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연애사색극 <영원한 너> - 너에게

2012. 7. 21. 17:01Review

연애사색극 <영원한 너>

너에게

정영훈 작/ 박해성 연출/상상만발극장

 

 글_영균

 

간혹 제목만으로도 큰 울림을 주는 작품이 있어. 이만희의 희곡 <아름다운 거리>라든가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과 같은. 지난주에 본 연극 <영원한 너>가 바로 그런 작품이었어. ‘영원’이라는 단어를 소리 내어 읽으면 입안에 동그라미가 가득차서 풍선껌을 부는 듯한 느낌이 들어. 영원한, 너. 제목만 들어도 가슴에 와 부딪히고 가는 무언가가 있지 않아?

공연은 아르코 소극장에서 올랐어. 비가 추적추적 내렸는데, 붉은 벽돌로 지어진 극장 건물이 여름비와 참 잘 어울려. 하늘과 맞닿은 날선 건물의 경계가 비에 젖어 쭈글쭈글 분 것 같이 보이던 건 착각이겠지.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로 문을 휘 열어놓은 가게와 북적북적한 사람들로 가득 찬 혜화동이 한 소절 빗줄기로 식고 나서야 비로소 거리의 얼굴이 보이더라.

 

 

공연엔 여자와 남자가 각각 세 명씩 등장해. 이들은 다른 인물이라기보다는 다만 각기 다른 상황을 만난‘여자와 남자’ 또는 ‘너(나)와 나(너)’라 해야 좋을 것 같아. 이 여섯 명의 사람들은 서로서로 엇갈리면서 머무르거나 혹은 갇히게 되는‘어떠한 상황’들을 빚어내는데, 이 상황들은 우리가 한 번쯤은 경험했거나 주위 친구들을 통해서 들어본 이야기였어. 물론 완벽하게 똑같다고는 할 수 없을 거야. 다만 그때 우리의 반응들, 우리 마음에 새겨진 기억들이 닮았다는 뜻이었어.

무대는 가로가 세로에 비해 많이 길었는데, 어느 정도냐 하면 A4용지를 반으로 접었을 때, 그 느낌. 뭔지 알겠니? 이렇게 생긴 무대 바닥에 흰 색 줄이 여럿 그어져 있었고 그 중간 중간엔 마찬가지로 흰색의 허들 또는 평형대 같은 것이 몇 개 있었어. 배우들은 음표처럼 이 선 위를 뛰어다니고, 하얀 선은 이들이 빚어낸 열네 개의 이야기로 빠짐없이 꿰매어졌어. 연극은 배우의 입을 통해서 이야기라는 실을 뽑아내는 거미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구나. 예쁘고도 튼튼한 거미집을 짓기가 쉽지 않은 것처럼 연극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튼 너도 봤겠지만, 이 작품은 ‘연애 사색극’이라고 하더라구. 작품에서 사색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졌어. 덕분에 여섯 배우의 입이 분주했지. 모호한 듯이 길게 펼쳐지는 대사들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고, 너무 긴가 싶다가도 때때로 함축적이기도 했어. 그래도 사이사이에 힘 있게 박혀 들어간 몇몇 단어들 덕분에 조금 숨통이 트였어. 뛰어다니거나 자전거를 탄다든가 하는 움직임도 많이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 사색을 도모하는 방법은 어디까지나 언어여서, 행동은 언어의 사색의 역할을 나눠가지는 대신에 배우를 이리저리 옮겨주는 ‘들것’ 같았어.

이런 대사가 있어 "왜 난, 내가 될 수밖에 없을까."/"왜 난, 나로 떨어져 나올 수밖에 없을까."/"영원히, 너의 너가 되고 싶었는데."/"영원한, 너의 너." 가장 기억에 남는 대사이기도 해.

사람은 자기 자신에 변화에 대해서는 무디면서도 다른 이의 변화에 대해서는 민감한 것 같아, 두려워하기도 하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내 눈앞에 상대가 변했다면, 그건 단지 상대 혼자만의 변화는 아닐 거야. 그 상대를 바라보는 나의 눈도 함께 바뀐 거겠지. 늘 얼굴을 보던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고 해도 그가 내게 등 돌린 것이 아닐지도 몰라. 바뀐 것은 나의 선 자리. 그 사람을 바라보던 내 자리의 변화일지 모르지. 마치 무대 정중앙에 서있는 그 남자를 오른쪽 끝에서 왼쪽 끝으로, 무대 앞에서 뒤로 뛰어다니며 응시하던 그 여자가 그러했듯이.

 

 

나를 포함해서 많은 이들이 ‘처음’이라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 만큼이나 ‘마지막’에 집착해. 마찬가지로 ‘순간’에 주목하는 만큼 모든 것에게 ‘영원’을 기대하는 것 같고. 결국 우리는 처음에서 마지막을, 마지막에서 처음을, 순간에서 영원을, 영원에서 순간을 기대하는 꼬리 물기 놀이 같은 걸 하고 있는 거야.

여러 사색은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고 말아. 하지만 그 여정이 헛수고라는 뜻은 아니야. 보거나 듣는 것으로 혹은 말하는 것으로는 끝끝내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어. 오직 발로 걸어야 느낄 수 있는 여행처럼. 과정은 언제나 중요한 거니까.

 

 

<영원한 너>는‘너’를 영원한 존재로 간직하고 싶은 이들의 이야기로 출발하지만, 결국 너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반사되는 나를 돌아보게 되는 이야기야. ‘너’가 ‘내’가 되길 바라면서도, 그리고 ‘내’가 ‘너’가 되길 바라면서도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 우린 나와 너가 될 수 있을까? 나의 너, 너의 나가 아니라. 시간이 지나서 변화하는 서로를 수긍하고 따라잡을 수가 있을까?‘너’의 영원함을 꿈꾸기 위해서는 먼저 단단한 내가 존재해야 할 거야. 그래야만 너를‘영원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영원한 ‘내 것’으로 하지 못해 상처 받는 사람이 되지 않을 수가 있겠지.

 

 

  필자_ 영균

  소개_ "영균아 넌 천사야, 아주 많이 웃긴"

           이라는 말이 세상에서 들어본 칭찬중 가장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사진제공 : 상상만발극장 (1.2.3.4.5.6)

 

 [작품소개]

“난 네가 아파”

사랑했던 순간의 기억. 가슴 떨리던, 가슴 저리던 순간들을 씁쓸한 듯 유쾌하게 꺼내어보는 연애사색극.

사랑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이후에 기억 속에 묻혀버리는 치명적인 순간이 있다. <영원한 너>는 우리의 그 가슴 떨리는, 그 가슴 저리는 순간들을 씁쓸한 듯 유쾌하게 꺼내어보는 연극이다.

작품은 관계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데서 시작한다. 뒤이어, 연결되어 이어지는 듯, 이어지지 않는 별개의 장면인 듯 나열되는 열 두 개의 관계의 편린들은 말과 움직임, 음악적 패턴과 날카로운 상황 등 다양하고 자유로운 무대적 확장으로 채워져 때로는 시어처럼 나직하게, 때로는 유쾌하고 통렬하게, 또는 가슴저리는 음악처럼 펼쳐지다 다시 처음의 화두로 수렴된다.

재현적 상황을 넘어서 정서적 공간과 사유적 공간으로까지 극장을 확장하는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하게 구현하는 바는, 각 장면을 형성하는 인물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순간들이다. 우리 기억과 정서 속에 묻혀있으나 누구나 다 지나쳐왔던, 그 치명적인, 가슴 떨리는, 가슴 저리는, 울림들.

[기획의도]

<영원한 너>는 기억 속에 잠재된 사랑의 편린들을 무대 위에 늘여 놓는다. 구체적인 상황이 제시되지 않는 무대 연출을 통해서도 관객들은 충분히 이 보편적이면서 특수한 상황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살아가며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공통의 이야기 속에는 가슴 속에 묻혀야만 하는 각기 다른 기억들이 존재한다. 공연은 이러한 기억들을 따라 들어가며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사람과의 관계를 바라보게끔 한다. 관객들은 공연을 통해 기억을 쫓아 사랑의 관계를, 그 영원한 타자에 대한 사랑의 순간들을 꺼내어 보게 될 것이다.

[아티스트]

상상만발극장은 드라마터그, 작가, 디자이너, 연출, 배우들이 모여 2008년 결성한 작업공동체로, 지금의 세계를 끊임없이 응시하고 그것을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연결시켜 풀어나가는 주제적 일관성을 세련된 형식과 극장적으로 확장된 무대언어를 통해 진화시키고 있는 역동적인 단체입니다.

<타이터스>2012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국내초청, 2009 CJ영페스티벌 우수창작상 수상

<아이에게 말하세요>2011 NArT Festival 場 초청작, 2010 서울연극올림픽 공모선정작

<십이분의 일>2009 제1회Project Bigboy 선정작, 제46회 동아연극상 심사위원추천

*** 공연정보 출처 - 한국공연예술센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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