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야간비행 - 어둠속을 헤매이며 날아가는 삶과 예술

 

어둠속을 헤매이며 날아가는 삶과 예술

<야간비행>  

극단 청년단 @ 산울림 고전낭독극장

 

글_박도현

 

2013년 1월 4일부터 3월 10일까지 산울림소극장에서 ‘산울림 고전극장’이라는 이름의 낭독공연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에드가 앨런 포의 <검은고양이>, <심술궂은 어린 악마>, <모렐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라쇼몽>,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 현진건의 <새빨간 얼굴> 등의 작품이 준비되었다. 이 글은 2월 14일부터 2월 24일까지 공연된 ‘극단 청년단’의 <야간비행>(연출 민새롬/출연 왕보인, 윤정욱, 곽홍진)에 관한 리뷰다.

원작이 있는 공연은 크게 세 가지 관극점이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 이야기를 어떻게 무대화했는가? 원작을 어떻게 변형했는가? 특히 희곡이 아닌 시, 소설을 공연에 쓰기 쉬운 낭독공연의 경우, 세 번째 관점이 가장 흥미롭다 하겠다. 이 글도 세 부분으로 나누어 먼저 원작 <야간비행>(이하 원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음으로 낭독공연 <야간비행>(이하 공연)에 대해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낭독공연 자체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삶이란 어둠 속을 계속해서 날아가는 것

<야간비행>(1931)은 작가 생텍쥐페리(1900~1944)가 항공우편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소설이다. 그는 이 작품으로 프랑스의 주요 문학상인 페미나 상을 수상한다. 그 전까지 단 한 권의 소설만을 출판했을 뿐인 신인 작가에게 이 상은 인기와 더불어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가져다 주었으리라.

원작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지사를 둔 어느 항공우편회사의 이야기이다. 총책임자이자 본부장인 리비에르, 직원을 관리하는 감독관 로비노, 강건한 조종사인 펠르랭과 파비앵 등이 주요인물이다. 이야기는 주로 리비에르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리비에르는 완고한 사람이다. 직원과 사적인 관계를 맺지 않는다. 사사로운 감정에 상벌을 내리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도 규칙을 엄격히 적용한다. 그의 삶은 일 그 자체이다.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소식에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배우 없는 빈 무대를 보듯 안타까워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건 야간비행에 관련된 일이다.

야간비행. 일견 무척 낭만적으로 느껴지는 단어다. 하늘을 날며 모두가 자고 있을 대지를 굽어보는 일. 신이라도 된 느낌일 것이다. 하지만 야간비행은 무척 위험한 일이다. 특히 구식 비행기는 안전성도 지금 같지 않고(지금의 안전성은 수많은 희생과 추락으로 이뤄진 것이리라), 야간에는 더욱 위험하다. 구식 비행기를 타고 빛도 길도 보이지 않는 밤하늘을 날아야 하는 야간비행.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조종사들은 매 비행마다 목숨을 걸었다.

그럼에도 리비에르가 야간비행을 고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 속도 경쟁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낮에는 철도나 배를 앞서지만 밤에는 뒤처지고 있습니다.” 항공우편회사의 총책임자로서 신속하고 안전한 우편 배달에 힘을 다하는 것이다. 수반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야간비행의 위험성을 높일 수 있는 두려움, 게으름, 사적인 친분 등의 감정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다.

 

 

어느 날 유럽 행 비행기가 악천후와 엔진 이상 문제로 돌아온다. 리비에르는 정비 책임자를 해고한다. 오래된 경력, 뛰어난 솜씨, 큰 애사심도 소용 없다. 조종사에게는 엔진 이상 문제를 숨긴 채 그를 문책한다. 아무리 날씨가 험해도 기지국의 안내에 따라 비행을 계속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에서 돌아온 직원에게 사지로 전진했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 역시 따뜻함 속에 살고 싶다. 사랑 받으려면 동정하면 된다. 나는 동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는 그를 두려움에서 구한 것이다.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미지의 세계에서 그를 끌어낸 것이다.’

도대체 왜 리비에르는 이토록 엄격한 것일까?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도 인생의 의미를 찾는다. ‘어떤 군중 속에서든 자신도 모르게 위대한 사명을 띤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인생이란 사명이며, 사명은 곧 자신의 일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다음과 같이 고민한다. ‘인생은 온통 모순 덩어리다. 그저 할 수 있는 한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 창조한다는 것, 자신의 덧없는 육체를 무엇과 바꾼다는 것은……’

리비에르의 고민은 조종사 파비앵의 죽음으로 절정에 이른다. 파타고니아 루트를 비행하던 파비앵은 갑작스런 폭풍우에 휘말리고, 설상가상으로 모든 주변 지역이 통신불능이 된다. 그에게는 결혼한지 두 달도 안 된 사랑스러운 아내가 있다. 남편이 비행에서 돌아올 시간마다 회사에 전화해 남편의 안전을 묻는 아내. 그 아내의 물음에 회사가 제대로 답해줄 수 없는 상황이 온 것이다. 리비에르는 파비앵의 아내와 대면한다.

‘이 부인 역시 가족의 이름으로 자신의 의무와 권리를 말하고 있다. 저녁 식탁을 밝히는 등불의 이름으로, 자신의 육체를 요구하는 다른 육체의 이름으로, 희망과 애정과 추억의 이름으로. 그녀는 자신의 행복을 요구했고 그것은 옳은 것이다.’ 리비에르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의무의 실패를 바로잡는 것이 아닌, 의무와 의무의 충돌을 중재하는 일이다. 그 또한 삶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이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극복한다.

‘무슨 명목으로 내가 그들을 황금빛 영역에서 빼냈단 말인가? 그러나 운명적으로 언젠가는 그 황금빛 성전도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린다. 늙음과 죽음은 냉혹하게 성역을 파괴한다. 세상에는 인간의 생명보다 영속적인 무언가가 존재할지 모른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것 아니었던가? 옛 통치자들은 인간의 고통에는 연민을 느끼지 않았지만,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는 엄청난 연민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지도자는 사막에 묻히지 않을 돌기둥이나마 세우고자 백성을 끌고 산으로 간 것이다.’

파비앵의 죽음을 통해 리비에르는 덧없는 육체의 대가로 무엇을 창조할지 결정한다. 야간비행이 중지될 거라는 소문이 퍼지지만, 리비에르는 야간비행을 고수한다. 조종사들은 파비앵을 잠시 추모한 뒤, 다시 비행기를 띄운다. 리비에르의 규칙은 건재하고, 의무는 계속된다. 이 인생의 지속성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결론지으며 원작을 끝맺는다.

‘승리니…… 패배니…… 이런 말들은 아무 의미도 없다. 생명이란 더 값지고 더 단순한 것이다. 리비에르가 겪은 패배는 어쩌면 진정한 승리에 가까워지는 하나의 약속인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앞으로 전진하는 일뿐이다. (중략) 리비에르는 그의 엄한 시선 아래 고개를 숙인 사무원들 사이를 지나 천천히 걸어서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위대한 리비에르, 고된 승리를 짊어진 승리자 리비에르였다. (끝)

이 결말은 다소 혼란스러운데, 승리와 패배를 ‘아무 의미 없는 것’으로 격하시킨 뒤 리비에르가 ‘패배로써 승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작가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파비앵의 죽음에도 ‘계속 앞으로 전진할 것’이라고 다짐하는 리비에르는 작가의 화신이 된다. 이것은 종교적 자세이다. 믿음이 보답 받지 못해도 믿음 자체가 하나의 도덕률이 된 상황이다. 아름다우나 위험하다. 이 결론은 해결이라기보다 한계라고 부름이 옳다. 작가 개인의 선함과 상관없다. 이러한 사명감은 파시스트와 메시아 모두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이러한 결론이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이유는 파비앵의 죽음이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는 멋진 죽음을 맞는다. 그의 죽음은 불가항력적이었다. 만약 리비에르와 직원들이 게으름을 피우다가, 혹은 실수로 파비앵을 죽게 했다면 주제는 축소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모두가 한치의 실수도 없었다. 다만 자연이 변덕스러웠던 것이다. 파비앵은 대자연 속에서 장엄하게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포기 아닌 전진을 택한 리비에르가 이상적 인간으로서 보편성을 얻는다. 인생의 의미를 찾으려는 인간은 스스로 의무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인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어둠 속에서 의무는 빛이 되어 비슷한 사람을 모으고 다른 이의 길라잡이가 된다.

 

 

공연 분위기와 원작과의 차이

이제 공연을 살펴보자. 공연은 원작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극장에 들어가니 앤틱 테이블 두 개가 놓여 있다. (1920년대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항공회사에서 어떤 가구가 쓰였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당시 쓰였을 거라 믿음직한 디자인의 가구다. 로비노의 책상에는 타자기가 놓여 있다. 리비에르의 책상에는 남미 대륙의 미니어처가 눈에 띈다. 사람 키만한 높이의 단이 무대 뒤를 채우고 있다. 그 위에 의자 하나가 어둠 속에 묻혀 있다. 아마 하늘을 나는 특별한 사람들을 위한 공간일 것이다. 사방이 종이 박스로 둘러싸여 있다. 단 밑에도, 책상 주위에도. 일이 많은 회사라는 게 느껴진다.

로비노가 무대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수염을 기르고, 안경을 썼다. 품이 넓고 어두운 색감의 코트가 고전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을 연상시킨다. 뒤이어 들어오는 리비에르도 수염을 길렀다. 그는 파이프로 담배를 피운다. 곧이어 등장하는 단 위의 주인, 파일럿 파비앵 또한 구형 고글에 무스탕 재킷을 걸치고 있다. 그들은 전화기에 달린 손잡이를 돌려 전화를 걸고, 모스 부호로 교신한다. 공연은 작품의 시대에 맞는 복식과 도구를 재현했다.

로비노는 멋진 황금 들녘에 대한 묘사 뒤에 “리비에르는 나에게 시가 아니라 보고서를 쓰라고 말했다.”라는 말로 자신의 감수성을 드러낸다. 그는 자신의 일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한 자에게는 사랑을 갈구하고 고민을 토로하고 싶은 욕심이 더 강하게 나타난다. 로비노도 그렇다. 누군가의 사랑 편지나 작은 수화물을 나르기 위해 수많은 조종사들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 대해 고민한다. 공연에서 주로 관찰자의 역할을 맡는다.

단 위의 주인, 파비앵이 나타나 양과 목동, 농부의 빛에 대해 말한다. 자신의 식탁만을 비추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 불빛이 누군가에게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소중한 빛이 되고 있다는 것을 농부는 모를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타고 있는 금속체를 살아있다고 한다. 실제로 그렇다. 허공은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다. 하늘은 언제든 낯선 방문객을 내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위협 속에서 비행기는 그의 유일한 아군이다. 조종간을 붙잡은 그의 손은 비행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비행기와 공유한다.

 

 

공연은 비행의 느낌을 프로젝터로 흔들리는 물결을 쏘아 표현했다. 어둠 속에서 기체의 흔들림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장치라 하겠다. 그러나 그 외에는 비행기의 느낌을 낼 수 있는 장치가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과(조종간 하나만이라도), 보다 다양한 배경의 사용(기술적인 문제가 있었겠지만)이 아쉽다. 배우의 손짓만으로는 비행의 정서를 온전히 전달하기에 버겁지 않았나 하는 느낌이다.

공연이 진행되며 등장인물은 리비에르, 로비노, 파비앵 셋이라는 것이 확실해진다. 따라서 내용의 변화도 있으리라. 원작에서 리비에르가 늙은 정비공 르루에게 “사랑에 빠져본 적 있나?”라고 묻고, ‘시간이 없었다’고 답하는 르루에게서 오히려 인생에 대한 만족을 엿보는 장면이 공연에서는 리비에르와 로비노로 변경되어 있다. 이 대화는 인생에서 연인과의 사랑이 아쉽지 않을 만큼 확고한 만족감을 가진 인물에게서 가능한 것이니만큼, 삶의 건조함을 느끼고 있는 로비노에게는 적합하지 않다고 느껴진다.

또한 조종사가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지는 장면이 원작에서는 유럽행 조종사로 나오지만, 공연에서는 파비앵으로 나온다. 둘 모두 아내가 있으니 수정 작업은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아내의 대사를 활자로 옮겨 프로젝터로 영사했는데, 그 느낌이 충분치 않았다. 명확한 상황 설명 없이 살아있는 배우와 활자 속의 가상 인물의 대화가 시작되어 낯선 탓도 있었다. 낭독공연인 만큼 장면의 전환마다 충분한 설명을 곁들여도 관객은 편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이후 공연은 원작의 일정 부분을 들어내고 이야기 전개를 한 방향으로 모은다. 각 인물에 대한 이해를 돕는 초반부가 지나가고, 중반 이후부터 리비에르의 고민과 파비앵의 죽음에 이르는 부분을 부각시킨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결말 부분이라 할 것이다. 원작과 달리 공연은 마지막 장면에서 파비앵과 리비에르를 한 자리에 등장시킨다. 리비에르는 파비앵의 죽음과 아내의 슬픔에 대해, 파비앵은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는 아직 몇 분 동안은 조종간에 운명을 맡기고 비행하고 있을 파비앵의 손을 생각했다. 애무를 하던 그 손. 어느 가슴 위에 얹혀 신의 손처럼 가슴을 설레게 했던 그 손. 어느 얼굴 위에 놓여 표정을 변하게 했던 그 손. 기적을 이루던 그 손을 생각했다. / 폭풍우 틈새로 마치 덫으로 유인하는 죽음의 미끼처럼 내 머리 위에 몇 개의 별이 반짝였다. 나는 그것이 함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빛에 대한 목마름이 너무나 강했기에 그만 올라가고 말았다. “정말 아름답군”’

그리고 상자 안에서 불빛이 하나 둘 켜지고, 파비앵이 상자를 개봉한다. 이어 무대 뒤에서 강렬한 빛이 비췄다가 다시 어두워진다. 상자는 일의 대상이다. 또한 여러 사람의 사연이 담긴 편지와 물건들이 보관된 장소다. 거기에서 나는 빛은 폭풍우 속을 날다 끝내 별빛을 향해 올라간 파비앵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파비앵에게 별빛은 삶이자 죽음이었고, 그것을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것은 리비에르의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공연은 이 모습을 은유하며 끝난다. 원작이 리비에르의 수도사적 성찰을 담담하게 이야기한다면, 공연은 특정 인물에게 포커스를 맞주지 않는다. 다만 리비에르의 입장과 파비앵의 죽음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원작의 마무리가 정서적 쾌감을 포기했다면, 공연은 이를 소박하게나마 취한 느낌이다. 의미와 전달에 있어 무엇이 더 좋을지는 개인 취향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체적으로 배우들은 부드럽고 낭만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이는 원작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작품 내에서 밤, 고요, 신비, 사랑, 영원, 빛, 평화, 아름다움과 같은 편안하고 따뜻한 단어를 계속해서 사용한다. 조종사의 귀환을 묘사할 때 ‘신비로 가득한 바다 같은 밤이 비행기를 돌려주었다.’라고 쓰지 ‘용감한 조종사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속을 뚫고 무사히 귀환했다.’고 쓰지 않는다. 비행기가 폭풍우를 만났을 때 ‘부드럽게 들어올려진 금속의 기체가 몸을 짓누르다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라고 쓰지 ‘충격을 받은 비행기가 요동치며 몸을 마구 흔들어대나 싶었더니 다시 조용해졌다.’라고 쓰지 않는다. (여담으로, 생텍쥐페리가 이런 문체를 갖게 된 이유를 용기에 대한 그의 인식에서 엿볼 수 있다. 앙드레 지드가 쓴 원작 서문에 나오듯, 그는 용기를 분노와 허영심, 고집과 쾌락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폄하한다. 그는 싸움을 반기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생존이란 싸움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이유로 배우들의 전반적인 연기도 부드럽고 따뜻하게 된 것 같다. 누구나 생텍쥐페리의 글에서 같은 느낌을 받겠지만, 개인적으로 보다 건조하게 표현되었으면 어땠을까 궁금하다.

이처럼 문장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낭독공연의 재미다. ‘그는 살아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세계에서 보석처럼 빽빽하게 쌓여 있는 별들 사이를 방황하고 있었다.’라는 문장을 읽을 때, 어떻게 읽어야 좋을지 끊임없이 고민하게 된다. 이는 모두에게 흥미로운 일이다. 나에게 있어 보물과 같은 구절을, 저 배우가 어떻게 말할 것인가? 내 상상 속에 있는 장면이,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이런 부분이 낭독공연의 대표적 관극점이라 하겠다.

 

 

낭독 공연의 낯설음을 벗겨내며

낭독공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많을 것이다. 보통 낭독공연이라 하면 다소 지루하게 느껴진다. 사실이다. 단상에서 그다지 흥미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보는 것만큼 삶의 장구함을 느낄 수 있는 일도 없다. 누군가 고전 낭독공연을 보러가자는 제안을 해오면 ‘고전’과 ‘낭독’이 주는 단어의 인상을 머릿속으로 슬쩍 가늠한 뒤 미안한데 나 그날 안될 것 같아 말하고 하릴없는 TV시청을 택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낭독공연이라고 가만히 서서 글만 읽는 건 아니다. 여러 시청각 장치로 무대를 꾸미고, 연기법 또한 다를 수 있다. 이 공연처럼 작품 배경을 정확히 구현할 수도 있다. 극단의 해석에 달린 것이다. 거기서 내가 알고 있던 작품을, 흥미는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접하기를 미뤄왔던 작품을, 존재 자체도 몰랐으나 인생의 시금석이 될 작품을 새롭게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사람은 문화생활을 필요로 한다. 지금도 사람은 영화를 보고, 콘서트에 가고, 맛있는 식당을 찾는다. 스노우보드를 타거나 래프팅을 한다. 여의치 않으면 TV라도 본다. 그 경험은 화젯거리가 되고,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사람 관계를 끈끈하게 만든다. 하지만 반복은 지루함을 낳는다. 지금도 영화, 밥, 카페라는 고리타분한 데이트 코스를 사랑의 힘으로 극복하는 많은 연인들이 있지 않은가? 즐거운 경험도 반복하면 내성이 생긴다.

이런 권태에 빠진 현대인에게 낭독공연은 매력적인 문화생활의 대안을 제시한다. 낭독공연은 일종의 미니콘서트와 같다. 혼자서든 여럿이든, 가벼운 마음으로 극장에 찾아가 새로운 경험을 하고 돌아갈 수 있다. 살아있는 오디오북, 움직임 있는 라디오극 같은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낭독공연과 친숙해졌으면 좋겠다. 리비에르는 음악회를 전전하는 군중을 보며 고독을 느꼈지만, 그의 마음을 알아주는 공연을 봤다면 또 달랐을 것이다. 누가 알까, 지금도 밤을 헤매는 사람들에게 빛이 되는 이야기들이 어디에 흩뿌려져 있을지.

 

사진제공_ 산울림 극장

  필자_박도현

 소개_극작가, 연극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