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아름다운 동행 - 극장 안에서의 아름다운 동행

2013. 2. 27. 01:15Review

 

극장 안에서의 아름다운 동행

<아름다운 동행> 리뷰 @혜화동1번지

 

글_리경

 

1.

“혹한의 겨울보다 더 두려운 것은, 잊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재능교육 해고노동자와 대학로 연극인이 함께하는 단막극 페스티벌 <아름다운 동행>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위의 말은 재능교육 지부 노동조합위원장 유명자씨가 인터뷰 중 했던 말이다. 자신들의 고통에 타인이 무관심할 때 느끼는 심리적 추위가 물리적인 추위보다 더욱 위협적이라는 것이다. 이 말에 공감한 이양구 연출가가 주도하여 공연을 기획하고, 66명의 연극인들이 참여하고, 314명의 동참자가 생기고, 많은 후원인들이 예산을 지원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연극 <아름다운 동행>은 세 방향을 향해 있다. 먼저,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에게 누군가는 당신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그들을 위한 함성이다. 이 함성은 고통당하는 자들을 향한 것이다. 다음은 불특정 다수에게 흔드는 깃발이다. 접근도가 높은 인터넷 웹상이나,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 재능교육 당사와 혜화동 종탑과 가까운 ‘혜화동 일번지’ 극장을 오가는 사람들에게 잠시라도 이 사태에 눈을 돌리게 하는 구호탄이다. 이 소리는 대중을 향해있다.

마지막으로 <아름다운 동행>은 극장을 찾아오는 관객을 향한다. 연극을 올린다는 것은 개인들이 SNS로 이 문제를 리트윗하거나, 혜화동 성당 아래에서 손을 흔들거나, 천막을 방문하거나, 노동집회에서 구호를 외치는 행위와는 다르다. 또 시나 소설을 쓰거나 영상을 찍는 행위와도 다르다. 자신의 일상에서 두 시간을 특정 장소에 와서 나와 같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과 모여있겠다는 의지를 낸 사람들, 바로 관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마지막 방향, 극장 안 연극공연 <아름다운 동행>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혜화동 로터리 너머로 보이는 성당 위 십자가. 그 곳에 사람이 있다. 왼편으로 재능교육 본사.

 

2.

<아름다운 동행>은 7편의 단막극이다. A팀과 B팀으로 나눠져 각 팀당 4편 / 3편이 공연되었다. 단막극들은 옴니버스 형식이 아닌, 독립된 개별 연극으로 존재한다. 적어도 스토리 한에서는 그러하다. 개별 공연마다의 특징도 있지만, 무대가 관객을 어느 정도 거리에 위치시키는가를 두고 크게 두 묶음으로 구분해본다.

A팀에 속한 <한밤의 천막극장>, <다시 오적>, <이건 노래가 아니에요>의 경우는 제 4의 벽은 허물어지고, 무대는 실제 자기공간을 지시하며 관객을 무대로 끌어들인다. <한밤의 천막극장>은 천막 안이라는 공간을 재현하지만, 후반부는 쇼맨들이 관객들에게 직접 말을 걸고, 관객을 무대 위로 불러 짜파게티를 먹고, 커피를 들고 관객석으로 들어가 앉는다. <다시 오적>의 소리꾼과 무희는 판소리 형식이 그러하듯, 앞에 앉은 관객에게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을 띈다. 소리꾼은 실시간 관객의 반응을 받아 재반응하고, 끝에는 관객들이 소리의 몇 구절을 따라하게 한다. <이건 노래가 아니에요>는 라디오와 거리공연의 틀을 빌어 배우(가수)가 관객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노래를 부르고, 버스킹으로 돈을 걷는다.

B팀에 속한 <살인자의 수트케이스를 열면>, <비밀친구>의 경우는 무대가 특정 공간을 대리하면서 연극적인 공간임을 부각시키는 장치들을 통해 관객과 적정거리를 유지한다. 배우는 관객을 인식하지 않으며, 관객을 완전한 관찰자 입장에 둔다. <살인자의 수트케이스를 열면>은 사무실이라는 공간을 보여주는데, 일하고 있는 한 노동자, 그 노동자의 사회 초년생일 때의 자아,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일터의 불합리에 저항하려는 자아를 동시에 무대로 올린다. 한 인물을 세 지점의 시간을 잡아 세 배우 연기하는 것이다. 또 과거의 자아들은 각각 고양이와 양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비밀친구> 역시, 상훈의 과거와 현재 시점을 오간다. 그런데 두 개의 시간적 시점만이 아니라, 오늘 아침 이불을 뒤집어 쓴 상훈과 상훈의 심정을 말하는 상훈으로 두 역할(배우)이 동시에 무대에서 연기한다. 가면을 쓴 두 배우가 상훈의 어린 시절 친구이자 혹은 과거 내면의 소리일수도 있는 역할로 등장해있다.

또 다른 기준에서 하나로 묶어볼 수 있는 두 공연이 있다. <이건 노래가 아니에요>와 <비밀친구>이다. 이 두 공연을 앞서 언급한 기준에 비춰보면 서로 다른 지점에 있지만, 재능교육 사태를 개인의 고통과 사회구조의 관점에서 동시에 다룬다는 점에서 궤를 같이한다.

 

김슬기 작/ 부새롬 연출의 <이건 노래가 아니래요> 중 이겨을 역의 배우 이지혜

 

김슬기 작/ 부새롬 연출의 <이건 노래가 아니래요>는 ‘하고싶은 노래하는’ 가수를 꿈꾸는 이겨을을 주인공으로 하는 1인극이다. 이겨을은 버스킹을 하며 배고프지만 거리의 따듯함을 느끼면서 자신이 살아있음 느끼던 때와 김갑중 대표 밑으로 들어와 그의 비위를 맞추며 시키는 노래를 하는 두 시간 사이에서 갈등한다. 시간이 지나가며 대표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최초에 자신이 가수가 되기를 결정했던 이유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그녀는 조금씩 ‘나는 누구인가’라는 회의감에 빠져든다.

“김갑중 대표님이 저보고 사장이래요.” 라는 말은, 이겨을 개인이 겪는 내면 갈등을 사회구조의 차원으로 데려간다. 기업에서 대표와 사장이라는 위치는 개인을 호명하는 이름이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매겨진 사회적 위치다. 극에서 김갑중 대표는 사다리로 처리된다. 약자는 아무 감정도 없이 서 있기만한 사다리 같은 대상, 실재하는지 의심이 들 정도의 대상을 마주할 뿐이다. 사장이라는 위치에 놓여졌지만 실상 고용직원 이하의 인간적 수모마저 견뎌야하는 이겨을은 사실상 사장이 아니라 앵벌이다. 이는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노동자에게 ‘특수고용노동자’ 라는 이름을 붙여 회사 대 노동자가 아니라 회사 대 회사의 구조에 놓음으로써 회사가 응당 제공해야 하는 노동자에 대한 권리를 배제시킨 재능교육(기업)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낸다.

정소정 작/ 윤한솔 연출의 <비밀친구>는 상훈이의 어느 날 아침에서 시작한다. 극은 상훈이가 엄마가 깨우고 핸드폰이 몇 번씩 울려도 계속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는 이유를 풀어간다. 상훈은 오늘 출근해서 동료들에게 해고통보를 해야 한다. 비보를 전해야하는 상황에 동의하기 어려운 상훈은 그건 아니라고 저항하고 싶지만, 거기에 따라올 불이익에 주저한다. 그의 내면의 이 갈등은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대사도 없이 줄기차게 비틀거리는 이불속의 상훈을 통해 시각화된다.

상훈은 결국 회사 부장님과 통화를 한다. 자신 있게 소신을 말하라는 또 다른 자아의 목소리에도 결국 의견을 말하지 못한다. 다시 애써 부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용기를 내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지만, 부장의 반응은 차갑다. 자신보다 약자의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입은 옷을 벗어주기도 하던 상훈은, 출근이 급해지니 옷을 다시 달라고 한다. 자연인 상훈은 약자에게 옷을 주지만, 회사원 상훈은 자기가 살기 위해 다른 이의 헐벗음을 묵인해야 하는 것이다.

위의 두 극에서 인물이 겪는 갈등은 끝내 해결되지 않고 구조의 문제에서 심화된다. 극은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이 겪는 개인내면의 고통이 사회 구조의 문제에 기인한다는 점을 짚고 있다. 갈등은 보통 개인이 한 쪽을 선택하는 순간 끝나는데, 여기서 문제는 어느 쪽을 선택해도 치러야 할 비용이 너무 크다는데 있다. 이겨을은 거리의 추위를 벗어나는 대신 대표의 시다바리가 되어야 하고, 그마저 싫으면 자신의 재능과 꿈을 포기해야 한다. 상훈 역시 평범하게 살기 위해 동료들의 생계줄을 끊는데 동참해야하고, 인간적 도의를 지키려한다면 본인의 생계줄이 끊기는 상황을 감수해야한다. 이렇게 사회 구조가 고통이 근원임에도, 사회는 (혹은 이 구조에서 득을 보는 자는) 책임을 개인의 몫으로 돌려, 선택한 결과를 그저 받아들이고 그에 대한 비용을 온전히 혼자 감당하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정소정 작/ 윤한솔 연출의 <비밀친구>의 한 장면

 

3.

<아름다운 동행>은 최초에 ‘잊혀지는 것이 두려운 고통 받는 이들과 동행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시작되었다. 이 후 공연은, 그 자체로 재능교육을 포함한 해고노동자, 노동운동가들에게 응원의 메시지가 되었고, 미디어에 노출되며 대중에게 ‘재능교육 사태’에 한 번 더 고개를 돌리게 했다. 또 연극 매체의 특성인 집단성, 현장성, 유희와 놀이성 등을 통해 극장을 찾은 관객들에게 연극과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의 아름다운 만남을 선보였다.

다만 이러한 여러 긍정적 측면을 빌어 아쉬운 점을 들자면, 관객이 7편의 공연을 다 보아도 소개 책자를 읽기 전까지는 재능교육 사태의 구체적인 정보를 알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데 동행은 공감을 전제로 하고, 공감은 이해를 통해 생기며, 이해는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쌓인다. 동행을 하자면 파편들이라도 정확한 정보가 필요한 것인데, 재능교육 사태의 과정이나 원인, 해고노동자가 겪은 스토리 등을 극장 안에서 마주하기 어렵다. 그래서 관객의 공감은 극장 안에서 재능교육 해고노동자들에까지 닿지 못하고 극의 인물에서 멈추고 만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여 그와 같이 걷는다는 것, 행위 자체로도 이미 아름다운 여정인 연극 <아름다운 동행>. 이제 연극은 막을 내렸지만, 동행의 걸음을 함께 시작했던 참여자, 지지자, 후원자에 더해 극장을 찾았던 관객들의 걸음, 그 아름다운 동행이 함께 이어져가기를 소망해본다.

 

▲ <아름다운 동행>을 만든 사람들. A+B팀 단체사진 (사진제공, 드림아트펀드)

 

 필자_리경

 소개_"맥락있는 대화 환영" (queen0225@y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