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성북동 비둘기 <헤다 가블러> 헤다 가블러가 피아노를 치던 그 때

2012. 11. 8. 02:25Review

 

헤다 가블러가 피아노를 치던 그 때

<헤다 가블러>

극단 성북동비둘기 / 김현탁 연출

 

글_김해진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입구의 커튼이 걷히자마자 눈에 보인 건 무대 한가운데 묶여있는 배우였다. 묶인 것은 여자. 마취됐거나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탈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여자는 가늘게 눈을 떴다가 힘없이 눈을 감았다. 나는 슬쩍 벌어진 다리 사이를 쳐다보게도 되었다. 자리에 앉아 일상 지하의 곳곳을 둘러보다가 뒤이어 들어오는 관객들의 모습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이곳이 헤다 가블러가 묶여있는 실험실이거나 병원이라는 걸 곧 알 수 있을 터였다. 근처를 지나고 있을 아무나 붙잡고 이곳에 내려온다면 그 사람은 아마 깜짝 놀랄 거라고 공상을 해볼 정도로, 의자에 묶인 헤다는 무대 정중앙의 무척 대범하고 공격적인 위치에 앉아 있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로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오더니 헤다 가블러의 뒤쪽에 일렬로 앉았다. 객석도 삼면을 둘러싸는 형태로 놓여 있어 헤다 가블러는 영락없이 사람들의 시선 안에 갇힌 꼴이 되었다.

 

 

헨릭 입센의 원작과는 사뭇 달랐다. 하나의 뚜렷한 아이디어에 이야기를 재구성해 넣은 방식이었다. 형광등 불빛이 주는 서늘한 느낌이 차가운 수술실을 연상하게 했다. 이내 귀에 거슬리는 마이크 소리로 남자가 헤다 가블러를 호명했다. 묶인 채로 여러 날 잠을 못잔 것 같은 여자가 가느다란 신음 소리를 낸다. 극단 성북동비둘기는 무엇을 확성시키고 싶은 걸까. 한 여성을 둘러싼 가학적인 목소리들. 낄낄대고 과자를 먹으며 자기들끼리 잡담을 나누는 연구원들은 헤다 가블러를 관찰하는 것도 연구하는 것도 아니다. 끊임없이 그녀를 타자로 만들어 밀어낸다. 헤다와 흰 가운들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치 유리벽을 사이에 둔 것처럼 서로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살아 움직이는 관계가 아니라 죽어있는 관계다. 전기고문 의자나 산부인과 진료실의 의자를 떠올리게 하는(이 두 가지를 섞은 형태의 의자를 만들다니) 헤다 가블러의 의자는 그만큼 강력한 착상인 동시에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다.

그런데 헨릭 입센 원작의 「헤다 가블러」는 어떤 이야기인가.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가블러 장군의 딸 헤다 가블러는 교수 자리를 약속받은 테스만과 6개월 간의 신혼여행을 다녀온다. 하지만 그와의 생활은 지루하기만 하다. 어느 날, 헤다는 옛 애인이었던 레우볼그가 새 책을 내서 주목받고 있단 걸 알게 된다. 다시 나타난 레우볼그 때문에 자신의 남편 테스만이 약속받았던 교수자리가 위태로워지자 헤다는 레우볼그의 자식과도 같은 원고(미래를 다룬다는)를 불태워버린다. 원고를 잃어버리고 절망한 레우볼그는 권총 사고로 죽고 헤다도 끝내 자살하고 만다. 굳이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이렇지만 사실 이 이야기는 인물들의 미묘한 심리 변화를 담고 있기 때문에 줄거리로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연출가 김현탁은 이 이야기를 헤다와 헤다를 둘러싼 인물들의 영역으로 나누고 헤다에게 화살처럼 쏟아지는 말들에 돋보기를 가져다댄다. 중세의 가내수공업 관련 연구 내용을 길게 읊으며 위압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고모에게 의지하며 바보처럼 앙앙대는 테스만, 실험을 빌미로 헤다를 희롱하거나 은밀하게 유혹하려드는 의사, 같은 여자지만 끊임없이 헤다를 경계하는 테스만의 고모, 자신이 레우볼그와 가깝다는 걸 헤다에게 과시하는 테아, 친절한 듯 보였던 여자 간호사 혹은 연구원도 헤다의 상황을 방관한다. 마침 테스만이 오랫동안 읽어내려가던 중세의 가내수공업 리포트에는 직급과 계급이 생겨나고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욕망 또한 생겨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헤다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 보였지만 희한하게도 ‘계급’이라는 말은 기억에 남았다. 헤다 가블러는 여자라는 계급을 생각하게 한다. 가블러 장군의 딸이라는 높은 지위와 자신의 옛 애인(레우볼그)에게 교수직을 내줘야 할지도 모르는 남편(테스만)을 둔 아녀자로서의 지위. 헤다라는 개인은 자신을 둘러싼 사건과 상황으로부터 빗겨나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연루돼 있는 우월하면서도 동시에 취약한 존재이다. 직접 행동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빗겨나 있고, 총과 레우볼그의 원고를 치마속에 감춰둔다는 점에서 강력하게 연루된다. 어떤 것이 우월한 것이고 어떤 것이 취약한 것인지는 생각하기에 달렸다.

 

 

원작을 읽으면서 헤다의 속박된 상황뿐만 아니라 오만함을 느꼈었다. 어떤 오만이냐면 여신과도 같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자신이 모든 상황을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함이다. 더욱이 그 오만함은 자신이 속박돼 있다는 상황을 무시하거나 혹은 그 상황이 자의에 의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는 데까지 나아가게 한다. 그런데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헤다 가블러>가 이런 헤다의 성격을 형상화했다고 내가 오해한 장면이 있었다.

헤다가 피아노를 친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의자에 묶인 채로 앉아있다. 음악은 흘러나오고 헤다는 거기에 맞춰 손가락을 움직인다. 이내 나는 그녀가 곡을 연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고조되고 헤다의 손가락도 빨라진다. 연구원들이 자기들의 일을 정리하는 동안 이 장면이 막간 음악처럼 기능하는 걸까, 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다가 갑자기 공연의 처음부터 지금까지 모두 헤다 가블러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헤다가 손가락을 움직이는대로 음악이 연주된다고 생각하자 내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렇게라면 지금 헤다가 묶여있는 것도 헤다 자신이 공상 속에서 연출한 것이 된다. 그러면 헤다의 속박된 상황은 정반대로 무척 자발적인 상황으로 바뀐다. 자기 스스로를 저렇게 가둔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머릿속에서 몇 초간 모순을 가지고 놀면서 갑자기 폭발한 상상력에 쾌감을 느꼈다. 그런데 그때 남자 배우가 일어나 음악을 꺼버렸고 헤다는 아쉽고 신경질이 난다는 듯이 손가락 연주를 멈췄다. 내 상상은 그저 상상이었음을 깨닫고 헤다와 마찬가지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공연이 가려는 방향과는 별개로 이 전체 상황이 헤다의 머릿속 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으로 가본다. 레우볼그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의 용기와 자유의지에 해방감을 느낀다고 말하던 헤다에게 키가 큰 의사가 다가온다. 손으로 헤다의 입을 막는다. 헤다가 우물거리며 하는 말을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의사는 ‘부인의 이 아름다운 망상을 깨야겠습니다.’라고 말하곤 수술을 집도한다. 원작과는 달리 헤다는 레우볼그의 원고를 불태우는 대신 자신의 엉덩이 아래 감춰두었는데 의사는 강제로 그 원고를 꺼내려는 것이다. 의자는 무대 한가운데 있으므로 초록색 수술 가운을 입은 건장한 의사가 헤다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들이미는 장면을 정면에서 봐야 했다. 녹색 천이 의사의 머리 위에 덮이자 다소 안심이 되었다. 레우볼그의 원고는 헤다의 아이가 돼버렸고 강제로 꺼내는 동안 그 아이는 사산한 것으로 보였다. 극단 성북동비둘기는 원작의 ‘원고를 불태우는 행위’ 대신 강제 출산을 선택하면서 헤다라는 여자가 겪는 굴욕적인 상황과 신체의 고통을 보여준다. 원고를 없앤(은폐하려는) 헤다의 행위가 결국 레우볼그를 고통스럽게 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지워버렸다는 걸 이 장면이 보여주는 셈이다. 수술실을 정리하는 소리가 들리고 형광등 불빛이 사라진다. 의사는 ‘세상에, 이런 일을 진짜로 하는 사람이 어딨어…….’ 라고 말한다. 이 모든 게 헤다가 주도한 헤다의 망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적극적인 오해 속에서 계속 서성인다.

 

오해 이전에, 난 여성 관객으로서 무엇을 읽어버렸는가. 헤다의 공간에서 출산 혹은 낙태, 은폐, 질시, 부정 등의 성격이 뒤섞여 폭발할 때, 여러 층위에 걸친 불안과 신경증이 여성의 몸과 하나가 될 때, 묶여있던 여성이 양쪽 다리를 목각인형처럼 벌리고 죽어버릴 때, 헤다라는 여성은 어떻게 훼손되었는지를 알려줘야 존재가 명징해지는 사건 현장의 시체처럼 돼버린다. 헨릭 입센의 원작에서 헤다가 자기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과 주변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자살한다면, 김현탁 연출의 <헤다 가블러>는 처음부터 끝까지 폭력적 시선에 둘러싸여 있다가 끝내 살해당하는 여자를 전시한다.

그래서 나는 <헤다 가블러>가 불편했다. 공연의 내용이 헤다의 자발적인 상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역시 불편함을 뒤집을만한 무엇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진제공 : 극단 성북동비둘기

 

헨릭입센 작, 김현탁 재구성,연출

"헤다 가블러" 10월 16일 ~ 12월 9일

평일 8:00 토 ,일 6:00 월요일 쉼

성북동 비둘기 연극실험실 '일상지하' 02 766- 1774

출연 / 연해성, 김미옥, 오성택, 염순식, 정혜영, 이진성, 박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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