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단상들] 다리살롱 <Nahree Chamber Series> 공연

2013. 8. 14. 00:48Feature



다리살롱 <Nahree Chamber Series> 공연

음악을 넘어선, 예술과 함께 사는 사회를 꿈꾸는 단체 - Nahree

 


글_ 곽준성

우선 필자는 작곡가 단체 Nahree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이 공연에서도 한 명의 작곡가로서 연주곡을 무대에 올렸음을 밝힌다. 그렇지만 이 리뷰에서는 공연을 끝마친 관계자의 회고나 변론의 성격이기보다는, 이 공연에 참여한 작곡가로서든, 연주자로서든, 감상객으로서든 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이러한 의도를 보다 명확히 하자면, 실제로 그 현장에서 함께했던 자의 자격으로, Nahree가 이번 공연에서 슬로건으로 내세운 함께하는 클래식 공연이라는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가톨릭청년회관 카페다리에서는 정기적으로 독립적인 예술활동을 후원하는 다리살롱을 기획해 왔으며, 이번 여름에도 2번의 오픈스테이지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예술가 팀들이 훌륭한 공연을 선보였다. 그 중 7 23일에는 Nahree의 실내악 공연이 있었는데, 이는 이제까지 독립 예술 공연에서 보기 드문 클래식이었다. 실제로 가톨릭청년회관이 매 계절마다 다리살롱을 기획한지 2년 정도가 되었지만 그동안 클래식 공연은 없었다.


그냥 클래식이라고만 해도 왠지 어렵게 느껴지는데 현대음악을 작곡하는 단체에서 기획한 공연이라니, 다른 클래식 곡들처럼 미리 들어볼 수도 없는 어려운 음악으로 과연 Nahree가 말하는 대로예술과 함께 사는 사회가 가능할지는 다소 의문이었다. Nahree는 어떤 방법으로 현대음악을 친숙하게 만들 수 있을까? 다음은 카페 다리에서 배포한 공연 홍보용 유인물이다.




곽준성 – Violin Sonata

이수빈 – Hommage a Van Gogh

이수빈나들이

서준원 – Hommage a Vincent d’Indy

박형준 – Baroque Baroque

(김활빈 – Pieces for Flute는 실제 공연에서는 연주되지 않았다.)


일단 공연의 컨셉은 해설이 있는 현대음악이다. 그와 동시에 어디서도 경험하지 못했을 새로운 감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아무래도 낯선 것은 참신함이라는 장점도 있겠지만, 그만큼 익숙하지 못하다는 단점도 있을 수밖에 없다. Nahree의 고민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어떻게 새로운 것을 친숙하게 전달할 것인가? 그 방법 중 한가지가 상세한 프로그램 제시다.





4면으로 구성된 팜플렛은 전면에 Nahree Chamber Series의 타이틀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3면이 이와 같이 빽빽한 글들로 가득차 있다. 다소 어려운 음악적 용어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곡을 쓸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나 소소한 이야기거리들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물론 우리는 안다. ‘Music says what it says.’ 음악은 음악이다. 아무리 풀어서 설명한다 해도 와닿을 수 없는 무언가는 음악 그 자체에 남아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음악의낯설음이 너무나도 강하게 우리를 지배할 때, 이를친숙함으로 바꾸기 위해서 음악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은, 새로이 작곡되는 클래식으로서의 현대음악이 찾을 수 있는 새로운 출구 중 하나가 아닐까.

 

그래서 공연 기획도 다른 클래식 음악회와 같이 말없이 연주자들 나와서 박수를 받고, 음악을 연주하고, 또 박수를 받고, 다시 다른 연주자들이 나오고, 가끔씩 실수로 곡이 끝나기 전에 박수가 나오기도 하고... 이런 패턴만이 반복되지는 않았다. 사회자는 이번 공연에 자신의 곡을 올린 작곡가로서 곡에 대한 상세한 해설을 덧붙였고, 자신의 곡이 아닐 때에는 다른 작곡가들과 함께 대담의 형식으로 청중들의 곡에 대한 이해를 도왔다.





대담은 어느 정도 프로그램에 기초를 하고 있지만, 글만으로는 온전히 표현될 수 없었던 현재를 살아가는 작곡가로써의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확실히 그들의 음악은 다른 곳에서 들을 수 없는 것들이다. 현대음악이라고 했지만 생각처럼 아주 기괴하고 괴팍한 곡들이 이어진 것은 아니고, 멜로디도 충분히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로 꽤나 듣기 좋은 것들이었다. 물론 그 안에는 잠깐잠깐 언뜻 보아 폭력적이라 할 정도의 파괴적인 힘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그들의 음악이 수백년 전에 작곡된 클래식은 아니니까.





그렇지만 공연에 있었던 모든 곡에 대한 얘기를 하자면 리뷰가 아닌 분석이 될 것 같으므로, 전체 프로그램에서 가운데에 위치했던 이수빈의나들이에 대한 얘기로 리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위 사진이 바로나들이연주 사진으로, 피아노 4중주(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의 가장 커다란 편성이다. 우선 공연에서유일하게 한글로 써진 제목의 곡이었고, 작곡가도 이 점을 의식했는지 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가 원했던 것은 아마 일상적인 장소 - 이 곡의 악장이었던 여의나루와 서교동 - 에서의 감상들을 음악을 통해 표현하는 것. 그런데 정작 작곡가는 이러한 것들을 음악적으로 묘사하려 한 것은 아니라고 명시했다. 이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음악은 다른 예술 분야와는 달리 청각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전달되는 장르다. 우리는 오감이라 해서 다섯 가지 감각을 동일선상에 놓기도 하지만 그들은 본질적으로 다른 위치에 있다. 시각은 우리가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대상을 우리의 지배 하에 둘 수 있는 활동이라면, 청각은 대상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으로, 우리가 결코 그 대상을 거머쥘 수 없다. 그림이나 사진은 계속 보고 있을 수 있지만, 음악은 시간이 지나면 우리에게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음악이 시각적 영상 - 이 곡에서는 느닷없이 보이는 새들이나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빛들 - 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일종의 시각의 청각화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작곡가는 자신이 보았던 시각적 영상들에서 받은 느낌들을, 자신의 곡을 통해 청중들이 전달받을 수 있기를 원한다. 다시 말해 음악적인 묘사가 어느 정도로 여의나루와 서교동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작곡가와 청중이 음악을 통해 공감할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작곡가는 다만 그 공감의 대상을 추상적인 어떤 것 - 이를테면 사랑이나 이별, 기쁨이나 괴로움 - 으로 상정하지 않고, 자신이 실제로 보았던 서울의 영상들로 선택했던 것이다. (영상은 여기)

 

이제 마지막 과제는 청중과 작곡가가 공감을 어느 정도 했느냐이다. 과연 청중들은 Nahree Chamber Series를 보면서 Nahree의 슬로건인예술과 함께 사는 사회를 꿈꾸는것에 동의할 수 있었을까? 위의 음원으로 공연의 실황 연주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공연들 중에서도 가장 현대적인 색채가 짙었던 곡이다. 무심할 정도로 건조한 피아노의 단편들과 찢어질 듯이 목소리를 높이는 현악기들의 외침은낯설음이라는 말로만은 표현할 수 없는, 아득하면서도 모호한 울림만을 남긴다. 새벽의 여의나루에서 느낄 수 있는 평온과 애수의 모순적인 감정, 그 옆을 스치듯이 지나가는 강렬한 감각적인 영상들... 그렇지만 결국 음악에 대한 얘기는, 더군다나 가사도 없는 이런 연주음악의 경우에는, 뚜렷한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이정도에서 마무리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한다. 


필자_곽준성

소개_현재 젊은 작곡가들의 모임 'Nahree'의 매니저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술과 사회의 접점을 다양한 관점에서 찾고자 노력하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