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비디오 카메라

비디오 카메라

공연_정금형
일시_2012년 3월 14일/15일 오후 8시
장소_로라이즈  

글_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우선 나도 그냥 이 글의 제목을 (정금언니를 따라) ‘비디오 카메라’ 라고만 하겠다. 비디오 카메라.

내가 알기로 예술에서 최초로 카메라가 활용된 사례는 1961년 백남준 형아가 포터팩을 들고 교황의 뉴욕 방문을 촬영한 것이었다. 기존 다큐멘터리 취재와는 달리 예술가의 주체적인 시선이 삽입됐기 때문이라나. 어쨌든 이후 카메라는 주로 퍼포먼스에서 활용되면서, 대개 퍼포머의 내밀한 몸과 행위를 기록하는 데 쓰이곤 했다.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는 <Art must be beautiful(1975)>에서 벗은 어깨를 드러낸 채 구불구불한 긴 머리를 하염없이 빗으며 “Art must be beautiful. Artist must be beautiful.” 이라고 속삭이며 요염한 시선을 던졌고, 비토 아콘치(Vito Acconci)는 <Theme song(1973)>에서 비스듬히 팔에 머리를 기대 누운 채 정수리 쪽에 놓인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고 담배를 피워대며 도발적인 노래를 불렀다. 요컨대 초기의 카메라 활용에서 중요했던 것은 ‘카메라에 담긴 예술가(주체)’ 또는 ‘카메라에 무언가를 담는 예술가(주체)의 시선’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러니까 카메라의 시선은 애초에 예술가의 나르시시즘적 전유물이었던 셈.

그 후로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비디오 카메라는 무대에까지 잠입했다. 공연에서 카메라는 대개, 실시간 촬영 기법을 이용하여 세계(시간과 공간)를 분할하고 동시에 관객의 감각을 분할하여 병치시킴으로써 보다 능동적인 (또는 혼란스런) 감상을 도모하거나, 클로즈업 기법을 통해 무대에서는 다 드러나지 않는 인물의 숨은 내면을 염탐하게 하는 식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큰 변화 없이, 쭈욱 그렇게? 사실 예술에서의 무한한 활용 가능성이 기대되었던 저 비디오 카메라는 이제 대충 ‘그렇고 그런’ 뒤안길에 내려선 듯하다. 물론 구태의연하게 카메라를 사용하는 모든 예술 작품들을 “뭐야 또 그렇고 그런 거잖아!” 하는 식으로 깔보아선 안 될 터. 그렇고 그런 것을 그렇고 그렇지 않게 만들어낼 줄 아는 게 예술의 뽀인트니까. 구태의연한 것들을 가지고 대뜸 시선을 사로잡아 가슴을 벌렁거리게 하는 그런 작품을, 어쨌든, 백에 한 번이라도 손꼽아 기다려봐야지 않겠는가?

어쨌든, 정금언니의 <비디오 카메라>를 보러 가보자. 안개 자욱한 봄 밤, 문래동 로라이즈를 찾아가는 길은 험난했다. 그렇고 그런 음침한 건물들 사이에서 종이 쪼가리 하나 붙여놓지 않은 그녀의 놀라우신 대담함 덕분에.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포스가 범상치 않았다) 어떤 블로거는 물이 흥건한 계단을 올라가라던데, 심지어 그 시각엔 계단도 바짝 말랐던지라 2층으로 올라가 깊이 고개를 디밀기 전까진 긴가민가할 수밖에. 헌데 조금 있으니 이것 봐라, 사람들이 북적북적, 바닥에 앉은 엉덩이는 으슬으슬, 조용히 카메라 옆에 다가 앉은 정금언닌 무심무심. 그리고 나는 나눠준 종이를 재빠르게 훑는데 ― 솔직히 기운이 쑥 빠져버렸다. 그냥 딱 봐도 그렇고 그래서. 내용도 그렇지만 문장들마저 고리타분. 그래도 뭐, ‘삼각관계 치정극’이란 표현은 좀 땡긴다. 고걸 어떻게 풀어내는지가 문제겠지만. 어디 한 번 보자구, 언니.

도로를 면한 흰 벽면에 인형이 두 개. 정확히 말하자면 두 대의 카메라 삼각거치대(지금은 가지런히 다리가 모여 검은 주머니 안에 갇혀있다) 위에 씌워진 마네킹 머리가 두 개. 그리고 둘 사이에 커다란 모니터 한 대, 왼쪽 구석에는 자기도 인형처럼 창백하게 앉은 정금언니. 이윽고 장내가 조용해지자 그녀가 고요히 무릎을 꿇고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바로 옆에 있는 짧은 머리 마네킹의 옷을 주섬주섬 벗겨, 그의 다리 세 개를 하나씩, 한 칸씩 탁, 탁, 늘어뜨려 세운다. 그리고 그녀, 기대 세운 인형의 머리카락을 섬세하게 어루만지기 시작한다. 감싸 안듯이 마네킹을 애무하는 희고 긴 손가락. 그러다 갑자기 조용한 흰 손가락이 딱딱한 머리통을 뜯어내 텅 빈 그 속을 가차 없이 헤집고 들어간다. 그리고는 머리통 속 카메라와 모니터를 연결해, 보이지 않는 조작버튼을 더듬더듬 눌러가며 미리 녹화된 몇 개의 영상을 트는 것이다. 화면에 나오는 것은 삼각거치대의 다리, 를 쓱싹쓱싹 천으로 닦는 정금언니의 손, 가끔 움찔거리며 등장하는, 그 다리의 주인인 긴 머리 인형의 머리통, 과 정금언니의 머리통, 고정 버클을 풀어놓고 다리(?) 한 칸을 끝없이 밀었다 빼는 손길, 쓱싹쓱싹.

그러고서 언니는 카메라를 끄고, 코드를 뽑고, 머리통을 닫고, 다시 다리들을 탁, 탁 밀어 넣어서 검은 옷을 입혀 마네킹을 벽에 기대놓는다. 그리고 무릎으로 기어 다음 인형에게로 이동, 똑같은 작업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단지 이 마네킹은 머리카락이 긴 탓에 다정하면서도 익살맞은 애무를 좀 더 오래 받는 것이 차이라면 차이. 그렇게 비디오를 틀면, 이번에는 저 짧은 머리 마네킹의 얼굴이 멀리 맞은편에 보인다. 다른 게 아니라 현재 정금 언니는 본인(긴 머리 마네킹)의 그곳을 열심히 애무 중이고,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타인(짧은 머리 마네킹)의 시선이 그의 흔들리는 망막 위에 새겨진 것. 또 다른 영상에서는 작업(?) 중인 언니의 고집스런 이마와 가늘게 삐져나온 잔머리, 찢어진 긴 눈이 아래위로 왔다 갔다. 뭐 그런 식? 말하자면 적나라하게, 능청스럽게, 무덤덤하면서도 섬세하게, 낯간지럽게,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 꽂혔다만) 마치 무용수의 몸짓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머리통을 쑤셔가며 영상들을 틀어대는 우리 언니의 손끝에서, 사뭇 진지하고 에로틱한 유치뽕짝 삼각관계 멜로드라마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나는 비디오 카메라가 주로 예술가(주체)의 나르시시즘적 시선을 반영한다고 썼다. 공연을 보기 전 리플릿을 읽을 때까지만 해도 이 공연이 그렇고 그런 류에 속하리라 여겼었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멋쟁이 정금언니는 그렇고 그런 것(시선의 문제)을 그렇고 그렇지 않게 뒤틀어 풀어낼 줄 아는 예술가(이 얼마나 위대한 이름인가)였다. 왜냐하면 그녀에게 있어 ‘주체의 나르시시즘보다 카메라의 시선이, 주체의 자위행위보다 카메라의 오르가즘이’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비디오 카메라의 시선을 카메라 자신에게 되돌려줌으로써(이 공연에서 카메라 렌즈는 인형들의 한쪽 눈알이었다) 통상적으로 언제나 타자의 자리에 놓이곤 하던 저 위대한 기계를 비로소 주체로 격상시켰다. 아주 아름답고 단순한 손짓 몇 번으로 말이다. 정말이지 나는 그녀의 손짓에 반해버렸다.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머리통을 살짝 뜯어내 그의 뇌피질을 마구 쑤셔 버튼을 조작하고, ‘니가 봤던 것, 니가 느꼈던 것, 흠칫거리고 부들거리면서 애욕에 가득 찬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고걸 어디 한 번 내놔 봐’ 하는, 그리하여 비디오 카메라에게 고유한 시선 뿐 아니라 하나의 자의식을 부여한, 그녀의 손짓.

그리고 어쨌거나 저쨌거나 고백하건대, 오기 직전 차 몇 잔을 연거푸 들이켰던 나로서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화장실 생각이 간절할 뿐이었다. 그녀의 손길이 간지럽게 느껴질수록 더욱. 해서 공연이 끝나자마자 열쇠를 받아 음침한 화장실로 향하는 길에, 이제 보니 정말 계단에 물이 흥건하더라. 왜 그런가 (안개 때문인가) 했더니 화장실 문을 열자 분리된 두 개의 공간 중 첫 번째 공간에 신발이 푹 잠길 정도의 홍수. 나는 바다를 건너는 기분으로 그곳을 건넜고, 바다 밑은 녹슨 땅이었다. 그리고 나는 제대로 잠기지도 않던 저 너머의 문 때문에 잔뜩 쫄은 채 쪼그려 앉아 멍하니 곧 다시 바다를 건너갈 생각에 잠겨 있는데, 묘하게 평화로우면서도 불안한 이 기분. 어딘가로부터 따갑게 느껴지는, 비디오 카메라의 시선들, 시선들.

* 포스터 출처_http://blog.paran.com/goldenpuppet/
** 사진 제공_pipifatal

필자소개_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인디언 사회초년생. 공연보는 미학도. 야구보다 가슴뛰는 연극을 고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