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실용서로 읽다

2012. 11. 15. 00:34Review

 

눈먼 희망의 시대

- 한병철의 「피로사회」를 실용서로 읽다

글_김종우

 

 

1. 들어가기

한병철의 ‘피로사회’에서는 이 시대를 ‘긍정성 과잉’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긍정성 과잉의 시대란 더 이상 ‘무엇무엇 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부정적 규율사회가 아니라, 스스로 ‘무엇무엇 해야 한다’고 믿게 만드는 긍정적 ‘성과사회’다. 한병철은 책에서 이 시대를 그렇게 정의한 뒤, 그런 사회에서는 주체가 ‘자기 착취’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P.29)

나는 책을 읽고, 이 ‘피로사회’라는 필터로 나와 주변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두 친구 P와 Q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를 P와 Q라는 개별사례에 적용하는 것으로, 다분히 실용적인 관점에서 이 책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가 P와 일반인 Q라는 두 명의 친구에 대한 대략적인 신상을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P : 서른을 갓 넘긴 남자. 대학에서 글쓰기를 공부하고, 현재는 대학원에서 미학을 전공하고 있다. 소설을 쓰며, 서울 한복판에 혼자 살고 있는 얼리 어답터(early adopter)다. 나름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먹고 살 걱정은 없으나, 글쓰기에 대한 고민만으로도 생이 버겁다.

Q : 역시 서른을 갓 넘긴 남자. 명문대 공대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기업에 입사. 스물여덟에 동갑내기 공무원과 결혼하여 돌이 된 아들을 두고 있다. 위성도시에 살며 현재는 육아에 전념하고 있지만, 짬이 날 때면 여러 가지 취미를 즐긴다. 물론 그의 어릴 적 꿈이 대기업 사원은 아니었다.

 

▲Félix González-Torres, Untitled (Perfect Lovers), 1991

 

2. 진단

P의 경우 : P는 글을 쓴다. 그리고 아주 가끔 학교에서 수업을 듣는다. 쓰고 있는 소설을 마무리 짓기 위해 잠시 논문을 미루고 있는 탓에 마지막 학기임에도 그는 그리 바쁘지 않다. P는 거의 집에서 나오지 않고 하루 혹은 일주일을 보낸다. 커다란 마트가 딸린 주상복합 아파트에서 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있으면 추리닝 차림으로 잠깐 마트에 내려갔다 오면 된다. 밥 때가 되면 근처의 도시락집에 배달을 시키거나 마트에서 사온 인스턴트 음식으로 끼니를 때운다. 그리고 그는 소설을 쓴다. P에게 있어 소설은 허황된 꿈이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에게 소설은 삶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이 지금 P의 삶을 얽매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그는 노동에서 자유롭고, 그래서 하얗고 고운 손을 가지고 있다.

그렇지만 P는 늘 피로하다. 그를 잠깐 본 사람들은 그가 가진 ‘삶의 여유로움’을 부러워하거나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런 부분이 있다. 누구나 P가 가질 수 있는 만큼의 시간을 가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삶에서 그것은 인간의 행복을 전적으로 좌우할 수 있다. 때문에 P가 가진 것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그가 배부르다고 말할 수도 있다. 허나 대신 살아보기 전에는 그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P는 글을 쓰고 또 쓴다. 하루의 대부분을 그는 어떤 의미에서 ‘노동’에 할당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노동이 아니라, 그저 부르주아의 허영에 관계된 것이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허나 ‘피로하다’라는 의미에서 그것은 근본적으로 같다. 누가 P에게 그토록 쓰기를 강요하였는가. 친구들은 그에게 충고한다. 여행을 가라. 유학을 가라. 혹은 취미를 즐겨라. 물론 P는 그 모든 것을 할 수 있을만한 충분한 여건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친구들은 자신은 하지 못하지만 P에게는 충분히 가능한 어떤 것을 P에게 권한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P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도대체 왜? 써야하기 때문이다. P는 글을 쓴다는 것 안에서만큼은 ‘자기 착취’적이다. 그는 마치 지금 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린다. 때문에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여유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P의 내부에서는 말한다. 할 수 있어. 쓰고 또 쓰다보면 결국 좋은 걸 완성해낼 수 있어.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의 동료들 중 몇몇은 이미 저만치 가있다. 물론 그것이 그를 몹시 좌절하게 만든다. P는 필연적으로 열등감을 느낀다. 허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여전히 ‘쓰는 것’뿐이다. 때문에 P는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여행도 가지 못하고, 취미생활도 즐기지 못한다. 이 ‘할 수 있다’, ‘해내야만 한다’는 ‘긍정성’이 결국 그를 피로하게 만드는 것이다.

 

Q의 경우 : Q는 직장에 다닌다. 대기업 사원으로 대리급 대우를 받고 있다. 대학시절 그는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다. Q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공대생답지 않은 가늘고 긴 손을 가지고 있었고, 그 손만큼이나 섬세한 선들을 쏟아냈다. 한마디로 Q는 전형적인 예술가 타입이었다. 음악과 소설과 시와 영화가 그에게 창조성의 밑바탕이 되는 풍부한 상상력을 키워주었다. 그러나 군대를 제대한 후 그는 학업에 열중했다. 기계를 만지고 설계하고, 이런저런 학내의 프로젝트들을 수행했다. 대한민국의 남자들이 대부분 그렇듯, 그 또한 군대라는 터널을 지나면서 자연스레 ‘현실적’이 되어버렸다. 장남이라는 굴레와 나이와 주위의 친구들과 또 이런저런 말들이 그에게 현실을 가르쳤다. Q는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어느 대기업에서 뽑는 장학생이 되었다. 장학생의 조건은 졸업 후에 반드시 그 회사에 입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Q는 그것으로 장학금과 미래를 동시에 얻었다. 그럼에도 Q는 계속 그림을 그렸다. 기타도 치고 자전거도 타고 봉사활동도 하다가, 어느 날 여자를 만나 연애를 시작했다. 그가 스물여덟이란 조금은 이른 나이에 결혼을 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현실적이 된 후로 Q는 늘 안정적인 삶을 원했다. 예술적 취향은 변함이 없었지만, 그것은 취향으로만 남겨두었다. 사실 그러한 취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안정적 삶과 거기에서 나오는 여유가 필수적이다. Q는 아마도 당연한 선택을 한 것이리라.

Q는 몇 년 간 아이를 낳지 않았다. 그건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기보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말이다. 현 시대에서 부모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성과 불가해함을 동시에 직면하는 일이다. 그것은 인생이라는 심연을 더욱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한 길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스스로의 삶 - 아직 어리고 그렇기에 가능성이 풍부한 삶에서 점점 멀어지는 길이기도 하다. 그런 두려움에 휩싸여 Q는 한때 평생을 아이 없이 살아볼까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었다. 허나 그의 삶에서 아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마치 명문대와 대기업과 결혼이 그랬던 것처럼.

Q는 아들을 낳았다. 그것이 그의 인생을 더욱 공고히 만들었다. Q는 이제 ‘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무언가를 부정하는 것은 이제 그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Q의 취미는 자전거타기였다. 그것은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전거 타기는 Q에게서 긍정성을 유예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나면 그는 피로했다. 그러나 그것은 ‘일상의 피로’와는 다른 ‘근본적 피로’였다. 그 순간만큼은 자전거를 타는 것 외에 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허나 이제 그는 자전거를 타지 못한다. Q는 더 열심히 살아야 하고,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 긍정성이 ‘피로사회’의 한복판에 그를 서있게 만드는 것이다.

 

▲Félix González-Torres, Untitled (Bed), 1991

 

3. 적용

P와 Q의 경우를 살펴보았을 때 시대를 바라보는 한병철의 관점은 굉장히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를 긍정적 성과사회로 규정하고 더불어 '피로사회'라고 정의내리는 데에는 사실 이렇게 구체적 사례를 제시할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이미 ‘피로’라는 개념만으로도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굳이 P와 Q라는 두 명의 친구들에게 이 개념을 적용해본 데에는, 이와 같은 실제적 적용을 통해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구체적 양상을 파악하고 더불어 그에 대한 해결책도 찾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허나 혹자는 이 둘이 사회적으로 나름 엘리트 집단에 속해있고, 그렇기에 적절한 사례가 아니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대를 진단할 때 (특히 은폐되어있는 것을 드러낼 때) 소위 엘리트라고 불리는 집단의 표본을 사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때가 있다. (물론 나는 그 둘을 엘리트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돈과 명예 같은 실질적 성과를 스스로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누구보다도 성과사회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 내가 여기에서 어떤 비정규직 노동자나, 노동의 강도에 비해 현저하게 임금이 낮은 계층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현 시대의 고찰이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래전부터 그래왔듯) 기본적으로 착취의 대상이며, 그것은 언제나 동정심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동정심이라는 것이 위선적이든 그렇지 않든, 그러한 감정은 대상을 숭고하게 만들어버린다. 허나 그것은 노동의 현장을 세세하게 들여다보지 못한 관념적 숭고일 따름이다. 그럴 경우 진단은 지극히 감상적이거나, 혹은 지극히 빤한 이야기가 되어버릴 것이다. 특히 ‘피로사회’라는 책이 현대의 독일-유럽의 한복판에서 씌어졌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에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이 ‘진단-적용’이 곧 동시대의 ‘진단-적용’이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P와 Q 같은 인물이어야 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해야겠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철학서로 씌어졌지만, 단순한 철학적 개념에 그치지 않고 시대를 진단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진단된 시대를 극복하려 하고 있다. 그런데 P와 Q가 이 책을 읽고서 과연 저자가 말한 '피로사회'라는 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한병철은 책에서 두 가지 피로에 대해 언급하면서 피로는 또 다른 피로로 극복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중략) 한트케는 내재적 성격을 지닌 피로의 종교를 구상한다. “근본적 피로”는 자아의 논리에 따른 개별적 고립화 경향을 해소하고 친족관계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그 속에서 어떤 특별한 박자가 일어나 하나의 화음을, 친근함을, 어떤 가족적 유대나 기능적 결속과도 무관한 이웃관계를 빚어낸다. (P.71~73)

나는 앞서 피로사회를 실용서로 읽겠다고 했다. 실용서라면 의당 ‘How to’의 문법을 따르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P와 Q가 한병철이 이야기한 근본적 피로의 개념을 깨닫게 되는 과정을 생각해보았다.

P와 Q는 ‘피로사회’를 읽는다. 그들은 이 책의 개념을 이해했고, 자신들이 심각한 ‘피로 상태’에 처해있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P와 Q는 ‘근본적 피로’의 개념을 받아들이려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개념을 이해하면 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액션도 없다. 다만 ‘희망’만이 있을 뿐이다.

“피로한 자는 또 다른 오르페우스로서 가장 사나운 동물들조차 그의 주위에 모여들어 마침내 피로를 나눌 수 있게 된다. 피로는 흩어져 있는 개개인을 하나의 박자 속에 어울리게 한다.”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저 “오순절의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한트케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언제나 피로한 상태”라고 상상한다. 그것은 특별한 의미에서 피로한 자들의 사회이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P.73)

P와 Q는 이해했다. 자, 그들은 이제 오순절의 모임을 통해 성과사회의 반대편으로 가려 한다. 그런데 어떻게? 진정한 피로와 함께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P는 모니터에서 눈을 뗀다. 키보드를 뒤집어엎고, 짐을 꾸린다. 자신에게 ‘진정한 피로’를 맛보게 해줄 휴식을 위해서다. 그는 어디로 가야할지 생각한다. 그러다 갑자기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버린다. P는 자신이 어떤 방식을 택하더라도 진정한 피로의 상태에 진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글쓰기를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 한은 말이다. 결국 그는 꾸리던 짐을 다시 푼다. 그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한참을 생각하다가,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P는 며칠에 걸쳐 단편 하나를 완성한다. 마침표를 찍고, 의자에 등을 기댄 채 그는 천장을 바라본다. 피로하다. 허나 이것도 ‘진정한 피로’는 아니다. P는 지금 지극히 무위하지만, 그것은 영감을 불어넣지도 누군가의 유대를 강화하지도 않는다. 그의 피로는 ‘진정한 피로’가 아닌 ‘소진의 피로’다. P는 생각한다. 그것은 같은 것이라고. 자신은 영원히 피로함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다만 같은 것을 같지 않다고 말함으로써 잠시 그곳에서 눈을 돌려버릴 수는 있다고 말이다. 그가 이토록 달려왔던 것은 성과사회가 주입한 어떤 희망 때문이다. 다른 것을 같다고 말하고 같은 것을 다르다고 말하는 것, 혹은 옳고 그른 것을 무위의 상태로 흐트려뜨리는 것. 시작은 어땠을지 모르지만 P는 이제 그 ‘희망’으로 글을 쓴다. 허나 그것은 눈먼 희망이다. ‘피로사회’에서 말한 ‘진정한 피로’의 상태는 대안이라기보다는 위안에 가깝다. 언제나 그렇듯 위안은 많은 이들을 눈멀게 한다.

 

그렇다면 Q는 어떨까. 그는 무위의 시간을 갖기 위한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퇴근길 버스 안에서의 잠깐의 몽상일 뿐이다. 그러다가 문득 깨닫는다. 아, 피로하다! Q는 이것이 ‘진정한 피로’인가 생각해본다. 아니 그렇다고 믿기로 한다. 버스가 흔들리고 Q 또한 흔들린다. 그는 손을 들어 허공에 선을 그어본다. 섬세한 선들은 그의 과거를 상기시킨다. 하지만 Q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의 선택은 적절했다. 현 상태라면 아무것도 그의 인생을 무너뜨리지 못할 것이다. 그는 꿈을 잃은 대신 ‘희망’을 얻었다. 갑자기 집에 가기 싫어진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만다. Q는 피식 웃으며, 휴대폰에 저장해두었던 아이의 사진을 꺼내본다. 아이는 밝고 ‘긍정적’이다. 자신을 닮은 아이에게 Q는 미처 못 이룬 꿈을 투영해본다. 그는 우울증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잠시 우울해진다. 아니, 그는 우울해지고 싶다. Q는 눈을 감고 잠을 청한다. 감긴 눈꺼풀 속에서 자전거가 내달린다. Q의 튼튼한 두 다리가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다. 내일은 토요일이다. Q는 가까운 공원으로 나들이를 가볼까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은 오랜만에 아내와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리라. 어쩌면 기분 좋은 섹스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진정한 피로’는, 아니 그 개념은, 그에게 약간의 위안을 준다. Q는 똑똑하기 때문에 그것을 쉽게 이해하고 또 받아들였다. 희망의 불빛이 그의 눈꺼풀 위에서 아른거린다. 그것은 잡힐 듯 잡히지 않은 채, 그의 삶을 계속해서 이끌 것이다. 허나 그 희망은 눈을 뜨면 보이지 않는다. Q도 그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잠에 빠져든다. 피로하다. 피로하다. 버스가 소란해진다. 한 무리의 여고생들이 서로를 향해 비관을 쏟아낸다. Q는 눈을 뜨고 사납게 그들을 노려본다. 그는 피로하기 때문에 더더욱 날카롭다. 하지만 Q는 그들에게 무어라 말하지 않는다. 그는 피로하고, 그래서 모든 게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4. 나오기

P와 Q는, 그리고 나는, 결국 ‘피로사회’를 실용서로 읽는 데에 실패했다. 어쩌면 철학이라는 것은 애초부터 시대를 진단하고, 문제를 제기하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후의 과정은 개별자의 문제이거나, 아니면 정치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병철의 책 ‘피로사회’는 적절한 관점에서 시대를 진단한다. 허나 그가 제시한 극복의 대안이 굉장히 이상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것을 알면서도 내가 굳이 이 책을 실용서로 읽으려 했던 것은 누군가 이 책에 나오는 ‘근본적 피로’를 대안처럼 제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나 또한 당연하게도 약간의 위로를 얻었다. 그렇지만 한병철이 한트케의 말을 빌어 이야기한 ‘오순절-사회’ 라는 개념은 다분히 종교적인 뉘앙스를 지니고 있다. 한트케가 보았던 ‘근본적 피로’는 어쩌면 한병철이 보았던 것과는 다를지도 모른다. 한트케가 본 ‘오순절-사회’는 이미 ‘쉬어야만 한다’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 사회이다. 또한 그들의 피로함은 신에게 육체와 영혼을 의탁함으로써 고귀해지고, 그렇기에 평화로워지는 것이다. 허나 한병철 자신이 말했듯 근대 이후로 종교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근대는 신과 피안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현실에 대한 믿음까지도 상실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인간 삶을 극단적인 허무 속에 빠뜨린다. 유사 이래 삶이 오늘날처럼 덧없었던 적은 없었다. 극단적으로 덧없는 것은 인간 삶만이 아니다. 세계 자체도 그러하다. 그 어디에도 지속과 불변을 약속하는 것은 없다. (P.41)

그렇기에 한트케의 ‘오순절-사회’로의 가능성은 불가능한 꿈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손쉬운 위안을 주기 때문에 또 하나의 ‘눈먼 희망’이며, 그것은 현 시대를 극복하는 데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두 손 놓고, 이 피로의 감옥 속에서 생을 버텨내야만 하는 것일까? 물론 쉽게 해결책을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피로를 풀어버리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트케의 ‘근본적 피로’는 어쩌면 인간이 풀 수 있는 영역 밖에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신은 인간을 본질적으로 피로하도록 창조했다. 현 시대의 깊숙한 곳까지 나아갈수록 그 사실은 더욱더 자명해진다. 그럴 경우 우리는 ‘피로함’에서 도망치려하기보다는 그것을 맞닥뜨리고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인식의 순간 우리는 그것을 반성하게 되고, 그것이 시대까지도 반성하는 지배적 패러다임으로 부상할 때, 결국 ‘피로사회’는 몰락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작품출처 : http://museumuesum.tumblr.com/archive

본문에 사용된 작품에 대하여 : 본문에 사용된 Félix González-Torres 의 작품은 작가의 원래 의도와는 상관없이 다른 맥락으로 사용되었음을 밝힙니다. - indienebob 편집자

 

  글_김종우((gusukzine@hanmail.net))

  소개_진지하지만 무겁지 않고, 놀지만 취하지 않으며, 나이가 들어도 아직 중2병인 대한민국의 남자, 글쓰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