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1번지의 번지수를 묻다 (2)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2009. 4. 10. 12:3507-08' 인디언밥

혜화동 1번지의 번지수를 묻다 (2)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 김민관
  • 조회수 626 / 2008.05.14

<팔이 없는 아들 늑대 현실을 뒹굴고, 어미 그를 바라본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페스티벌의 두 번째 연극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이하 “늑대”)를 찾았을 때 무대는 다시 프로시니엄 아치의 형태를 띠고 있었고 관객들의 응집된 숨이 극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별을 가두다”가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자 유희경의 작품이고, “늑대” 역시 200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자 김경주의 작품으로 이외 페스티벌의 몇 작품이 더 문학상 수상의 신진 작가와의 만남을 시도했다. 이러한 특징이 연극의 실제적 언어에 상징적인 언어의 측면을 조금 더 부각시키고 있다고 생각되는데, “늑대”는 여러 상징적 함의를 내포하여 다소 난해하게 느껴지는 측면이 크다.

 

 황갈색의 어둡고 음침한 늑대의 터전이 무대 전면을 차지하고, 동물을 박제하여 먹고 사는 눈알이 없는 늙은 어미가 혼자 머무르는 이곳에 두 팔 없는 아들 늑대가 등장한다. 임신 중에 살모사가 삐져나와 아들의 팔다리를 먹어 치웠다는 뜬금없이 뱉는 어미의 말은 단순히 진실의 측면이 아니라 아들의 장애에 대한 풀리지 않는 현재진행형의 물음을 던지며 아직까지 그것이 아들에게는 트라우마로서처럼 확고한 상처로 굳어지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생계를 걱정하며 어떻게 먹고 살지 궁구하는 이들 모자의 모습은 사실 가난한 소시민의 우리네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 속에 늑대의 야수성은 교묘히 거세되어 있는데, 이들 삶의 행동반경을 제약하는 사냥꾼, 공격하기 힘든 여린 신체와 원초적인 야수의 성정 대신에 놓인 생존의 위기는 우리의 삶의 문제를 조금 다른 ‘늑대 인간’의 삶으로 치환시켜 놓은 것이다.

 

 비열하고 냉소적인 모습의 사냥꾼은 막의 전환에 어김없이 등장해서 독설을 퍼붓는데, 사실 사냥꾼과 이들 모자는 극에서 완전한 접점을 이루지 않는다. 그는 단지 쫓고 쫓기는 냉혹한 생존경쟁의 위기를 감지하게 하는 장치로서 존재하는 동시에 막을 열고 닫는 화자로서 무대에서 기능한다. ‘삶은 자신이 만든 내지 자신에게 놓인 덫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것’, ‘자살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존재’, ‘공식을 만들어야 하는 불안한 존재’를 언급하는 사냥꾼, 그와 늑대의 관계는 신과 인간의 관계 양상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가 어떠한 감정의 양태도 보이지 않을뿐더러 일종의 관객에게 말을 거는 중립자로서 현실적 맥락을 보이지 않고 있는, 즉 그럼으로써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마른 우물 바닥을 손으로 만져 여러 번 혀로 핥음은 그 역시도 풀 수 없는 갈증의 욕망에 시달리는 존재로서, 비정함 역시 인간적인 면모의 하나일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듯하다.

 

<아들의 발을 도끼로 치려는 어미 늑대와 자신의 발을 그 앞에 내놓은 아들 늑대 >

<아들의 발을 도끼로 치려는 어미 늑대와

자신의 발을 그 앞에 내놓은 아들 늑대>
 

 생계 해결의 임계점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발을 도끼로 내리 쳐 상해를 입힌 후 ‘자해공갈단’으로 한 몫 챙기자 하기도 한다. 도끼를 들이대는 익살스러운 어머니의 표정은 아들을 팔아 삶을 유지코자 하는 비정한 엄마의 모습 이전에 현재를 소모시켜 잠시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이들의 거친 삶에서 나오는 억척스러움에 닿아 있다. 아들은 매번 그것을 움찔 피하고 말지만, 그리고 보는 관객도 눈을 찡그리지만 사실 아들이 불구의 신체이건, 부서진 신체의 형국이 되건 그녀는 그런 아들을 용인하고, 그런 처참한 삶 자체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아들 늑대가 사냥터에서 주인 밑에서 사냥감을 물어 오는 임시적 일자리에서 일해 몰래 훔쳐 온 동물의 시체, 이는 아들이 내놓은 불투명한 현실에 대한 희망적인 대안의 제시이지만, 사실 자신의 아버지의 주검이다. 아버지는 이들 앞에 나타나지 않는 떠돌이였다. 어머니는 눈이 멀어 삶의 터전에 고착된 존재이다. 그런 어머니의 젖을 빠는 아들, 그가 단순히 유아기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로써 작품은 모성적인 것의 갈구, 그리움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부성의 죽음, 모성의 회귀’, 역설적으로 아버지는 공장에서 자신의 팔을 기계에 절단하여 보상금을 타내는 것으로 가족의 삶에 자신을 투신했지만, 악착같은 삶을 통한 아들을 존재 그 자체로서 용인하는 그런 대안 없는 현실의 긍정은 어머니의 몫이었던 것이다.

 

<늑대의 야성(野性), 울음소리(野聲)로 본래적 존재를 회복코자 하는 모자(母子)의 모습 >

<늑대의 야성(野性), 울음소리(野聲)로 본래적 존재를 회복코자 하는

모자(母子)의 모습>
 

 아버지를 죽인 것이 탄로난 탓인지, 갑자기 아들을 잡으러 들이닥친 경찰은 이들 밖에는 엄연히 ‘사회’라는 질서가 존재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아무튼 인간을 닮은 야생의 질서에 법의 영역에 있는 경찰이 등장한다는 것은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인데, 두 경찰은 동시에 입을 맞추며 말하고, 흡사 혼이 없는 사이보그 같다. 이러한 설정이 다소 어설프거나 작위적으로 느껴지지만, 사실 작품은 법과 질서 이전의 대척적 지점으로서의 본래적 감각·세계를 강조하고 있음으로 보인다. 아들이 찾아 나섰던 바람결을 맴돌던 ‘울음소리’는 그래서 야생의 것, 날 것이면서 생동하는 우주적 공간에 대한 인간의 근원적 희구·열망일 것이다.

 

 아들이 데려 온 여자는 아들의 아이를 품고 있다. 임신한 몸의 여자는 천박한 말투로 시어머니에게 돈을 요구할 뿐 남편이나 품은 자식에 대한 애정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반면 그녀 뱃속의 아이를 아들은 자신의 우주라고 하며 어미는 이를 지키려는 강한 집착을 보이는데, 이는 종족유지의 본능일 뿐만 아니라 모태의 아이가 숨 쉬기 힘든 현실 너머에 드넓은 대안과 가능성의 질서, 그 염원이 담기는 희망의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특수한 존재의 하나가 아니라 극이 담는 하나의 ‘유토피아적 장’이다. 한편 잃어버린(?) 아들의 두 팔은 그 ‘장’에서 다시 획득될 수밖에 없는 것인데, 사냥꾼의 총구는 마지막에 이들을 겨냥한다.

 

 현실 너머의 이상적 공간을 좇는 아들, 눈알이 없는 어미, 이들의 허허로운 눈빛은 희망과 열망의 가장자리에서 삶 자체를 담지하고 있었다. 결국 늑대의 삶을 통해 상징적으로 인간의 삶을 적확하게 현재화시키고 있던 연극은 그 안에 한을 존재의 물음으로 바꿔 놓고 있었다.

 무대라는, 존재를 투척하고 현현시키는 공간은 슬플 수밖에 없고, 그 슬픔을 용인할 수밖에 없으며 인간의 삶을 단지 재현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를 비추는 장이 되는…… 문득 그러한 생각들이 스쳐 지나간다. 그래서 왜 남루한 연극이건 아니건, 막상 펼쳐 놓기 전까지는 잘 알 수 없는 어두운 연극 무대를 계속해서 내가 비집고 들어오게 되는지, 그리고 그 좁은 공간에 거대한 현실의 꿈을 꾸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앞으로 페스티벌의 네 작품이 더 남아 있다. 작가와 연출, 배우와 스태프가 모두 다른 여섯 개의 작품, 그들의 각기 다른 개성을 하나로 묶기 보다는 각각의 연극에 대해서 그리고 연극의 본질은 무엇인지, 그것이 어떻게 나의 삶과 연관되어 의미를 생성·획득하는지에 대해 연극이 준 기억의 이미지를 따라 가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보충설명

 “나는 연극이다”
다섯 명의 연출은 그들이 모인 유일무이한 연출가 동인으로서의 특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연극·연극성에 대해서 정면으로 표현하고 함께 고민해 보며, 연극을 통해 소극장에 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극장 연극은 어떤 것인지, 연출가 각자에게 연극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지의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데서 시작된 명제이다.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의 연출 박정석의 말.
<제목이 강렬하다. 일단 시각적인 이미지가 압도한다. 그러나 실은 ‘울음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지배하고 있는 작품이다. 제목은 동명의 시에서 출발하여 희곡을 썼기에 그리 된 것이다. 이 작품은 많은 주제어들을 품에 품고 있다. ‘유괴’, ‘덫’, ‘우주’, ‘기형’등…. 이 세상의 불구성을 말하기 위해 작가의 상징어들이 알레고리적으로 반복, 변주되어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 다수(종)에 의해 사라져 가는 소수(종)에 대하여(매니아라 불리는 ‘문화소수자’도 당연히 포함되어져야 한다.) 동정이 아닌 연민을 보내고 있는 작품이다.>

공연일정
별을 가두다 4.9~4.20 극단 추파 (작: 유희경 / 연출: 우현종)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4.23~5.4 극단 바람풀 (작: 김경주 / 연출: 박정석)
체크메이트 5.7~5.18 극단 드림플레이 (작,연출: 김재엽)
모델 하우스 5.22~6.1 극단 유정 (작,연출: 김혜영)
옆집 살던 박노인 6.6~6.15 극단 청국장 (작:윤희경 / 연출: 김한길)

공연문의
여유,作 02.3673.5580

필자소개

필자 김민관 (mikwa@naver.com)

문화예술 전반에 관심을 두고 현장을 적극적으로 찾고 그에 대한 글을 생산코자 한다. 미학적 접근과 철학적 통찰력,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의 제고 등 여러 지점에서 예술을 보는 시선을 확장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