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8월 레터] 축제 2

2012. 8. 1. 00:01Letter

 

축제 2 - 지역성

 

Eugene Ivanov, The Travelling Theatre of the City N

생각해보면 축제의 이름 앞에는 대개 지역명이 붙습니다. 가끔 ‘젊은’ 류의 모호한 정체성이나 ‘변방’ 같은 추상적 공간이 수식어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방곡곡 지역의 이름들은 보통 ‘공간’이 아닌 ‘장소’의 의미를 담지한 채 축제 앞에 붙여집니다. 그리고 장소라는 것은 공간과 달리, 고유하고 특수한 역사나 자연, 풍광, 기후, 그리고 사람들과 연관한 개념이지요. 그러므로 장소로서의 지명을 축제 앞에 붙이는 것은 그 축제를 단지 허공중에서나 아무 곳도 아닌 곳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닌, 오직 그 곳이어야만 하는 곳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무언가로 환원시키는, 사뭇 위대한 작명법인 셈입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찾아, 그 장소의 의미를 찾아 사람들은 모여듭니다. 물론 그 의미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기 보다 상호간의 부단한 원조와 격려로써 만들어져가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축제의 지역성은 생명력을 획득합니다. 말하자면 ‘나’에게 있어 ‘너’가 만들어지는 어마어마한 화학작용이 축제가 열리는 각 지역에서 일어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너’라는 지역으로 나는 가고, ‘너’라는 축제를 즐기러 나는 갑니다.

그러나 이 같은 지역성 문제는 실제로 따지고 보면 그다지 낭만적인 것도, 합리적인 것도 아닐 때가 많습니다.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나고 자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제2의 도시라고 하는 이곳마저도 예술의 축제가 벌어지기엔 얼마나 열악한 환경인지를. 실제로 우리나라 모든 문화 예술의 기회와 가능성은 오직 서울에만 밀집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제가 향유했던 문화의 기억은 낡디 낡은 문화회관에 가끔씩 찾아오던 클래식 연주가들, 아니면 크고 상업적인 행사를 힘입어서만 얼굴 구경을 할 수 있는 그 시절의 아이돌들이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콘서트 티켓이 풀리는 날이면 저 멀리 바다가 손톱만 하게 보이는 여학교에서 종례를 땡땡이 치고 표를 못 구할세라 와르르 언덕을 달려 내려가던 기억들.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큰 차이는 없습니다. 문화회관은 더 심하게 낡아버렸고, 새로 생긴 몇몇 극장에서는 서울에서 이미 성공을 거둔 상업 뮤지컬 같은 것만이 장기 공연으로 돈을 모으며, 지역 대학 출신 젊은 연출가의 공연을 보러 찾아간 소극장 무대에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정밀한 극사실주의 세트가 펼쳐집니다. 물론 그 같은 연극이 좋은 연극이 아니라고는 절대로 말할 수 없지만,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이 꿈꿀 수 있는 연극이라는 것의 범주가 너무도 좁다는 사실과, 그 좁은 세계 안에서 가장 진실하고 아름다운 무대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그들의 지고지순함으로 인해, 뜻 모를 애잔함이 파도처럼 가슴 속에 밀려오는 것을 저는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와 유사한 형편의 수많은 지역들에서 여름마다 축제를 벌이며 그 이름 앞에 내세우는 지역성이라는 것이 어쩌면, 그들에게 공평히 제공되지 못하고 마음껏 향유되지 못했던 ‘예술성’의 대체물일지도 모른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또 그렇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하지만.

그렇기에 홀로 꿈꾸어보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사실 영화나 미술 같이 소위 기술복제의 도마 위에 올려질 수 있는 여타의 장르들과 연극 류의 공연예술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후자는 복제될 수 없는 현장성을 지닌다는 장점이 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방대한 보급 및 분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생각했을 때 그 옛날 마차를 끌고 온 땅을 떠돌며 마을마다 연극을 선물하던 유랑극단의 위대함이 사뭇 그립게 실감납니다. 그리하여 저는 21세기의 유랑극단을 꿈꿔봅니다. 자유롭고 자비로운 유랑의 영혼들로 인하여, 지역의 지역성이라는 것이 궁핍이나 결여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니라, 단지 서울에 대한 반동적인 표어가 아니라, 골고루 함께 향유하는 풍요로움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채집된, 그 땅에 가장 알맞고 고운 열매이기를 소망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개인적으로 저는 가령 통영이라는 도시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이중섭이 생각납니다. 이중섭은 물론 제주도나 부산, 이북의 오산이나 원산 등 다른 지역들과도 인연이 깊지만, 저에게 있어서는, 가족을 다 떠나보낸 그가 쓸쓸히 위대한 그림들을 그려내었던, 몸을 파는 정다운 바닷가 처녀들이 가까이 살던, 허구헌날 바다 낙조 구경 가 바다 낙조 베껴오마고 철없는 웃음을 헤헤 웃던, 그 지역이 가장 또렷하게 중섭의 그림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마도 예술의 힘과, 그 예술을 남게 한 장소의, 자연의, 기후의, 사람의 힘이겠지요. 그런 힘들이 각 지역의 축제들로 하여 증폭될 수 있다면 좋겠노라는 꿈을 꾸어봅니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우리나라 곳곳의 지명들이 예술가의, 축제의, 작품의, 한 공연의, 또는 한 공연의 한 순간의 이름들로 화하는 날이 언젠가 무성하게 피어나기를.

그러므로 우선은, 축제를 벌여야겠지요. 축제에 가야겠습니다. 나를 기다리는 너에게로, 너라는 장소로, 너의 순간으로.

 

2012년 8월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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