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동 1번지의 번지수를 묻다 (1) "별을 가두다"

혜화동 1번지의 번지수를 묻다 (1) "별을 가두다"

  • 김민관
  • 조회수 647 / 2008.06.20

<"별을 가두다" 속 산장 안에 모인 사람들, 창문에 선 여자의 모습이 탄식을 조용히 가다듬고 있다.>

 

기억되는 것들...

 혜화동 1번지에서 봤던 연극들은 대부분 기억 속에 깊게 각인되기 마련이다. 철저히 작은 소극장 무대는 객석의 뚜렷한 경계 없이 배우들 행동반경의 제약을 만들고, 배우의 시선에 의도치 않게 마주치게도 한다. 가변 무대로서 위치하여 극을 둘러싸고 다른 관객의 얼굴이 보이기도 하고, 프로시니엄 아치에서 벗어나며 관객석의 등급 또한 없다. 애초에 ‘연극의 남루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이 공간에서의 연극은 환영적인 극의 세계에 사실주의적인 색이 입혀지면서 선명하게 보이는 까닭에 오히려 더 큰 판타지의 느낌을 가중시킨다. 가령 이런 식인데, 일상만치 가까이에서 일상과 다른 극의 어법을 대입하고 있는 배우들을 보다 보면 이것이 극임에도 신비한 느낌으로서 꿈을 꾸듯 뚜렷하게 느끼는 것이다.

 

 2008 혜화동 1번지 4기동인 페스티벌의 첫 번째 작품 “별을 가두다”를 보면서 언뜻 이 공간을 정의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과연 이 공간을 선택한 이 연출가들의 의도는, 그리고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2006년 혜화동 1번지에서 기획한 <연출가 데뷔전> 역시 이곳에서 모두 봤었고, 그때의 기억이 아련한, 그렇지만 뚜렷한 추억이 되었음을, 거기 나온 배우들은 지금 무엇을 할지에 대한 생각에까지 미치자 연극은 살아남기 위해 늘 낮은 곳에 임하며 그것을 실험이라고, 진정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칭하며, 상업화된, 포화된 대학로 공간에 반기를 들고 나타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즉, 열악한 상황에서부터 그것을 절감하며 태어난 실제적 공간으로서 혜화동 1번지는 자리하는 것이다.

 

 이제 배우는 관객과의 직접 대면을 해야 한다. 보통의 프로시니엄 아치를 완벽하게(?) 구현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대극장에서 이 정도면 다 vip석이다. 대부분의 가난한 연극이 그렇겠지만 도무지 수지타산이 맞을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보통의 대극장의 공연이 관객이 무대를 효과적으로 관람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또 다른 의문을 제기한다. 가격으로 대별되는 무대 등급은 가령 3층의 A석에 앉아서 볼 양이면 잘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심지어 무대 앞쪽에 위치한 관객에 대한 상대적인 어떤 열등감까지 불러일으킨다. 예술은 가격에 따른 등급을 매겨 잘 다듬어진 상품으로 치환되어 빈익빈 부익부에 따른 문화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도 품어 본다.

 

 혜화동 1번지는 안락한 공간에서 많은 사람이 선택한 공연의 한 축에 나도 속해 있다는 안도감을 얻고자 공연을 보려 한다면 다소 불편한 환경일 수밖에 없다. 배우가 관객을 대면해야 하는 만큼 관객 역시 같다. 어떻게든 나는 관객이라는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듯하다. 그래서 연극은 대부분 깊게 각인되지만, 그 가치를 판단하기가 애매한 입장에 놓인다. 생생한 기억은 얼핏 좋았다는 느낌으로 치환되기도 하지만 현실에서 직접 누군가와 대면하고 나서 그를 냉정하게 평가하기가 힘든 까닭도 그에 닿아 있다.

 

 이 속에서의 연극은 대부분 실험이다. 그리고 대부분 초연작의 성격을 띠고, 열띤 호응을 띠는 연극은 다시 대학로 중심지로 한 발자국 더 내딛기도 한다. 4기 동인의 작품들 중에는 “임대아파트”, “조선형사 홍윤식” 등이 그러한 대표적 예로 볼 수 있다. “나는 연극이다!”는 모토를 건 이번 페스티벌은 연극의 본질을 찾고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의 기치를 건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가난한 연극에서 배우는 강한 존재감을 갖고 있고, 작은 움직임과 소도구는 극에 대한 강력한 유인 장치가 될 것이다. 각인된 기억을 따라 필자 역시 이 속에서 다시 한 번 연극 속에 몸을 내맡기고자 한다.

 

 “별을 가두다”

 

<산장 주인은 객으로 찾아온 여인에게 호감을 보이는 듯 약간은 친절하게 또 웅숭깊게 말을 건넨다 >

<산장 주인은 객으로 찾아온 여인에게 호감을 보이는 듯

약간은 친절하게 또 웅숭깊게 말을 건넨다>

 

 무대는 무형의 선을 긋고 산장 안을 상정해 놓는다. 무대 오른편에 그 문과 창문이 있고, 문을 넘어간 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다. 비를 피해 이곳에 들어 온 한 쌍의 남녀, 이어 두 친구는 이미 서로 간에 깊은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 전부터 이곳을 자주 들락날락했던 소녀 역시 굳게 닫은 입으로 세상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있어 보인다. 그 사이에서 서로를 매개하고 분위기를 온화하게끔 노력하는 산장 주인이 있지만, 이곳은 곧 갈등이 터지고 격발하는 일촉즉발의 순간을 끊임없이 보여준다. 현실을 잠시 던져 놓고 산을 찾은 네 사람에게 있어 산은 현실의 임시 피난처가 아닌 오히려 원초적인 욕망들만이 자리하는 곳으로서 존재하며 서로에 대한 증오가 극단의 감정들로 표출된다.

 

 남자는 ‘어항과 금붕어’의 비유를 들어, 여자가 자신의 어항 같은 존재가 되어 줬으면 하고, 여자는 남자에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으라고’ 여러 차례 소리친다. 어차피 이 둘의 현실은 온전히 섞일 수 없다는 것인데, 더 깊게 들어갈수록 이 둘의 진실은 그녀의 동생을 건드리지 말라는 여자의 짧은 한 문장으로 요약이 되지만, 그것을 알아채며 겪는 관객들의 짧은 충격에 부합하여 이들의 관계가 또 다른 국면에 접어드는 것은 아니다. 갈등의 원천은 산 너머 현실에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어차피 갈등은 해소될 수 없고, 현실로 돌아갔을 때 둘의 관계가 지속될 지도 의문이다. 그렇다고 호우로 강물이 범람하고, 무전기로 외부와의 교신이 되지 않아 고립된 이곳이 현실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독립적 장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실을 직시’해야 하는 곳이기에 끊임없이 여자는 처음부터 이곳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발악을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적어도 연극이 끝날 때까지 이 산을 벗어날 수 없음은 연극이 전제로 상정한 공공연한 진실일 수 있다. 그리고 연극은 이 안에서 현실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며 바뀌지 않은 산장의 일상에 머물 뿐인데, 결국 잠잠해진 것은 산장 안, 즉 산장 주인의 모습일 뿐이다. 산장 주인의 입장에서 보면 하룻밤의 있은 풍지풍파가 바깥의 거센 기후 변화의 하룻밤과도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곧 깊은 세월 동안 별별 사람을 다 겪어 낸 산장에서는 그것이 어느 한 에피소드로서 묻혀 마감될 것이다.


 또 다른 일행, 두 친구의 갈등은 한 친구의 애인을 다른 친구가 빼앗았다는 그런 진실에서 비롯되는데, 친구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툭 터져 나오지 않던 금기시된 진실이 이곳에서는 강한 힘을 발휘하며 나중에는 관객을 경악시키는 두 사람의 육탄전까지 이어진다. 그에 대해 혜화동 1번지의 크기는 관객에게 실제 위험을 줄 정도로 유효한 것이기도 하다.

 

<묵묵부답의 소녀, 유독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산장의 객(客) 여자, 소원해 보이던 둘의 관계는 추위에 맞서 서로를 안는다. >

<묵묵부답의 소녀, 유독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산장의 객(客) 여자,

 소원해 보이던 둘의 관계는 추위에 맞서 서로를 안는다.>

 

 말이 없던 소녀의 진실은 어머니를 상습적으로 괴롭히던 아버지를 찌른 사건인데, 자세한 내막은 다른 사람들처럼 잘 드러나지 않으며 부성적인 것의 폭력은 하나의 상처로 남아, 그래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펄떡거리는 분노와 증오로 남아 마지막에 닿아 두 번째로 여자에게 폭력을 행사하던 남자의 목을 겨눈다. 해소가 있다면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했던 여자와 소녀가 함께 육탄전으로 인해 다친 친구의 상태를 외부에 알리고자 길을 떠났을 때 그리고 범람하는 강을 건너지 못하고 함께 앉아 추위에 맞서 서로를 부둥켜안고 인간적인 숨을 느낄 때인데, 이 역시 해소보다는 낭만적 추억의 일부분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관객석 옆 통로에 앉아 진행되고, 여자 둘의 빗속에서의 내밀한 대화에 동참한 것 같은 기분을 선사했다.

 

 어쨌든 비가 그치고 날이 밝자 산장에 덩그러니 놓였던 갈등들은 잠잠해진 것 같다. 그래서 사실상 이러한 갈등은 단지 하나의 욕망 덩어리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현실과의 인과관계가 전혀 나타날 수 없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하나의 판타지로 또는 생생한 기억의 한 순간으로 치부해도 될 듯하다. 극 처음에 배우 모두가 둘 씩 짝지어서 현실에 있는 관계 양상을 순간적으로 보여줬다면, 이는 갈등이 없던 이들의 과거 어느 행복한 한 순간을 가정한 것 같은데, 이 외에 현실에서의 이들 모습이 드러나지는 않는 것이다. 갈등이 다 터져 버리고 맞는 암전 후에 잠에서 깬 여자 앞에 위치한 산장 아저씨는 잘 마무리됐다는 식의 말을 그녀에게 전하고, 극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붕 뜬 느낌으로 마무리 지을 수밖에 없어 보인다. 갈등은 어차피 처음부터 해결을 바랬기 보다도 단지 한 차례 그것을 꺼내 극명하게 그것을 보여준 것에 그 의미를 다한 것으로 보이기에, 그래서 다시 한 번 평온한 산장과 그 주인의 모습은 그것을 너무나도 태연스레 수용하고 있었다.

 

 처음 관객에게 말을 건네던 산장 주인은 적당히 극의 집중을 유도해 냈지만, 그의 목소리는 오히려 지나친 울림을 염두에 둔 작은 목소리였다면, 그 이후 펼쳐지는 갈등의 관계 양상은 정극처럼 진지하게 분출된다. 판타지는 그렇게 연극 자신만의 언어와 세계를 구축해 가며 획득된다. 극 처음에 행복한 순간이 사실상 현실이기 보다 주인공들의 기억의 한 부분을 보여준 것이라면 다시 산의 사건들은 관객에게 또 다른 기억 저편으로 미지의 지점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불완전한 해소, 조명이 들어오면 왠지 모를 들뜸에 박수를 보내는 일, 이러한 과정이 어쩌면 연극에서 유효한 문법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보충설명

혜화동 1번지 4기동인 페스티발 개요
공연기간 : 2008년 4월 9일~ 6월 15일
공연장소 : 대학로 혜화동 1번지 소극장

“나는 연극이다”
다섯 명의 연출은 그들이 모인 유일무이한 연출가 동인으로서의 특징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고, 자신이 생각하는 연극·연극성에 대해서 정면으로 표현하고 함께 고민해 보며, 연극을 통해 소극장에 가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소극장 연극은 어떤 것인지, 연출가 각자에게 연극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지의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데서 시작된 명제이다.

"혜화동 1번지 동인"
1994년부터 시작된 국내 유일의 연출가 동인제로, 상업적 연극에서 벗어나고, 연극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며, 개성강한 실험극을 무대에 올릴 것 등을 결의하며 탄생하여,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라는 극장 공간을 통해 젊은 연출가로서 자신의 확고한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다양한 연극계의 파장을 담아내기 위해 생겨났다. 2006년 박정석, 김한길, 우현종, 김재엽, 김혜영의 제 4기가 시작되었으며 수많은 선배들이 그랬던 것처럼 변함없이 왕성한 창작욕으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다.

“별을 가두다”의 작가 유희경의 말.
<“별을 가두다”는 ‘사람의 마음은 감옥이다.’라는 명제로부터 시작한 작품이다…… 모든 사건들은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를 향해 돌아오게 된다. 용서 못할 것들에 대한 분노들은 나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나. 도저히 용서 못할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그런 것들은 대개 끊임없는 강요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강요들에 시달리다가 터지는 것과 아물지 않은 채 내 안에 고스란히 쌓여 있던 것들을 말하고 싶었다. 용서라는 것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별 같은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 작가에게 이 작품의 제목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고 하고, 작가는 그 답을 용서를 별에 대입함으로써 구한다. 결국 작가에게 ‘별을 가둠’은 미약한 존재로서의 인간이 허구의 질서, 곧 자신의 내적 과정의 부단한 흐름을 따라 생기는 상대방에 대한 미움, 그리고 그에 따른 용서라는 마음을 꺼내지 못하고 자신 속에 은폐함을 의미한다. 이는 끊임없이 스스로 마음에 생채기를 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때로 자신 안에 숨어, (별)빛을 잃고 어둠에 휩싸이게 되는 지도 모르겠다.

공연문의
여유,作 02.3673.5580

필자소개

필자 김민관 (mikwa@naver.com)

문화예술 전반에 관심을 두고 현장을 적극적으로 찾고 그에 대한 글을 생산코자 한다. 미학적 접근과 철학적 통찰력, 예술의 사회적인 역할의 제고 등 여러 지점에서 예술을 보는 시선을 확장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