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1. 11:35ㆍReview
두 개의 화면
"후쿠시 오요" & "이랑" MV(뮤직비디오) 리뷰
글_김송요
아무도 나를 모르는 세상에 대한 생각을 한다. ‘아무도 나를’? ‘내가 아무도 모르는’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그곳의 사람들은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고, 그들이 나를 알아줄 이유는 없을 것이며, 무지(無知)의 감정에 둘러싸이는 것은 결국 내가 될 테니까.
지난 겨울, 여행을 했다. 빈에서 보낸 사흘 째였던가, 오후 무렵 혼자 불쑥 지하철을 타고 도나우 강에 갔다. 하다못해 동네 실개천도 상류와 하류가 다르건만, 아무 생각 없이 역명에 ‘도나우’가 들어가는 곳이라며 무턱대고 내렸으니 그럴싸한 풍경을 기대하는 것이 잘못이었다. 강바람은 찼고 거리에는 변변한 가로등 하나 없었다. 그야말로 텅 빈 강변에서, 사십 분에 한 대 온다는 버스를 쫓기듯 탔다. 버스는 조용한 주택가에 섰다. 여기에도 사람이 없었다. 무서워서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길이 미끄러워 그럴 수도 없었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대학교 앞으로 갔다. 번화가인지 사람이 꽤 많았다. 학교 안으론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었고 그저 문의 유리창을 통해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대로 건너편에도 커다랗고 반짝이는 건물이 있어 그리로 가 보았다. 역시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안에는 정장을 갖추고 대화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영화 시사회가 열리는 극장이었다.) 밖에서 깨금발을 들고 건물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참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세상이 그곳에 있었고, 그것은 기대했던 것만큼 퍽 아름다웠지만, 보는 나로서는 퍽 쓸쓸한 풍경이기도 했던 것이다.
꿈처럼 프로펠러가 도는 곳
<프로펠러>의 배경은 환한 대낮, 어떤 주택의 마당이다. 마당에는 무용수들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격자무늬라곤 없는데도, 모두 다들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곳에 잘 자리잡고 있다.
무용수들은 정돈된 동작으로 정성들여 움직인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뻗어나가는 그들의 팔뚝은 희고 유연하고 명료하며 망설임이 없다. 밀고 당기며 가까워지다 멀어지는, 아름다운 팔과 다리. 잠잠한 흉통을 떨게 하곤 빠져나가는 숨결, 산들바람 같은……. 그들의 단정한 몸짓은 일상의 공간, 아파트보다 훨씬 낮고 편평한 지상을 비행하는 데 쓰인다. 낮은 고도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헤엄이라기보다는 비행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만큼 영상에서 대기의 색깔이 보이기 때문이고, 또 이 움직임이 활주로가 정해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모기 울던 오후 먼지 낀 선풍기 / 큰 방에 갇힌 나는 걸어가는 사람, 사람들’ <프로펠러>에서 제일 먼저 들리는 것은 바로 이 구절이다. 큰 방에 갇힌 ‘나’. 노래하는 이는 방 안에 갇혀 있다… ‘나가지 못해요 방세가 없어요.’ …갇혀 있다. 그리고 이 감금은 딱히 별나거나 유감스럽게 느껴지지도 않도록 선선하게 진술된다.
프로펠러를 ‘부르는’ 것은 마당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무용수들일 수도 있고, 한 번도 카메라의 시선에 들어온 적이 없는 집 안의 누군가일 수도 있다. 그 모호함을 살리는 것이 바로 무용수들의 지워진 표정이다. 그들은 주어진 움직임에 완벽히 충실하다. 프로펠러가 돌면서 목이 아프다고 호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지? 혹은 프로펠러가 비행 중 마주친
새들과 구름 별에게 다정하게 인사하는 것이라도 본 적이 있는지? 프로펠러가 하는 것은 감정을 표현하기 버거울 정도로 몰아치는 기계적 운동이며, 그 운동은 누구도 맞닥뜨리지 않을 수 있는 하늘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무용수들은 ‘날아다녀야’ 한다. 프로펠러처럼. 프로펠러가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처럼.
‘당신에게도, 나에게도 / 이 방 안에 갇혀 도는 우리는 / 프로펠 러 프로펠 러 프로펠 러 프로 펠 러’
아, 이것은 조금쯤, 울적함의 노래이다.
무용수들의 동작은 정말 ‘프로펠러답게’ 느껴지기도 해서, 바람을 일으키며 뻗어가고 굴러가는 그 디테일 자체를 고요하게 지켜보며 한 차례 감상하는 것도 좋겠다. 전문 무용인들이 아닌데도 쫀쫀하게 안무를 짜고 침착하게 안무를 소화했다. 그리고 또 한 차례의 감상 때엔 서사를 무리하게 읽으려들지 말고 커다란 공간과 시간을 지켜보면 더 좋겠다. 워낙 양감이 잘 잡힌 영상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따로 없이 전체가 함께 굴러가면서 만든 큰 그림이, 수축과 팽창이 자유로운 고밀도의 유기체처럼 다가온다. 한 줌에 다 들어오지 않는 귀중한 4분, 감금된 자의 4분이니 시들게 하지 말고 깊이 들이쉬자. 그리고 마지막으론, 거기서 더 멀찌감치 떨어져 한 번 더 화면을 보자. 놓쳤을지도 모르는 맨 처음과 끝의 화면을 새삼 발견했다면, 다시 시작이다. 아차,
<프로펠러>는 불 꺼진 방에서 프로젝터로 띄운 화면을 통해 재생되는 장면이었다. <프로펠러>가 도는 시멘트 마당은 결국 스크린에 영사되는 장면이고, 관람자는 ‘갇혀 있었다’.
눈이 약간 따갑다.
개척자의 원죄
‘Pioneer plaque’는 1970년대 초반 파이오니어 10호와 11호에 실려 외계를 여행하게 된 알루미늄 각판(刻板)을 일컫는다. 무인탐사선인 두 우주선이 외계 생명체에 의해 발견될 경우를 대비해 파이오니어 플랙에 지구에 대한 정보를 새겨 놓은 것이다. 나사는 파이오니어 10호와는 2003년에, 11호와는 1995년에 교신이 끊겼다고 밝혔다. 이제 파이오니어 플랙이 지구 바깥 누군가의 손에 들어갔을지 여전히 우주를 배회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뮤직비디오 <Pioneer Plaque>의 배경은 어두운 밤, 어떤 비어있는 건물이다. 별천지와는 동떨어진 이 공간은 다만 낯선 시선으로 샅샅이 수색된다. 홀로 담배를 태우고, 널부러지고, 입을 크게 벌리는 단 한 사람만이 공간을 배회한다. 화면 안에서 세계는 사정없이 분열하며 파들파들 떨린다. 명멸하는 영상은 소리와 괴리 없이 겹쳐진다. 그저 쌓거나 포개어둔 것도, 접착제를 써서 붙여둔 것도 아닌 것 같은, 말하자면 <Pioneer Plaque>의 시청각은 아슬아슬하게 진공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보이지 않는 흡판, 에일리언의 그것을 떠올리게끔 하는 무형(無形)의 힘이 그곳에 작용하는 것 마냥.
‘파이오니어pioneer’는 ‘개척자’다. 개척자는, 개척자지만, 아니 개척자이므로 우주에 홀로 남겨질 수밖에 없는 외로움과 막연함을 숙명으로 한다. 그 심정을 과연 누가 알아줄까. <Pioneer Plaque>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절망의 장면이다. 낮의 골목과 빌딩은 일상적인 곳이지만, 밤에 텅 빈 이 공간들은 낯설고 쓸쓸하다. 텅 빈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낯설고 쓸쓸한 것이 문제다. 낯설고 쓸쓸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이 문제다. 이 노래에서 진짜 두려운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어마무지하게 흉터를 얻고 홀로 남겨진 나만이 이 우주에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고독은 타인의 흔적을 통해 증폭된다. 뮤직비디오는 마치 공포영화처럼 인물의 근처에 타인의 흔적을 아로새긴다. 혼자만이 남은 골목에서 가로등의 불을 켠 것은 대체 누구인가? 기대어선 몸을 어루만지다 감춰진 손은 누구의 것인가?
저문 강 땅거미 진 들판의 적막은 차라리 괜찮다. 타일이 갈라지고 형광등이 꺼진, 어두컴컴한 인공의 공간에 남아 있는 타인의 흔적이 진정 무섭다. 황무지보다는 폐허에서 더 울먹거리고 싶어진다.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이 진정한 공포이고 외로움이다. <Pioneer Plaque>는 그 외로움의 징표다. 거기에 그려진 두 명의 벗은 인간마저 한 쌍을 이루고 있다. 오직 나만이 혼자다.
무중력의 우주공간에서 깃발은 나부끼지도 못한다. 미아가 되어 부유할 뿐이다. 훈장은 녹슬지도 못한다. 산소가 없기 때문이다. 유리병 속의 편지처럼 기약도 없는 희망을 새기고, 파이오니어 플랙은 방랑한다.
‘수많은 것들을 경험했고 수많은 사람을 지나왔어 / 모두 나를 떠나고 아물 수 없는 상처만 남았지’
우울한 가사가 슬픔을 회고하면 다시 한 번, 개척자pioneer의 사명감은 누구를 위해 발휘되어야 했던 것인지 아득해진다. 그러면 목소리가 원망하듯 말한다. “You deserted me,” 너는 나를 저버렸어. 비옥하게 일구어져야 마땅할 개척자의 세상은 사막desert이 되고 말았다. 고독감과 단절의 위태로움은 반복되는 노랫말을 통해 관람자에게 고스란히 전이된다. 그러나 실은, 화자가 ‘나’라는 보장은 없다. 화자가 원망하는 ‘너’ 중의 한 사람이 나일 수도, 얼마든지 있다.
이번엔 귀가 살짝 멍멍하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
여행에서 빈 다음으로 간 곳은 베네치아였다. 저녁 늦게, 또다시 혼자 나갔다. 관광객이 모이는 산 마르코 광장 반대편으로 걷자 대형 마트가 나왔다. 베네치아니까 해산물을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대충 비슷한 게맛살을 사서 나왔다. 그러다 길목에 빈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낡은 건물 안에는 접이식 의자가 몇 개 놓여 있고, 영어 자막이 삽입된 영상 하나가 재생되고 있었다. 영상은 어떤 이의 유년기를 서술하고 있었다. ‘내가 살던 아파트에선 젖은 개 냄새가 났다 ... 나는 체리나무에서 체리를 따서 씨앗까지 먹었다. 내 형제는 이제 내 뱃속에서 체리나무가 자라날 것이라고 했다. 더 잘 됐지 뭐, 체리나무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되니까.’ 이번에도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게맛살을 하나 꺼내서 먹었다. 아니, 이번에 느낀 이상한 기분은, 조금 다른 것이었다. 이렇게 누군가의 세상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은 꽤 감동적인 일이 아닌가, 하는.
이랑의 <프로펠러>와 후쿠시 오요의 <Pioneer Plaque>를 위해 만들어진 각각의 뮤직비디오는 서로 아주 다른 장면을 보여준다. 두 화면을 묶어둘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낯선 장소를 만났을 때 목깃을 스쳤던 첫 번째의 ‘이상한 기분’, 이방인이 된 그 때의 기분이었다. 두 화면을 번갈아 계속 재생하다 보면, 두 번째의 ‘이상한 기분’이 마저 찾아왔다. 갇혀 있어도, 혼자 있어도, 결국 누군가는 그것을 보고 있구나.
아무도 나를 모르는 세상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세상을 극복하는 법은 결국 계속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감히 어두운 상영실에서 이 두 개의 화면을 보듯이. 아무도 나를 모르는 세상이라도 좋다. 내가 아무라도 알아주면 그만이다.■
**사진출처 : http://www.youtube.com 유투브 - 이랑, 후쿠시오요 MV 및 공연실황 캡쳐
***지난 12월 11일과 12일, 소모임 레코드 소속의 이랑밴드의 '프로펠러' 뮤직비디오와 영기획에서 후쿠시 오요fuckushi oyo의 'pioneer plaque'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인디언밥에서는 유투브 및 소속사 홈페이지에 올라온 후쿠시 오요와 이랑밴드 MV에 대한 리뷰를 싣는다. 후쿠시 오요와 이랑밴드는 모두 자립음악생산조합(www.jaripmusic.org)의 개인 조합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뮤지션이다.
필자_김송요
소개_느낄 수 있는 모든 것에 호기심도 애정도 욕심도 많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에 혹해 대학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했습니다. 꾸준히 감각의 그릇을 키워서 넉넉한 감정을, 이야기를 고봉으로 담아내고 싶습니다 |
1.후쿠시 오요fuckushi oyo는 영기획YOUN,GIFTED&WACK의 (2012년 12월 12일 현재) 유일한 여성 음악가다. 2.후쿠시 오요는 랩탑과 기타 한 대로 로우파이하고 꿈결 같은 순간을 놓치지 않는 음악을 총 4개국어로 노래한다. 3.후쿠시 오요의 페이스북 페이지는 이름에 fuck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본인의 이름으로 url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4.’pioneer plaque’는 [영기획YOUNG,GIFTED&WACK SELECTED WACK WORKS VOL.1]과 [PANGS RUINS]에 수록된 후쿠시 오요의 노래 중 가장 길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쓸쓸한 곡이다. 5.’pioneer plaque’ 뮤직비디오는 2012년 12월 12일 12시에 영기획 사이트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6.’pionner plaque’ 뮤직비디오는 ML이 감독했다. ML은 싸이코반psycoban의 ‘돌아버리는 삼각지’ 뮤직비디오의 감독이다. 7.’pioneer plaque’ 뮤직비디오는 당신에게 한파가 예고된 올 겨울 당신에게 가장 춥고 쓸쓸한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다. 8.후쿠시 오요는 ‘pioneer plaque’ 뮤직비디오에 대해 ‘시우민 워 시후안 니’라 코멘트 했다.
▲ 후쿠시 오요 후쿠시 오요의 MV를 볼 수 있는 곳 >>> http://younggiftedwack.com/archives/4321 --------------------------------------------------------------------------------------------------------
▲ 이랑밴드 여성 음악가 이랑의 ‘프로펠러’ 뮤직비디오가 공개됐다. 본 뮤직비디오는 영화 감독이기도 한 이랑이 직접 감독하고 나경호, 이랑, 이명하, 이지선, 유혜미, 조옥원이 출연했다. 이 중 나경호는 안무를 맡았다. 선선하고 정겨운 뮤직비디오의 장소는 카페 컬리솔 협찬. 이랑, 프로펠러 음반 욘욘슨 (2012) 중에서- 연출 이랑 | 촬영 최아름 | 편집 이랑 정원식 | 안무 나경호 | 출연 나경호 이랑 이명하 이지선 유혜미 조옥원 | 장소 제공 및 도움 까페 컬리솔 김라흐 김둘리 조인철 | 제작 소모임 음반 이랑 공연 소식 twitter.com/langlee_band facebook.com/LangLee.Seoul 컬리솔 twitter.com/curlysol curlysol.com 소모임 음반 twitter.com/somoim_records somoim.co.kr -------------------------------------------------------------------------------------------------------- ***본문 내용출처 : 영기획 홈페이지 >>> http://younggiftedwac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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