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3. 5. 00:57ㆍReview
안녕 야구, 안녕 예술
다큐멘터리 영화 <굿바이 홈런>
글_정진삼
나리.
첫 장면은 놀이가 아니라 훈련으로 변해버린 초등학교 야구부의 캐치볼 장면으로부터 시작해. 이 곳은 바로 강원도 원주. 야구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곳이지.
곧이어 고교야구시합 중계 장면이 이어져. 원주고 대 대구고. 연습경기이긴 하지만 상대를 봐주거나 하는 건 전혀 없어. 그래서인지 처참한 스코어가 화면에 깔리지. 16:0 카메라에 담긴 패배자의 표정에 머쓱하고 부끄러운 기색이 역력해. 경기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오는 버스안의 공기가 냉랭하지. 그래도 이들은 오늘의 패배를 잊지말자고 다짐해. 그리고 곧바로 돌아오는 리턴 매치. 결과는? 21:1 패배.
이런 최약체인 원주고 야구부에도 전학온 선수들도 있어. 강팀에서 주전에 끼지 못해 쫓겨난 후보선수들. 원주고에서야 비로소 자기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는 야구선수들. 야구에는 포지션이라는 것이 있어서, 한팀에 잘하는 사람이 서너명 필요없지. 어차피 경기에 나가는 것은 잘하는 한두명이니까. 밀린 아이들은 소외된 자신을 위해서 야구 명문고를 떠나 자신을 써줄수 있는 팀으로 온 것이지. 이들은 자신을 내친 팀에게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당찬 포부를 밝혀. 본떼를 보여주겠노라고. 그러나 그렇지 못해. 왜냐구? 또 졌으니까.
나리.
이 영화는 강원도 야구를 대표하는 원주고등학교의 야구부의 한 시즌을 다루고 있어. 이 작품의 미덕은 '여럿이면서 하나' 인 다양한 주체들을 보여준다는 데 있지. 이젠 흥행에서 밀려난 고교야구를 두고 선수들, 감독과 코치, 그리고 교장 선생님과 학교의 동문들까지 화면에 등장해. 패배감과 소외감에 질려버린 이들은 한 목소리로 변방지역의 야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지. 야구환경의 열악함, 팀관리의 어려움, 그리고 매번 반복되는 패배.
카메라가 다가오면 어색해하면서 장난을 그치지 않던 선수들도 주로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는 표정이 어둡지. 사정을 들어보니 한해 고등학교 야구부에서 700명이 배출되지만 프로의 부름을 받는 것은 70명 뿐이라는 것. 전국대회에서 관계자의 눈에 들어야만 선택이 되는데, 1회전 돌파도 어려운 원주고에서는 그 기회조차도 없다는 것. 프로에 지명되지 못한 나머지는 어떻게 되냐구? 독립리그와 실업리그가 없는 우리나라에서는 야구를 포기할수 밖에 없다고 해.
코치와 선생님들은 아이들의 '현재' 에 대해 걱정하지. 훌륭한 선수와 동시에 사회인으로 길러내야 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기에 이들을 더욱 통제하고 구속할수 밖에 없다고. 초심을 잃는 순간 이들이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더욱 많다고. 지금은 오로지 열심히해서 좋은 선수가되는 것 밖에는 달리 방도가 없다고.
한국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외국 용병은 "한국에서 야구는 인생이에요." 라고 말했다고 해. 그의 말을 곱씹어보면 야구는 야구고, 인생은 인생이어야 하지만, 허나 프로를 바라보는 이 아이들에게 야구와 인생이 분리될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이러한 아이들에게 야구 이외의 세상이 있다는 것과 야구 이후의 삶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는 교육제도가 참 야속하기만 해. 이들은 야구를 하는 고교생이 아니라 고교팀 야구선수로 길러지고 있는 것이지.
그럼에도 이들은 매일매일 훈련뿐인 일과를 충실히 수행해 나가. 자신의 야구가 조금씩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믿으면서. 휘두르고 던지고 달리고. 그런 점에서 이들의 삶은 어쩌면 예술가들과 비슷하지. 실전을 위해 무수한 연습의 반복을 감내해야 하는 지루한 삶이지만 그들에게 찾아올 기회를 위해서 구슬땀을 흘리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어.
나리.
이들의 경기가 다시 화면속에 펼쳐지지. 14:7 까지 앞서가는 원주고. 초반부터 승기를 잡고 점수차를 많이 벌려놓아서 이번엔 이기는 줄 알았지. 웬걸. 잘나가나 싶더니 결과는 16:15 역전패. 승부가 아슬아슬하게 결정나니 보는 이의 마음도 훨씬 더 허탈하지. 이길줄 알았는데... 이겼으면 좋겠는데... 어느순간 감정이입이 되어 나도 모르게 원주고 동문처럼 이렇게 외치고 있었어. "이겨라 좀!"
그러나 가장 속상한 것은 이들이겠지. 패배한 투수는 운동장 뒤편에서 눈물을 뚝뚝 흘려. 자기 때문에 졌다는 미안함. 그리고 이길수 있는 게임을 놓친 분함.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다가 아쉽게 패배를 겪게 되니 원주고 야구부원들의 마음가짐도 새삼 달라지게 되지. 옛날과는 다르게 때리지도 굴리지도 않는 코치진을 위해서라도 이들은 이를 악물고 연습을 이어가지. 무엇보다도 이들은 이기고 싶은거야. 지역예선을 위해 묵고 있던 모텔 옥상위에서 밤새 배트를 휘두르는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
다시 시작된 화랑기 야구대회. 기어코 기다리던 첫 승리를 따내. 돌아오는 버스 안에는 기쁨과 흥분이 가득하지. 아이들의 표정도 의기양양과 자신만만. 역시나 지는 야구보다는 이기는 야구가 재미있는 법. 코치도 카메라에 대고 한마디 거들지. "누가 지나가면서 이러는거에요. 말도안되는 야구를 하는 애들한테 졌다. 우리보고 말도 안되는 야구래요." 그러면서 그 굴욕을 갚아주리라 다짐하지.
누군가의 눈에는 원주고의 야구가 말도 안되는 야구로 보였겠지만, 원주고는 드디어 원주고의 야구를 발견했던 모양이야. 팀플레이를 통해 착실히 승을 챙겨가기 시작한거지. 황금사자기, 청룡기에서 1회전도 못 넘기고 좌절했던 원주고가 화랑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제주고, 광주 진흥고, 제물포고를 파죽지세로 격파하며 전국대회 4강에 진입하게 된거야. 더군다나 8강에는 숙적이었던 제물포고를 상대로 승리하게 되었지. 스코어는 8:4 인상적인 장면은 만사제치고 응원을 온 원주고의 동문들이 감격에 겨워 기뻐하는 모습이야. 이들은 자신들의 후배를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하지.
점점 위로 올라가니 마주하는 팀도 만만치 않아. 괴물이라고 불리는 고교 루키들이 엄청난 볼을 뿌려대고, 장타를 쳐내. 전국의 탑클래스를 자랑하는 부산상고와의 대결. 하지만 원주고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지. 자, 1회부터 3:0 으로 앞서 나가기 시작하는 원주고. 6:1로 앞서가던 원주고였지만, 에이스 투수가 내려가자 금세 위기가 찾아와. 6:5. 그리고 6:7 그리고 9:6 으로 역전을 허용하지. 어느덧 9회말. 앞선 두 타자들이 아웃이 되고, 세번째 타자가 2루타를 치고 나갔어. 그리고 원주고 야구부 주장의 타석. 자, 경기는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의 제목처럼 뒤집기 한방이 터졌을까?
나리.
그해 고교야구에서 원주고는 돌풍을 일으킨 주목할만한 팀으로 이름을 알렸다고해. 그리고 영화는 다음과 같은 자막을 보여주지. "원주고는 그해 의외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야구 선수 가운데 단 한명도 프로에 지명받지 못했다."
자, 카메라는 이제 고교야구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 선수들을 향하지. 프로에는 지명을 받지 못했지만, 대학에 진학해서 야구를 계속하고 있는 선수도 있고, 중학교로 가서 코치생활을 하고 있는 선수도 있어. 그러나 태반이 선수생활을 그만둔 상태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져. "(야구 안하니까) 어때?" 보는 사람은 참 먹먹했지만, 그들은 씩씩하게 대답하지. "(생각보다) 괜찮아요."
아직 젊은 이들은 야구가 아니어도 열심히 할수 있는 일을 찾고 있었어. 야구 이후의 삶에 대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는 않았지만 그 길을 스스로 모색해나가고 있던 거야. 그래, 원주고 야구부 감독의 말처럼, 이들은 아직 인생의 1회 정도를 마쳤을 뿐이니까, 앞으로 역전할 순간도, 승리할 찬스도, 혹은 후회없는 경기를 펼칠 수 있는 기회도... 언제든 오겠지. (오겠지...)
나리.
예전에 “우리가 맘편히 예술을 그만둘수 있을까?” 라는 제목의 전시회를 본적이 있어. 미대의 졸업전시였는데, 선택받지 못한, 살아남지 못한 학생들이 어쩔수 없이 미술을 중단하게 되는 속사정을 오히려 드러내놓은 경우였지. 발랄하고 도발적인 전시였지만, 그 뒤에 서려있는 어린 예술가들의 아픔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했어. 예술, 제도, 재능, 생존, 청춘, 독립, 대중, 환호, 실패... 자신이 해 왔던 것을 그만두는데 마음이 편한 사람은 없겠지. 허나 이 영화 속 아이들을 통해서 뭔가를 조금은 알 것 같았어. 중요한 것은 야구와 예술 그 자체보다도 이를 통해 구현된 개개인 삶의 충직하고 숭고한 순간들이며, 그 이후에도 야구적/예술적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임을.
그래서 이 영화는 꼴찌들이 무언가를 해낸다 (혹은 최선을 다하지만 망한다)는 플롯구성 대신 '삶의 연속성' 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어. 역전이나 승리로 끝을 의미하는 굿바이가 아니라, 이들이 보냈던 시절에 대해 안녕을 고하며, 그 에너지 넘치는 시절을 만끽하게 해준 야구에게 보내는 이별인사. 그리고 삶은, 야구는, 예술은 아직은 몰라.
이 영화를 연출한 감독은 이 영화에서 등장한 원주고의 졸업생이라고 해. 야구를 좋아하는 감독이 선수들의 이야기를 영화에 담고자 했는데, 결국 그는 자신의 모교 후배들을 찍게 되었지. 촬영을 시작하면서 감독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을거야. 승리와 환희의 순간보다는 패배와 고통의 지점을 더 많이 맞닥뜨려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영화가 결국 제도와 현실의 벽 앞에 멈추게 될 것이라는 것을.
나리.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그 장벽을 깨거나 이를 넘는 방식을 알려주려는 데 반해 이 영화는 그 앞에서 그 고민을 여전히 이어가지. 아마 프로에 원주고 학생이 한명이라도 들어갔다면, 이 다큐의 방향이 달라졌을지도 몰라. 하지만 감독은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한 패배자들을 극적으로 도구화하여 뭔가를 제시하기보다는 있는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줘. 어쩌면 그것이 각본없는 야구의 본질과 사실을 그려내는 다큐가 절묘하게 동기화되는 지점이 아닐까.
픽션보다 극적일수는 없겠지만, 그래서 더욱더 깊은 사실적 울림을 주는 다큐 영화. 야구로 인해 행복했고, 즐거웠던 이들이 미화되고 박제되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존재진행형으로 남아있는 영화. '야구' 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주체들이 중심이 아닌 곳에서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 영화. <굿바이 홈런> 이었어. 그러한 사실을 많은 사람들도, 영화의 관객들도, 야구의 관중들도 공감해지길. 그러니까, 나리. 따스한 봄이 되면 우리 고등학교 야구경기 보러갈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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