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밥 6월 레터] 야구와 연극

 

야구와 연극

 

[지난 봄, 시범경기가 열리는 한가로운 평일 오후의 청주 구장]

가령 이런 장면을 떠올려봅니다. 경기의 흐름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순간, 타자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어깨 너머 배트로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수비수들과 주자들은 두 다리 가득 무게를 실어 다음 순간의 재빠른 동작을 준비하며, 마침내 공기 중에 팽배한 에너지를 끌어올려, 이어지는 투수의 와인드업. 뜨거운 한낮의 태양 아래서나 짙게 드리운 석양 아래서 또는 눈부신 밤의 조명 아래서, 관중들이 일제히 숨을 죽이고, 손에 땀을 쥐며, 또 누군가는 목청껏 소리를 지르는 장면. 그 몸들의 긴장, 숨 막히게 아름다운 한 순간. 그리고 그 순간이 매일 저녁마다 끝없이 되풀이된다는 사실. 그런데 또 여기에 더해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일 그 순간 갑자기 포수와 타자가 벌떡 일어나 장비들을 던지고 함께 탱고를 추기 시작한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울까.

물론 그라운드 위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야 일어나지 않겠지마는, 탱고에 버금가는 아름다운 사건은 언제나 발생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아름다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야구의 오랜 역사를 통해 획득된, 정확하게 그 동작일 수밖에 없는 치밀한 원리들에 따라 배트를 휘두르고 공을 던지며 슬라이딩을 하는 선수들의 육체의 진실함일까요. 아니면 그 진실을 한 순간 무너뜨리고 배어나오는, 에너지의 과잉된 쏠림으로부터 별안간 아름다움이 발생하는 것일까요. 혹은 그 둘의 공존, 그것이 아름다움일까요. 흔히 야구를 일컬어 ‘각본 없는 드라마’ 라는 말을 합니다. 예견할 수 없고 규정할 수 없는 요소들에 따라 일순 모든 인과가 뒤집혀버릴 수 있다는 것, 그 우연성이야말로 가장 극적인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야구만큼 규칙이나 기록을 중요시하는 스포츠도 없거든요. 실로 예측 가능한 것과 예측 불가능한 것의 절묘한 혼재, 그것이 바로 야구이고, 또 연극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앞 사진의 바로 다음 순간, 제가 응원하던 타자는 아웃을 당한 뒤 덕아웃으로 종종걸음쳐 들어가고 있습니다]

메이저리그의 한 감독은 말했습니다. “1년 중에 가장 슬픈 날은 야구가 끝나는 날” 이라고. 만일 그 날의 슬픔이 공감될 수 있다면 그것은 1년 중 대부분의 시간 동안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야구와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범 경기, 정규 리그, 그리고 포스트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우리가 보건 보지 않건 매일 저녁 야구 경기는 진행됩니다. (물론 그 후 겨울이 찾아오면 팬들이 두런두런 난롯가에 모여 앉아 FA시장 소식이나 내년 시즌 각 팀 전력에 대해 수다를 떠는 ‘스토브리그’가 펼쳐집니다. 선수들은 결혼식을 올리거나 시상식에 참여했다가 곧 따뜻한 곳으로 스프링캠프를 떠나고요. 그러므로 야구는 결코 어떤 순간에도 완전히 ‘끝나지’ 않습니다.) 마치 연극이 그러한 것처럼 말입니다. 예컨대 매일 저녁 반복되는 어떤 것, 날마다 다시 무대 위에서, 경기장에서, 생을 획득했다가 소멸해버리는 무언가. 그에 일희일비하고 모든 것을 쏟을 듯 들썩이지만 결국 우리들이 버리고 일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사실 선수들에게나 배우들에게도 야구나 연극은 일상일 뿐,) 그랬다가 또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우리를 다시 초청하여 눈앞에서 처음처럼 되풀이되는 것들. 다시 살고 다시 죽는 경이로운 순간들. 그 우직한 어김없음 가운데서 끝없이 고개를 쳐드는 기적들.

[2011 아비뇽 연극제, 잔디밭 무대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한편 연극에서 배우의 몸짓 하나에 의해 전체 극의 색채가 일변할 수 있듯이, 야구에서도 공 하나에 의해 모든 시공이 뒤집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 하나, 몸짓 하나 속에는, 끝없이 점쳐졌으나 끝내 선택받지 못한 여타의 무수한 가능성들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공 하나, 몸짓 하나를 보는 것은 저 수많은 다른 공들과 몸짓들의 잠재태를 함께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알면 알수록 연극이나 야구의 언어는 무한한 듯합니다. 이는 절망이기도 하며 매혹이기도 한 소식이지요. 그리고 다행스러운 것은 그토록 어지러울 만치 얽혀 있는 언어들과 그 속에 숨겨진 아름다움들에 대해 매순간 몰입하거나 거리를 취하는 결정권이 관중에게 놓여있다는 사실입니다. 주지하듯 연극이나 야구는 전적으로 평이한 하나의 에너지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몇 겹의 에너지, 몇 겹의 굴곡들이 교차하며 진행되지요. 그에 따라 관중은 저마다 자신의 리듬에 맞추어 동화와 이화의 완급조절을 행하게 되고요. (예컨대 응원하는 팀이 초반부터 큰 점수 차로 이기고 있는 경기를 볼 때는 한 없이 느긋하게, 경기 외적인 소소함들에 마음껏 마음을 팔며 산만해지다가, 갑자기 귀신같은 실책과 실점이 이어지기 시작하면 문득 정신을 차리고는 그때까지의 해이함을 뉘우치며 열렬한 응원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경기, 하나의 공연 속에는 무한한 스펙트럼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이는 일상의 스펙트럼으로까지도 다채롭게 확장되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여름의 일요일 오후, 바르샤바의 쇼팽 공원에서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들]

그런데 야구는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끝으로 올림픽 공식경기종목에서 제외되었습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겨우 처음 정식 토너먼트 경기로 인정되었던 데 비하면 퍽이나 짧은 역사였지요. 여성 경기가 치러질 수 없고, 야구가 성행하거나 프로야구 리그가 존재하는 국가가 너무 제한적이라는 점 등이 표면적인 이유로 제기되었습니다. 사실 지금 우리에게 이토록 열렬한 야구를 유럽 사람들만 해도 전혀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그리고 ‘모른다’는 것은 ‘볼 수 없다’는 것으로 이어지지요. 까막눈인 사람이 글을 읽지 못하는 것처럼, 규칙을 하나도 모르는(가령 선수가 몇 명인지, 한 회에 아웃카운트가 몇 개인지, 스트라이크가 뭐고 볼이 뭐고 안타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은 야구 경기를 야구 경기로서 볼 수가 없고, 그에 조금도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흥미롭지 않다는 것은, 야구를 좋아하는 자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을, 야구에 관한 지극히 사적인 역사가 결여되어있다는 것의 반증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어떤 나라에서는, 야구를 모르는, 야구가 없는 삶이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 공백을 해소할 힘이 단지 “아니야, 이것 좀 봐, 이게 얼마나 재미있는데!” 하는 허황된 외침에서는 결코 나올 수 없다는 점입니다. 무지를, 무관심을, 허무를 메우는 일이, 어디 그리 간단하고 쉬운 일이겠는지요.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라는 소설은 야구가 사라져버린 세계를 상정합니다. 야구가 사라져버렸을 뿐 아니라, 결코 회자되지도 기억되지도 않는 세계. 그런 세계가 절대로 도래하지 않을 것이라고, 어느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는 연극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머지않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지요. 연극이 사라져버린, 누구도 연극을 모르는 세계. 헌데 그 세계가 슬픈 것은, 아마도 ‘야구’나 ‘연극’이 사라진 탓이기보다, 야구에 대한, 연극에 대한 모든 사적인 역사와 만남과 감각들이 사라져 버린 탓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행히도 아직 야구와 연극이 존재하는 곳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한 가지 남은 일이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영원히, 진실하게, 사람에게, 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일이 아니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가장 가슴 떨리는, 밤의 야구장]

 

2012년 6월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위원

지혜로운 늑대의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