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5월 레터] 마음의 가난

2012. 5. 6. 15:39Letter

 

마음의 가난

 

소원을 빌러 떠나는 아이들. 맨 오른쪽 남자아이가 앞으로 둘러 맨 가방 안에 죽은 강아지의 시체가 들어있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누구일까? [사진 = 네이버 영화]

 

버거운 시기입니다. 모두들 가난합니다. 하물며 예술가들이야. 사실 예술가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줄곧 가난했습니다. 낭만주의 시대 천재론을 능가하는 예술가 가난론이 등장해야 할 판입니다. ‘예술가란 신비적 직관이나 영감에 의존하는 천재’라는 믿음보다 ‘예술가는 가난한 사람’이란 가설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으니까요. 어쨌든 가난은 늘 예술가들의 화두였습니다. 가난을 주제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가난한 작업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가난을 불평하거나 가난으로 무장하여 그것을 도구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의, 또는 자신의 가난에 대해 각종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가난하다고. 그리고 가끔은 그 말들이 가난보다 넘쳐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난하다는 건 대체 뭔가요? 돈이 없다는 것인가요? 아니면 돈이 없기 때문에 무언가가 결핍되었다는 뜻인가요? 또는 돈은 있는데 무언가가 결핍된 것도 가난이라 할 수 있나요? 아니면 가난이란, 돈이 없기 때문에 혹은 무언가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대신 다른 무언가를 소유한 상태를 일컫는 말인가요?

철학자 랑시에르(Rancière)에게 있어 ‘가난한 자’는 질서(로고스)로부터 소외되어 셈해지지 않는 자, 그리하여 어떤 몫도 갖지 못하며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자입니다. 이때 질서에서 배제된 그들의 말은 단지 하나의 웅얼거림에 불과하지요.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근본적으로 언어(로고스)를 소유했다는 평등의 조건을 힘입어, 언제든지 새로운 감성의 질서를 세우고 거기서 다시금 말을 회복할 수 있는 자이기도 합니다. 랑시에르는 가난한 자들 속에 내재한 이 이중적 구도로부터 정치(민주주의)가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랑시에르에게 가난이 ‘물질적 궁핍으로서의 실제’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이었듯, 저에게도 가난은 개념입니다. 일종의 마음의 개념이지요. 물론 예술가들이 실제적으로 궁핍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가난이 그들의 작품 활동에 커다란 걸림돌이 되고, 그들에게서 작업의 기반인 물질적 요소들 뿐 아니라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들마저도 앗아가 버린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 역시 어쩌다보니 예술 중에서도 가장 가난하다는 연극계에 발을 담그게 되어, 원고지 한 장에 이천원씩 받고 번역도 하고 글도 쓰며 살고 있습니다. 이곳이 가난한 예술계라는 이유로 찍 소리도 못 내고 말입니다. 가난하다는데 어쩔 수 있습니까. 그래서 가난은 무기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 무기가 없다면 미안하지만 수많은 연극들은 지금만큼도 스스로를 (실제적으로든 예술적으로든) 지탱하지 못할 것이며, 냉정한 예술적 잣대로만 가차 없이 평가받아 우수수 져버리고 말 것입니다. 똑같이 무기가 있어도 그것을 위시하며 휘두르는 자가 있고 아닌 자가 있기에 전자를 향해서 감히 내뱉는 말입니다.

그래서 소망하건대, 그 무기를 예술가답게 예술로써 다듬을 줄 알고 또 때로는 스스로를 향해 칼날을 돌려 세워볼 줄도 아는 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가난 때문에 정작 예술이 헐벗지 말고 예술가들의 마음이 가난하고 낮고 아름다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들이 각자 더 이상 가난하지 않게 되는 날을 맞더라도 마음의 가난만은 잃지 않기를 바랍니다.

저에게 있어 가난이라는 개념은, 세상의 모든 모순과 역설과 이중성을 고스란히 응시하고 껴안아 겪어낼 수 있는, 그런 낮고 낮은 마음입니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면, 새로 개통한 신칸센 열차가 양쪽 방향에서 오다가 서로 만나게 되는 한 지점에서 기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그곳으로 소원을 빌러 떠나는 아이들이 나옵니다. 그 중 한 남자아이는 이치로 같은 야구선수가 되고 싶은데, 너무 너무 싫어 절대 먹지 않는 카레를 이치로가 매일 먹었다는 이야기에 절망하여, 이제부터 카레를 잘 먹을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려 합니다. 그런데 결전의 날, 한참을 늦게 터덜터덜 약속 장소로 걸어온 그 아이의 가방 안에는 방금 죽어 아직 따뜻한 강아지 한 마리가 들어 있습니다. 아이는 야구선수는 안 되어도 좋으니 강아지를 살려달라는 걸로 소원을 바꿔야겠다며 기어이 그 시체를 안고 기차를 탑니다. 그리고 갖은 곡절 끝에 아이들은 그 순간 그 장소에 도달합니다. 두 대의 기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동안 고래고래 허공중에 꽃잎처럼 흩어지던 그들의 외침. 홀가분한 마음으로 모두들 돌아서는데, 그 아이만 걸음을 옮기다 조용히 가방을 들여다봅니다. 함께 가던 친구가 묻습니다. “여기 묻어주고 갈까?” 그 아이가 담담히 대답합니다. “아니, 우리 집 마당에 묻을래.” 소원을 비는 것도 진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을 아는 것도 진심. 아이의, 어마어마한, 티 없는, 마음의 크기. 가난하다는 것은, 그런 거였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2월, 아빠가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 보름을 꼬박 병원에서 함께 보내는 동안 인디언밥은 새로운 3월을 준비하고 있었고요. 저는 소위 ‘가난한 예술’이라 표상되는 독립예술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였습니다. 골수를 짓누르는 암 덩어리 때문에 어마어마한 통증으로 힘들어하시던 아빠를 보며 저의 바람은 아빠가 얼른 편안해지셨으면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하루하루 순간순간 맑아지기도 하는 아빠의 눈빛을 보며 혹시 나아지시진 않을까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소원하기도 하였습니다. 실로 그 두 가지 마음이 팽팽히 간절했던, 그 모두가 온전히 진심이던 날들이었습니다. 돌아가시던 밤도 그랬습니다. 의식 없이 너무 심하게 앓고 계셨기에 이제 그만 편히 잠드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끝없이 심전도를 곁눈질하다가도, 산소포화도가 급격히 떨어지면 자동적으로 호흡기를 갖다 댈 수밖에 없던, 어지럽고 혼미한 마음들, 길고 긴 순간들. 가난한 예술가들이란 그런 순간을, 그런 마음을 이해하는 자들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마음의 가난이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절박함이 아닐는지요. 더 이상 가난해지지 않으려는 절박함이 아니라, (불행히도) 바로 그 가난 때문에 그 순간 소유하게 된 가장 절박하고 진실한 시선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한 번 불행히도) 진실은 대개 모순적입니다. 사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지금 사는 동네의 화산이 폭발해서 다시 엄마 아빠 동생과 모두 함께 살게 되었으면 하는, 누구보다 간절한 소원이 있습니다. 기적 여행을 처음부터 계획했던 것도 바로 그 아이였고요. 그런데 마지막 순간, 모두들 고래고래 소원을 외치던 그 순간에, 아이는 침묵합니다. 입도 벙긋 못하고 돌처럼 굳어서, 기차가 지나가는 동안, 꽃잎이 흔들리는 동안, 아이는 침묵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전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 순간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여러분은 진정, 가난하신가요?

 

2012년 5월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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