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단편소설극장전 : 서울, 1964년 겨울 vs. 서울, 2011년 여름

서울, 1964년 겨울 vs. 서울, 2011년 여름
- 단편소설극장전 첫번째 작품 :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서울, 1964년 겨울」

 

글_ 김수진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겠지만…'으로 시작되는 김승옥의 소설 <서울, 1964년 겨울>. 그러나 내가 <서울, 1964년 겨울>을 만난 2011년 6월 9일 산울림 소극장에는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낸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그러니 2011년 여름, 연극으로 다시 태어난 <서울, 1964년 겨울>은 더 이상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1964년의 스물 다섯 살과 2011년의 스물 다섯 살. 소설 속 인물과 무대 위에 있는 배우들. 내가 극장에서 만난 배우들은 아직 학생 티를 완전히 벗기 전의 활력 있고 발랄한 청춘이었다. 이번 작품이 데뷔무대인 젊은 연출과 배우들은 즐겁게 작업한 듯 보였고, 좋은 팀워크를 가지고 있었다. 함께 작업할 동료를 찾는 것, 함께 인생의 길을 걸어갈 친구를 찾는 것이 청춘의 시기에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잘 알기에 그들의 활력은 즐거웠다.


<서울, 1964년 겨울>은 산업화와 근대화의 물결이 몰아치는 1960년대 서울에 사는 젊은이들의 방황과 의식 세계를 감각적 필치로 그려내고 있는 김승옥의 대표작이다. 공동체 의식이 무너지고 고향을 상실한 젊은이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이념에 선뜻 동조하지도 못하고 무너지는 전통에 대한 미련도 갖지 못한다. 이들이 개인화하면서 겪는 의식의 방황은 회의주의자인 안과 냉소적인 나의 쓸데없는 말수작 같은 대화 속에 드러나고 그 안에서 둘은 동질감을 느낀다. 그러나 소외되고 방황하는 이들의 활동무대는 겨울 밤, 여관이나 술집, 밤거리일 뿐이다.

반면 삶에 절망하여 끝내 자살하고야 마는 사내는 두 청년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그는 자신의 고통을 함께할 동행을 구하지만 둘은 이를 외면하여 자살에 이르게 한다. 사내의 죽음은 개인화하는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세대의 인간형이 도태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와 안은 무관한 듯이 그 자리를 회피하기 급급하다. 하지만 진정 그들이 정말 그 죽음에 무심할 수 있을까. 작가는 스물다섯 살이라는 나이를 거듭 확인하는 두 사람이 우리가 너무 늙어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라는 대사를 통해 냉소와 회의로 무장된 그들의 이면에 들끓는 진지한 삶에 대한 갈망을 엿보게 한다.

 

라고 네이버 백과사전은 이 소설을 소개한다. 이 소설을 무대에 옮기는 연출과 배우들의 활기는 개인화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냉소와 회의로 무장된 소설 속 인물들과 묘하게 중첩되면서 자칫 어둡고 우울하게 느껴질 수 있는 소설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만나는 배우들의 청춘다운 발랄함과 즐거움이 1965년의 소설을 2011년 공연으로 다시 살아 숨쉬게 한 것이다.

소설 속 중심인물인 ‘나’와 ‘안’은 스물 다섯 살. 그러나 그들이 쓰는 말은 2011년의 스물 다섯 살의 말과는 한참 달랐다. 이 소설 속 청춘들은 1964년에 청년기를 보낸, 2011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다. 우리 부모님보다도 열 살은 위인 세대들, 그 세대들의 청춘과 지금 이 시대의 청춘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와 더불어 그들의 말과 지금의 말이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것이 1964년 소설과 2011년 연극이 극복해야 할 거리였다.

몇 년 전부터 문학은 원소스 멀티유스의 흐름 속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영화화, 드라마화, 뮤지컬화되었다. 원소스 문학에서 이야깃거리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무대화하는 것에 관심이 많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성기웅 연출의 작업과 더불어 이번 산울림 소극장 ‘단편소설 극장전’에서 만날 수 있었던 세 편의 작품, 그 외 소설을 연극화하려는 시도에는 영화나 뮤지컬이 소설을 택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는 듯하다. 물론 선택하는 작품의 이야기도 중요하겠지만, 그보다는 새로운 질감, 구조, 형식의 텍스트에 끌리는 것이다. 대화와 갈등으로 이루어진 기존의 희곡 텍스트에서 벗어난 텍스트는 새로운 구조와 형식, 표현 방법 등을 실험할 수 있게 해준다. 특히 이러한 시도의 중심에는 화술에 대한 고민이 있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소설 <서울, 1964년 겨울>을 무대화한 연출의도를 살펴보자. 다음은 프로그램에 실린 연출의도 전문이다.


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서울 1964년 겨울>, 기존의 소설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는 가운데 '독자체험과 유사한 관객체험'을 지향한다. 그리하여 관객에게 소설과 소설의 사유를 담백하게 전달하면서도, 하나의 말을 건네는 행위로써 생생하고 섬세하게 시각화된 연극적 읽기의 재미를 건네고자 한다. 소설 속의 세 인물, '''''사내', '기억을 더듬는 나''그 밤을 겪고 있는 나' 그리고 '''사내'의 네 인물이 되어 무대에 등장한다. 극장의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소설의 낭독자이자 소설 속 인물로서, 소설과 연극의 경계에서 그 적절한 거리와 균형을 찾는다.

 
자, 그렇다면 이 연출의도는 실제 작품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또 실현되지 못했을까?



1. 기존의 소설 문장을 그대로 사용

그랬다. 이 공연에서는 소설의 문장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말했다’ 등의 서술 부분의 처리를 다 살려 배우의 입을 통해 발화되었다. 그러나 소설에서 그 부분을 읽는 것과 배우가 들려주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연극이나 영화, 드라마에서처럼 다른 목소리, 다른 모습의 배우가 없는 소설의 문장은 계속 머릿속에서 적절한 인물을 그리며 읽어가야 한다. 그렇기에 이 얘기를 내가 한 것인지, 그가 한 것인지 표시해주지 않으면 쉽게 헛갈린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그 부분은 대부분 눈으로 쓱 훑고 지나갈 때가 많다.

이 공연에서는 그 부분을 소설 문장의 특성이자 재미로 여긴 듯 했다. 그래서 배우들은 그 부분 역시 전달력 있게 말해주고자 했다. 그러면서 그 부분을, 발화하는 인물의 감정전환, 판단, 고민 등 내면을 보여주는 시간으로 쓰고자 한 듯했다. 그러나 그것이 일정하게 반복되면서 하나의 고정된 리듬과 템포를 가지게 되었다. 변화 없이 (혹은 있다고 하더라도 미미하게) 반복적으로 들리는 ‘~는 말했다’는 이야기의 흐름을 되려 방해하며 이야기를 잘 들을 수 없게 했다.

배우가 읽는 것이 말이 아니라 글이라 할지라도 무대 위에서 발화할 때는 말이어야 한다. 글을 읽는 것은 극장이 아니더라도, 배우가 읽어주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읽기와 말하기는 다르다. 말하기는 글을 살아있게 만든다. 말하기는 읽기를 생생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소설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며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더욱 고민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4명의 배우 중 3명은 2010년 겨울 야합 공연 때부터 함께 했고, 이번 공연에 1명의 배우가 새로 합류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처음부터 함께 작업했던 배우들이 아닌 새로 합류한 배우가 소설 문장을 가장 잘 말해주었다.



2. 독자체험과 유사한 관객체험

이 부분을 얘기하려면 우선 독자와 관객의 차이를 언급해야 한다. 독자는 혼자서 읽는다. 언제든지 읽기를 멈추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읽는 환경을 스스로 바꾸고 조정할 수 있다. 읽는 속도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다. 관객은 만들어진 공간에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속도에 따라 공연을 본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고, 보는 환경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 요즘에는 다른 관점에서 관객의 능동성을 연구하고 있지만, 단순히 관람하는 환경만 놓고 본다면 독자보다 자유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에 독자체험과 유사한 관객체험을 그저 소설 문장을 듣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기에는 독자와 관객이 각각의 매체를 접하는 환경에서 오는 차이가 너무 크다.


어쩌면 독자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독자 개개인이 가지는 능동성과 자유가 아닐까? 물론 독자와 관객의 근본적인 환경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관객이 공연을 통해 독자와 같은 체험을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소설을 읽는 속도를 고려해서 공연의 템포를 좀 더 섬세하게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관객은 보는 속도를 스스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공연의 템포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쉽게 지루하다고 느끼거나, 혹은 따라갈 수 없다고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소설을 소리 내어 읽는 사람은 거의 없다. 눈으로 읽는 속도가 무대 위에서 구현될 수 있었더라면, 배우들의 다양한 목소리로 배우들의 몸을 보면서 독자로서 자유롭게 속도를 조절하며 읽었던 소설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독자체험과 유사한 관객체험을 통해 무대 위에서 소설읽기의 새로운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3. 생생하고 섬세하게 시각화된 연극적 읽기의 재미

시각화된 연극적 읽기의 재미를 위해 시도된 것의 첫 번째는 소설의 주인공이자 서술자인 나를 분리한 것이다. 연출가는 '기억을 더듬는 나'와 '그 밤을 겪고 있는 나'를 분리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글을 쓰며 다시 공연을 더듬어 보니, 그 의도가 어느 정도는 공연에서 구현되었다. 그러나 공연을 볼 때는 그 이유와 효과를 느끼기 어려웠다. 아무래도 소설 자체에서 주인공과 서술자의 시간이 크게 다르지 않기에 대사로 그 분리를 전달하기에는 모호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되려 가장 크게 아쉬웠던 것은 무대였다. ‘나’를 분리한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은 배우를 두 명 쓰는 것 다음으로 다양한 시각적인 장치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물론 공간을 화려하게 가득 채워야 더 시각적인 것은 아니다. 적절한 공간과 대도구의 사용, 의상, 배우의 움직임 등 여러 시각적 요소를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텍스트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 특히 의자는 극의 분위기와 전혀 맞지 않았다. 배우의 움직임만을 활용하거나, 차라리 낭독공연이었거나, 아니면 좀 더 적극적으로 대도구나 소도구를 썼으면 어땠을까. 더 적극적으로 비우거나, 채우거나, 움직이거나, 움직이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연극에서는 텍스트 못지 않게 시각적인 것이 중요하다. 어떤 것이 어떻게 보여지느냐에 따라 관객은 다른 방향으로 간다.




2010년 겨울 야합 공연에서 처음 무대 위의 이 소설을 접하고, 다시 공연된다고 해서 개인적으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젊은 연출가가 치열하게 고민해서 하나하나 자신의 것을 찾아가는 것을 함께 하는 것은 관객으로서도 뿌듯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울림에서 다시 만난 <서울, 1964년 겨울>은 아쉬움이 많은 공연이었다. 젊은 연출가에게서 자꾸 성기웅 연출의 작품이 겹쳐져 보였던 것은 비단 나뿐이었을까. 그리고 ‘나’와 ‘안’이 마지막에 서로에게 되물었던 ‘우리가 너무 늙어 버린 것 같지 않습니까’라는 질문이 맴돌았던 것 역시 나뿐이었을까. 비록 이 공연이 성기웅 연출이 대표로 있는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작품으로 제작되긴 했지만, 젊은 연출가다운 새로운 방식을 고민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 빛났던 즐거운 활기와 함께 진지하고 깊은 고민을 느낄 수 있었더라면 더욱 좋은 공연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단편소설극장전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 서울 1964년 겨울
2011 0608 - 0612  산울림소극장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서울 1964년 겨울>은, 기존의 소설 문장을 그대로 사용하는 가운데 ‘독자체험과 유사한 관객체험’을 선사코자 한다. 배우는 소설의 생생한 낭독자이자 소설 속 인물로서, 소설과 연극의 경계에서 그 균형을 찾는다. 담백한 무대화/시각화를 통해 소설 텍스트의 온전하고도 입체적인 확장을 모색하며, 소설이 그 자체로 품은 연극성을 오롯이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원작 - 김승옥
연출 - 전진모




필자소개_ 김수진
미술과 연극.
이론과 창작.
그 사이 어디쯤 적당한 자리에 안착하고 싶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