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0. 16. 00:16ㆍLetter
예술가의 육체
Egon Schiele, Movement, 1913
눈 수술을 했습니다. 저 좋자고, 잘 보이자고 한 다분히 사치스런 수술이었지만 어떻게 보면 눈이 나쁜 것도 몸이 아픈 것이니 얼마만큼은 아픈 소리를 내봐도 되겠는지요. 실제로 각막이 덜 붙었다 벗겨져내려 생고생을 하기도 했고, 시력이 한참 덜 회복된 채로 컴퓨터를 붙들고 작업을 해야 했던 것도 모자라, 매일 밤 극장에 가서 자막 오퍼를 겸해야 했던 날들이었습니다. 덕분에 몸소 체득한 사실이 있었지요. 눈이 아프고, 앞이 잘 안 보이고, 심지어 자막을 필요로 하는 외국인 관객이 한 명도 없을지라도 매일 밤 예술을 보조하는 지극히 미미한 임무를 제가 기꺼이 감당했던 것처럼,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날마다 자신의 육체를 기꺼이 내어주며 살아가고, 또는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
실제로 극장의 조명 기술자는 극심한 시력 감퇴와 눈의 피로를 일평생 감수하고 살아갑니다. 어두컴컴한 극장 안에서, 강렬하고 뜨거운 조명을 만져, 관객들의 시선이 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순간 작은 장면 하나에도 의미를 불어넣고, 날마다 배우들과 새로이 호흡하며, 은밀한 빛의 지나침들을 알아보며, 아름답다, 혹은 아직도 부족하다 생각하며, 하루를 마감하고 극장 밖을 나설 때면, 밤의 도로 위를 달리는 자동차 전조등이나 가로등의 불빛에 눈이 머는 삶. 그 눈에는 매일같이 달무리가 지는 밤.
다소 낭만의 여지가 남아있는 사례를 들었습니다만, 냉정하게 말해 이 시대 모든 예술가들은 착취를 당하고 있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예술가를 위해서 그의 육체가 착취당한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그나마 예술가 자신을 위하는 일이라면 그래도 다행입니다. 당장은 아니라도 궁극에는 마침내 그를 위한 일이 될 수 있다면. 그러나 육체라는 것이 예술가 자신을 위해서도 예술을 위해서도 삶을 위해서도 아닌, 단지 사회의 구조적 병폐에 짓눌려 마구잡이로 쓰임 당한 뒤 버려지는 한낱 소모품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저어되는 마음입니다.
편안하고 일상적인 호흡을 영위하면서는 제대로 예술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사회. 그토록 자신을 몰아세워도 삶을, 사람들을 돌아볼 여유가 허락되지 않는, 그나마 예술마저도 가슴 뛰게 보람차지 않은 세상. 그리하여 ‘미처 인정받지 못한 병들고 가난한 예술가’라는 꼬리표가 요상한 정당성을 띠며 끝없이 재생산되는 현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대의 눈을 위해, 손가락을 위해, 더부룩한 위장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군요.
그대의 눈이, 손가락이, 위장이
저 홀로 견디고 있군요.
그 아름다운 육체를 지켜낼 힘을 기를 때까지,
나의 소원이 있다면
그것은 그대가 살아 있는 것.
힘들겠지만 되도록
아프지 않은 몸으로,
예술만큼이나 스스로를 소중히 여기는
건강한 마음으로.
2012년 10월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지혜로운 늑대의 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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