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를 말하다] 축제와 나,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12. 8. 14. 01:01Review

▲2005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몽유열정가" 포스터

 

프린지와 나, 나와 축제

"그냥 즐겨, 프린지!"

 

똥개(2005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자원활동가)

 

요즘 아침 출근하고 저녁 퇴근의 패턴으로 살아가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나로서는 의자에 목을 기대고 눈을 감아 프린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결핍된 영양소를 섭취하는 것과 같은 효과로 나타난다. 거짓말처럼.(거짓말일 수도 있다)

홍대 앞 프린지

서울에 올라와서 대학을 다니면서 제일 놀라웠던 사실은 서울 전체가 ‘시내’의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보통 지방에서는 ‘시내’라고 불리는 번화가 또는 유흥가의 경우 1-2곳으로 압축되기 나름인데, 서울은 사방팔방이 ‘시내’였다. 적응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그 중 한곳이 홍대였다. 이곳은 클럽과 젊은이들이 즐기는 유흥문화가 발달한 곳이자, 독특한 창작의 시발점이라는 복합적인 지역적 특징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으며, 내가 가장 ‘촌티’가 나는 것만 같은 곳이었다. 당시 촌놈이었던 나에게 다수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가장 촌티가 나지 않게 놀 수 있게 해준 곳이 ‘프린지페스티벌’이었다. 당시에는 자원활동인증서가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그저 홍대라는 공간에서 눈치안보며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그럴싸한 근거가 필요했던 것이다.(생각해보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인디스트들도 비슷한 이유였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여튼 그렇게 2005년의 여름에 나를 홍대 앞 프린지로 런칭시켰다. 이 때까지만 해도 프린지가 나에게 미칠 영향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미 사건은 시작되었다.

 

 

프린지로 착하게(?) 일탈한다

고등학교의 도제식교육을 받다가 대학에 들어온 많은 젊은이들은 그들만의 일탈을 꿈꾼다. 나 역시 그러한 일탈을 간질간질하게 꿈꾸곤 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점점 나는 평범 이하의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당시 서울로 대학생활을 하러 오기 때문에 ‘서울스타일’로 변한다며 머리를 노랗게(지금으로 치면 갈색) 물들이고 온 촌놈으로서는 일탈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것이 가능한 곳이 ‘프린지’였다. ‘내가 웃기면 웃어주고, 뇌를 거치지 않은 모든 행동이 용서가 되는 곳’ 그것이 바로 축제성이었다. 점점 나는 흥에 겨워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오버스럽게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점점 평범함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던 것 같다. 음악이 나오면 몸을 흔들고, 심심할땐 노래를 큰소리로 부르고, 사람들에게 뻔뻔한 얼굴로 축제를 알리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이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평범함일지도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에게는 굉장한 파격이었다. 그렇다고 음란한 일탈을 즐기는 것도 아니었으니, 이것은 ‘착한 일탈’이라고 할 수 있었다.

 

▲2005 서울프린지페스티벌에 폐막식, 한마디를 하고 있는 필자

 

프린지에서는 모두가 주인이다

보통의 축제의 경우에는 어떤 작품이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나며, 분석적으로 관람하고 그것을 전문적으로 평론해야만 하는 곳이 많다. 그렇지만, 프린지에서는 용기만 있다면 얼마든지 박수를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아티스트 뿐 아니라 관객과 인디스트에게도 해당이 된다. 아티스트와 관객과 인디스트의 경계가 없는 프린지에서는 누구나 다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 당시의 홍보마케팅팀에서는 홍보에 쓸 노래를 만들어내기도 했고, 안무도 하였다. 이미 멋진 Site Specific 공연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매일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공연을 하는 인디스트들은 이미 아티스트였다. 이렇게 프린지의 인디스트들은 공연을 홍보하거나, 일손을 돕는 일반적인 자원활동의 영역을 넘어서 창작을 고민하고, 작품을 만들어내는 ‘프린지메이커’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더 나아가 함께한 인디스트들은 자율적으로 진정한 창작을 고민하는 진지한 아티스트로 거듭났다. 스스로 프로듀싱 하는 것에 뿌리는 둔 ‘독립예술’을 지향하는 프린지페스티벌에서의 진정한 의미는 인디스트들이 만들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축제의 꽃, 인디스트 단체사진

 

프린지는 프린지다.

프린지 자원활동인증서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다. 프린지는 프린지 자체였고, 마음속에 기억되어 있기 때문에 서면으로 인증된 문서가 필요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새로운 일탈을 맛보게 해주었고, 상상의 가능성을 열어주었으며, 즐거움을 주었다. 나에게 홍대라는 공간은 프린지로 각인되었으며, 축제라는 이름도 프린지로 대변된다. 그만큼 프린지가 나에게 준 영향은 상상이상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프린지는 무형적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인디스트로 참여했던 사람들이 아티스트로 활동하는 경우도 많으며, 그 당시의 기억을 원동력으로 문화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시간이 지나면 문화계에는 프린지를 경험한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구별 될 수도 있다는 무모한 생각도 잠시해본다.

▲2005 서울프린지페스티벌기간 중 필자가 등장한 화제 영상

 

프린지에서 놀자

프린지는 얻어갈 것이 많은 곳이다. 그리고 사람을 낳는 곳이다. 축제가 잠시의 즐거움이 아니라 새로운 창조인력을 배출하는 기특한 역할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프린지페스티벌이 오랫동안 존재해야하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즐길 수 있는자 프린지로 오라, 그냥 즐겨라. 그리고 놀라지 말길 곧 달라져있는 당신을 발견할 것이다. 함께라면 가능하다. 그게 바로 프린지다. (우황청심환은 약국에서 판다. 심약한 사람은 프린지를 즐기기 전에 복용하는 것도 좋다.)

 

   (****** 인디스트는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의 자원활동가의 공식 명칭이며 "indi+st" 로 '독립예술'과 '-하는 사람' 의 합성어이다. 인디스트 제도는 독립예술제 초창기부터 2012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필자_똥개

 소개_지금은 평범한 직장인 / 2005년 인디스트, 전 거문고팩토리 프로듀서, 고양문화재단 공연사업팀 사원 

 

 2005년 서울프린지 페스티벌은 고성방가(음악), 내부공사(미술전시), 암중모색(독립영화), 이구동성(실내공연), 중구난방(야외공연) 등 다양한 예술장르를 보여주었던 독립예술축제였다. 2005년은 문화계에 있어서 럭스&카우치 사건으로 인해 홍대앞 인디문화에 대한 사회적인 비판이 강했던 시기였는데,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역시 그로인한 견제를 피할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5년 서울프린지 페스티벌은 아시아 인디문화의 교류를 시도하였고, 신진 예술가들을 발굴하는 성과를 보였다. 당시 주목받았던 신인으로는 드림플레이의 김재엽 연출가와 12언어 연극스튜디오의 성기웅 연출가 등을 꼽을 수 있다. 홍대 일대의 20여개 실내외공연장과 전시장 그리고 야외거리에서 벌어졌으며, 297개의 문화예술단체 및 개인이 참가하였다. 축제 관람객은 사무국 추산 158,672명었다.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축제 홈페이지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