔들로 가고자함이 아니라, 체제를 전복시키는데 목적이 있다. , 호기가 아니라 용기의 문제이며, 이윤이 아니라 윤리의 문제이며, 진리가 아니라 진실의 문제다.

중간에 공연내용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뜨는, 허구가 포기된 진실을 거부하는 관객도 있었다. (그러나 그 관객은 가짜다! 폭로한다!) 작품에서는 배우라는 최소한의 연극적 미디어는 이라는 물질을 주고받으며, 마치 농담 따먹기나 하는 듯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종국에는 재현의 윤리, 연극에서의 진실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긴, 연극이라고 무엇이든지 증언하고, 폭로하고, 재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이 연극은 보여줄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연극이다.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지 못하기에, 보여주는 대신 들려주려 했을까? 아아, 위험하다. 이쯤되면 거의 리뷰수준이잖아. 본격적으로 이 작품이 어떠했는가는, 다음 장에서 말할 예정이다. 그러므로 이쯤해서, 대충, 넘어가자.

 



5.

재미없었다, 라는 은 감상문에서나 쓰는 말로 리뷰에서는 사라진지 오래다. 그런데 실상 이 말은 관객들이 가장 많이 주고받는 말이기도 하다. 리뷰를 쓰는 대신, 왜 그 적당하고 압축적인말을 리뷰에서 쓰지 않을까, 를 고민해본다. 아마도 연극이 더 이상 고전적 의미인 재미를 획득하는 장르가 아니라서일까. 연극 말고도 다른 장르들이 훨씬 잘해내고 있으니까 그런 것일까. 그렇다면 연극은 이제 재미가 없어도 될 만큼, 다른 매력을 갖추었거나 관객들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해서 재미라고 말해주면 되는 것일까. 괜찮은 방법이다. “썩 재미있지는 않았던 이 작품도 다른 매력, 혹은 다른 의미들은 갖고 있다는 말이다.

솔직히 고백하자. 소설가 소설, 연극인 연극은 딱히 재미있지-가 않다. 자기애를 기반하고 있는 자기연민 스토리들이 재미있을 리가... 게다가 진정한 의미에서 폭로도 아니잖은가. 대체로 시인 시, 소설가 소설, 연극인 연극은 주체(예술가)의 반성에서 시작한다. 반성문을 보라. 자기가 벌여온 일들에 대해서 잘못을 고하고, 용서를 빌며, 앞으로 그렇게 안 살겠다고 다짐한다. 전형적이다.

재미가 없는 것은 둘째치고, 주체의 내면적 성찰이 외부 세계를 보는 시야까지 확장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관객의 세계로 넘어오지 않는, 저기, 저편의 초라한 현실은 또 다시 구경거리가 되고 말 것이고, 구경거리가 된다는 점에서 연민은 뒤늦게 이상한 타이밍에서 발생한다. 더 큰 문제는 내면적 성찰마저도 의심스럽다는 점이다. 물론, 진실여부는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속아 넘어가서도 안된다. 당연하게도 시인이, 소설가가, 연극인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안 진실할 수 있을까? 결국 진실과 윤리의 문제다.

믿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예술가들은 진심을 다해 말하고 있음을 믿어줘야 할 것이다. 그들의 숨겨진 의도가 엘리트 부르주아 되기-가 아닌 이상, 그들도 나름 바닥을 구르고 있지 않은가. 관객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작품 안에서 그 신비감마저 집어던진 주체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며, 작품 밖에서는 그런 고민 속에서 실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소식에 관심을 갖는 일이다.

이렇게까지 말하고 보니 이것도 결국 리뷰어 리뷰가 아닌가... 허허, 그래서인지 참, 별로다. 심지어 길기까지 하다. 길고, 재미가 없다면 그것은 리뷰의 충분조건이 아닌가. 심히 두렵다.

 



6.

“the A-” 로 시작되는 이 연극은 앞선 우려들을 불식시킨다. 진의가 의심스럽거나, 혹은 그 방식이 의뭉스럽지는 않다. ‘잘난 체의 의도도 엿보이지 않는다. 다만, 썩 재미있지는 않았다. 아쉽다. 예술이 자신의 실체를 나름대로 성실히 공개하고, 반성하고, 지금, 여기의 객석에 바짝 다가가도, 관객들이 작품에 자발적으로 즐겁게 동참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 문제인 것이다.

앞에서 예술가들 편을 들었으니, 이젠 관객의 편도 좀 들자. 냉정하게 따지면, 관객들은 무조건 박수치는 공연 관계자도, 타이밍을 맞춰놓은 성찰기계도, 장르예찬에 동참해야 예술가도 아니다.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상 고개를 젓게 마련이며, 사유가 강요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 아무리 진심이라도 - 거부감이 드는 게 정상이다. 아니면 아닌 것이다. 작품에 대한 자기 자신의 반응이 그 근거다. 자기를 의심하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자기에의 미학, 양심, 윤리를 기준으로 누구나 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

재현할 수 없는 것을 재현하기 위해 우회적으로 동원된 극적 장치들은 관객들에게 절실한 공감을 자아내지 못했다. 이것은 하는사람 - 예술가들- 에게만 절실해 보인다. 경계 허물기를 의도했지만, 관객들은 타인으로 남기를 바라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긴, TV드라마 같은 재현을 좋아하는 우리 관객들에게, 재현의 윤리는 참으로 생소하게 느껴진다. 그 논의 주제의 심각함, 어조의 비장함은 외려 거부감이 든다.

한편으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소홀했던 그간의 우리 연극이 반성할 지점이기도 하다. 재미 구현을 위한 무분별한 재현, 미학달성을 위한 비윤리적 이미지 생산이 창작 현장의 본모습은 아니었나. 우리는 폭력적인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매번 폭력적인 주체가 되어, 폭력적인 연극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왔다.

아뿔싸, 너무 진지해졌다.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몇 가지 스포일러 혹은 가십 따위를 나열하겠다. 어찌보면 이런 것들이야 말로 중요한 것이다. 공연에서는 초컬릿을 준다. 맛있다. 아기 사진을 돌린다. 귀엽다. 실제 연극배우들도 관객으로 있었다. 그들은 작품에서 무대가 삭제되었음에, 그리고 배우와 인물의 경계 없음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아마도 그들은 하는사람이니까, 참으로 절실했을 것이다. 연극배우 장영남도 왔었다. 참 예뻤다.

 



7.

여기까지가 공연에 대해서 할 수 있는 전부다. 그래도 왠지 리뷰 같은 느낌은 지울 수 없다. 다행히 식자의 말투보다 관객의 말투를 몇몇 시도해보니 시원함 같은 게 느껴진다. 그간 리뷰를 통해 얼마나 잘난 체를 해왔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이상하게도 우리 사회는 학술적인 글, 논문틱한 글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왔다. 일반인의 말 대신 예술가의 말로, 배우는 사람의 말 대신 가르치는 사람의 말로 리뷰를 작성해야만 했다. 관객과 학생의 말은 비평으로써, 리뷰로써 그리 가치있는 글이 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현학적인 목소리를 갖추지 못한, 리뷰어들은 자기의 신념을 버리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이 땅의 무수한 공연 관련 인쇄 매체들은 번역이 가능한 2개 국어를 할 수 있는 자들에게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시스템을 운영했던 것이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연극제도와 자본주의의 결탁이기도 하다. 연극판이 가난해서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원고료, 즉 경제적 가치를 매길 수 있는 글은 똑똑한 글이었으니까.

가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학계나 연극계를 대표하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누구를 억압하거나, 폭력을 재생산하지 않는다면 리뷰는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쓰기인 것이다. 위에서 누누이 떠들었던 예술가의 용기와 윤리와 진실이 문제는 실로 비평의 문제이기도 하다. 휴우... 여기까지 쓰고 안심한다. 그리고 확신한다. 이것은 리뷰가 아니다. 이것은 반성문인 것이다.

 

 

 

p.s. 인디안밥이 어렵단다. 뭐가 어려운지 자세한 사정은 밝히지 않겠다. 실은 잘 모른다. 다만 밥이 떨어졌단다. 문제를 간단히 생각했다. 리뷰를 쓰지 않으면 되잖아. 그래서 리뷰를 쓰지 않기로 생각했다. 일제시대 저항시인이 그랬듯 자연이나 을 노래하면 될 것 아닌가, 하는 비장함도 생겼다. 그러나 말장난으로 슬픔과 허무함을 가릴 수는 없었다. 얻어먹을 밥이 없다니, 마음대로 하면 되겠군. 독립예술에 걸맞는 실험적인 글쓰기를 보여주겠어. 공상은 쉽지만 현실은 어렵다. 나눌 밥이 없는데, 리뷰 아닌척하면서 리뷰쓰기를 고집하는 것은 땡깡이다. 흐르는 눈물을 도로 들어가게 하는 반중력의 법칙은 없다.

인정하자. 인디안밥이 어렵다는 것은 현실이다. 모쪼록 슬픈 일이다. 그리고 그 슬픔은 관객/독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어느 순간 예술이 사라진다면, 그 고통은 예술가의 것이기도 하지만 관객의 것이기도 하니까. 사람들의 경험과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공연들. 구전되지 않는 한, 아예 없었던 것이 되고 만다. 평가받고 인정받지 못하는 한 영원히 변방에서 독립만세만 부르짖어야 한다.

그러고 나니, 갑자기 그간의 리뷰들이 달리 보이게 되었다. 인디안밥은 우리의 목소리였다. 반음 내려간, 혹은 강렬한 허스키의, 혹은 수화로 하는, 혹은 사투리가 섞인, 생긴대로 나오는 개성적인 존재들의 목소리였던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또 다시 괜히 애달파졌다. 한편으로는 갑자기 리뷰를 쓰지 못하게 되니, 청개구리 심보마냥 리뷰가 너무 쓰고 싶었다. 두서가 없었지만, 끝까지 두서가 없기로 작정하고 삼가 고은씨의 말을 되새긴다. 공부하는 게 힘들면, 공부하면 돼, 영화하기가 어려우면, 영화를 하면 돼. 거기에 나지막이 한마디를 덧붙여 본다. 리뷰가 어려우면, 리뷰를 쓰면 돼.

 




*이 글은 리뷰가 아니므로 공연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는 밝히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