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서영란 <내일은 더 예뻐질거야>

2014. 12. 30. 11:04Review

 

다원을 더듬어 가는, 궁극의 리서치를 향한 너른 여정

서영란, <내일은 더 예뻐질거야>

 

글_김민관

 

 

기원을 추적하는 방대하고도 단순한 리서치

‘플라멩코와 벨리댄스의 기원은 인도 푼잡이다(?)’, 여행과 책을 통한 리서치를 바탕으로 한 렉처 퍼포먼스, ‘내일은 더 예뻐질거야’가 다다른 결론 혹은 주요한 전제를 말하자면 그러하다. 춤의 문화-종교 인류학적 탐사라 할 만한 렉처의 토대가 되는 리서치 북은, 대체로 제의로서의 본래 춤, 나아가 하나의 지역에 그치지 않는 보편적인 춤과 종교-문화가 기원하는 지점으로까지 소급해 가는, 기실 방대하면서도 단순하게 요약되는, 어떤 춤을 관통하며 동시에 춤이 관통하는 ‘궁극의 리서치’라 할 수 있다.

“2년 전부터 플라멩코를 배웠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어요. 이런 빠른 스텝을 할 때 …… 몸 안이 뜨거워지면서 거대한 불기둥이 서는 느낌? 직관적으로 혹시 이 춤은 고대 페르시아의 불을 숭상하던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닐까?”

우선, 이 공연의 출발은, 춤의 경험에서 발생한 ‘직관적인’ 인식·추론에 있으며, 이로 인해 머나먼 기원(과 그에 이르는 루트)을 추적해 가기에 이른다. 그녀의 춤이 ‘다원’예술로 분류된 것은, 내용적으로는 이렇게 다양한 춤과 종교의 기원이라는, 다(양한 기)원을 하나로 엮어낸다는 점에서 매우 적합하다. 사실 ‘불기둥’만을 느꼈다고 해서 ‘조로아스터교’의 흔적이 체현된 것이라 믿는 것은 ‘직관’을 중요시하는 그녀의 관점을 반영해도 그다지 납득이 되진 않는다.

오히려 그 직관은 플라멩코의 문화적 배경과 조로아스터교가 불을 숭배하는 종교의 스키마가 ‘틈을 보이지 않고 결합’할 때 나온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고, 또한 춤의 시원이 종교에 있고, 현재의 춤에도 과거의 흔적이 묻어 있고 그에 따른 효과가 분명 유도될 수 있다는 암묵적 전제가 깔려 있기에 가능한, 이른바 자신의 평소 의문에 대한 ‘대답’으로 볼 때 가능해진다. 곧 서영란 자신의 종교(문화)에 대한 관심이 체험을 ‘직관’(이라기보다 대답 또는 질문에 가까운 것으로 보이는 추론)으로 이끈 것이다.

 

 

동시대의 현상에서 전근대로의 점프

공연 포스터가 붙은 분홍색 빛으로 치장한 버스를 타고, 그 안에서 그녀가 나눠 준 리서치 북을 받아, 알함브라 궁전에 대한 다큐와 이어 플라멩코의 본고장 스페인으로 추정되는 곳의 문화에서 나온 문양들을 배경과 플라멩코를 추는 서영란이 합성된 뮤직비디오를 보는 와중에, 읽는다. 61페이지에 방대한 분량에 그녀가 직접 다녀 온 이국땅의 경험들, 전해들은 말들, 워크숍 참여 경험, 각종 참고 서적의 문장을 묶어 놓은 일기/메모들이 뒤죽박죽 들쭉날쭉 섞어 모은 게 이 리서치 북이다. 이와 같은 사유·인식의 너른 나열에 가까운 책을 두 번 넘게 읽었는데, 다소 그 전개에 있어 두서없기는 하다. 그러니까 사유와 사유 사이에 간격이 있는 편집 구조로, 그래서 더 많은 사유와 레퍼런스가 끼어들 여지도 있어 보인다.

“오늘날에는 동양의 종교와 서양의 종교가 전혀 별개의 흐름으로 명확히 구분되어 있으나 2천 년 전만 해도 그 경계가 모호했다.”(일레인 페이절스 『숨겨진 복음서, 영지주의』)

“플라멩코, 벨리댄스, 요가, 기공. 현재 건강과 미용을 목적으로 사용되는 이들을 몸으로 배우고 알아 갈수록, 그들은 고대 종교적인 색채와 역사적으로 다양한 만남들을 까지고 있었습니다. 저를 사로잡았던 것은 위의 수련들이 기반을 두고 있는 고대 종교가 서로 다른 종교에게 영향을 끼쳤던 만남들입니다. 우리가 딱딱하게 ‘이 종교와 저 종교는 다르다.’라고 분리하는 것이 이천년 전에는 수없이 섞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인도에 살았다』에서) …… 캐쉬미르 지역이 이슬람 이전의 조로아스터교와 힌두, 불교가 만났던 지역이며, 고대 유대교 성인이 조로아스터교 사람들과 종교에 대해 토론했고, 인도 불교에 방문했다는 설들을 발견했습니다.”

“플라멩코, 요가. 이 방법들은 저 개인에게 있어서는 생활 속에 묵은 생각과 감정들을 털어내고 명료한 의식과 진동으로 바꿔주는 매개체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문장들은 곧 다양한 문화가 섞일 수 있고 접변하는 종교-문화의 먼 과거 모습과 그 속에서 체현되는 춤을 다시 복각하는 어떤 이상적 그림을 전제한다. 결국 미용·건강에 열광하는 문화에서의 춤 현상을 반어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듯 보이는 제목 ‘내일은 더 예뻐질 거야’은 실은 말 그대로 신성한 감각을 깨우는 춤을 통해 더 건강해지고 따라서 예뻐지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만약 이와 같은 제목으로 무용/안무를 한다고 할 때 연상되는 그림은, 예뻐지려 애쓰는, 그래서 소외되고 자신(자아)을 잃어가는 불특정 다수의 현대인의 분열된 모습을 상징하는 분절되고 기괴한, 또는 감정에 도취된 춤의 형태임에 틀림없다(이것이 국내 춤을 몇 년간 보아온 내 ‘직관’이라면 직관이다, 사실 판단에 가깝다).

서영란은 그러한 현재의 현상을 언급은 하지만, 그 자체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전근대의 시점으로 곧장 (앞서) 나간다. 따라서 동시대적이지 않고 시대착오적이다. 이런 작업을 하는 무용수/안무가는 개인적 리서치에서는 서영란밖에 없는 듯 보인다(그 점이 또한 그녀가 ‘다원’으로 분류되는 결정적 지점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방대한 작업에 흐르는 사유를 (공연과 따로, 또 같이)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가.

예술가는 누구보다 자유로운 존재이며, 아니 자유로워야 하는 존재이며, 그의 직관은, 자신의 체험과 경험 자체가 예술로 변환된다는 점에서 또한 소중하다. 하지만 이 리서치 북은 인문학적이며 많은 책들이 사유의 전거가 됐다는 점에서, 일종의 책의 전 단계, 또는 ‘잠재된 (퍼포먼스 이전의) 책’이라 볼 수 있다. 그녀의 실제 렉처 퍼포먼스에서의 렉처는 이 책의 일부에 불과하다.

 

 

책은 퍼포먼스의 이전인가?

우선 개략적으로 퍼포먼스를 살펴보자. 처음 서영란이 등장했을 때 넘버링(동작의 진행에 따른/맞춘 숫자 세기)을 하며 강한 발 구름으로 객석을 오가며 진동을 관객이 감각하게끔 하고, 이어 두 무용수의 각각의 플라멩코와 벨리댄스의 시현에 이어, 플라멩코와 벨리댄스 두 춤을 동시에 펼치며 그 기원으로서 두 춤이 상응함에 초점을 맞추려는 것으로 이어진다(그럼에도 이러한 인식-감각을 통한 공통 기원에 대한 감각(적 직관)은 그녀가 애초 체험했던 것처럼 관객에게 잘 전달됐는지는 의문이다).

이어 일시적 유행의 반복적 순환의 패션의 계보처럼 역사의 춤 도상들이 현재의 춤과 또 그 현상과 뒤섞이는 과정에서, 자료와 춤이 교차한다. 이른바 렉처로서 퍼포먼스. 이 과정은 리서치에서의 주석들이 제시되지 않는 가운데, 움직임 자체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일종의 이미지에 대한 주석으로서의 움직임을 이루며 포스트모던적인, 표피적 차용과 두께 없는 이미지 나열로 감각된다. 이는 곧 애초 이 역사와 현재를 곧장 있는 통시적 직관을 꾀는 방대한 여정이 그야말로 ‘책’으로 구성될 때, 꼭 퍼포먼스로 다시 펼쳐져야 하는 것에 대한 물음으로 이어졌다.

이 책 자체가 현재로서는 가장 완성된 하나의 결과물 아닌가. 이미 무용 분야가 아닌 다원으로 이 작업이 분류·정의됐을 때 이 책은 무용을 말하는 예술인문학의 한 결과물로서, 곧 책이어야(-곧 전형적인 무용이 아닌 형태, 혹은 다른 매체의 전달 방식이어야) 이 무용에 대해 말하는 무용은 오히려 ‘다원’의 형태에 가까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곧 무용을 하는 게 아니라 말하는 무용가가 사실 많지 않다는 것, 또 다른 언어로 발화하는 무용가가 없다는 점(나아가 그러한 활동이 무용으로 인정되지 않는다는 점)이 다원예술로 그녀가 범주화되는 이유가 아닐까. 그런데 무용에 대해 말/무용하는 게 왜 무용에 속하지 않는 것이겠는가.

그렇다면 만약 이 책 자체가 하나의 최종 결과물로 본다면, 그녀의 너른 사유는 그녀만의 방식으로 꾀어지기보다 다른 식의 사유가 교차하는, 관통하는 또 다른 차원의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지 않을까라는 가능성까지 생각하게 하는데, 이는 다시 춤을 춰 그것을 쉽게 현장의 관객에게 즉자적으로 보여주며 매체적 전환을 한 차례 거치는 대신, 그리고 이 책이 ‘퍼포먼스 이전’의 그녀만의 재료 차원의 책이 아니라 더 공통적인 사유의 전환 축이 되기 위한 또 다른 접근을 이 책에 허용하는 방식에 대한 사유를 낳는 것이다.

이는 이 책이 조금 더 엄정해야 하는가의 물음과 예술가에게 가해지는 강박의 문제로 이어지는데, 예술가의 직관들이 그 자체로 예술적인 것이며 또한 자유로운 것이라면, 학문적 눈을 통과해야 하는가의 물음은 그러한 문제 제기를 견제한다. 그럼에도 그녀의 리서치 방식은 인문학의 결이 있다. 글에도 분명하고자 하는 문체가 있다. 어떤 자족적인 상상계의 왕국을, 이야기를, 세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몸짓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렇다면 ……

 

▲ 서영란 <내일은 예뻐질거야> 리서치 북

 

사유와 사유, 직관과 직관 사이

애초 그녀의 작업에서 약간 갸우뚱한 것은 그녀가 찾고자 한 것이 춤의 기원이 아니라 춤을 포함한 종교의 기원이고, 그 변천의 과정에서의 차이와 반복의 변주가 아니라 하나의 시원·기원에 대한 어떤 강박에서 비롯된 것처럼 감각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직관이 아닌 게 아니라 그 결합이 추동하는, 하나의 단순한 결과에 이르는 직관의 과정에서 배제될 수 있는 가능성(들과 거기서 나오는 ‘사소한’ 직관들)이다. 결과적으로 그 공동체적인 또한 신성한 춤의 이상에의 그림과 닿아 있는 열정을 조금 더 차분하게 논하는 비판적 성찰의 다른 결의 지점 역시 이 책과 결합할 수 있는 부분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이는 책에 대한 감수라기보다 2 대 2 매칭의 테이블로 이 책이 올랐으면 어떨까에 대한 개인적 사유 또 바람에 대한 부분이다.

“ …… 티베트 밀교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네 자신을 알라’는 비의가 ‘자기가 다른 모든 자기들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하는 생각 등이 본질적으로 환영임을 깨닫게 만드는 밀교의 수행법’과 같은 맥락임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천상계와 인간계를 나누는 플라톤의 이데아 또한 동양의 종교 혹은 고대종교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사실 이런 문장에서 직관은 표현됨에 있어 많이 성글다. 사실 ‘네 자신을 알라’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에 적힌 말인데, 그것이 일단 밀교의 수행법지의 여부는 차치하고,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이 질문-대답의 관계 맺기를 통해, 자신의 ‘알지 못함’을 아는 데, 나아가 타인의 자신의 알지 못함을 알게 함에 있었으므로, 이러한 해석이 그와 같은 뜻으로 일견 해석될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뒤이어 인용하는 신플라톤주의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뒤섞는 데 반해, 플라톤은 천상계와 인간계의 ‘분리’를 강조한 데 가깝다, 그 내용에 신에 대한 믿음과 그 믿음의 배제가 담겨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와 같은 문장의 연결에서 볼 수 있는 사유는 인간에게 유전자처럼 배어 있는 신에 대한 사유에 대한 보편적이고 통시적인 차원을 설정하는 측면에서, 사유의 기원이 될 만한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사례를 오히려 그 근거로 드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여기서 다른 사유를 끼워 넣어 보자면,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또한 영향을 받은 피타고라스(학파)는 수를 중시했고, 수에 대한 각각의 의미 부여와 함께 불길한 숫자를 배제하며 폐쇄된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러한 측면은 종교적 성격에 가깝고, 또한 신성함의 이상과 속세의 현실을 뚜렷이 분리한 생활이었고, 결정적으로 남성만으로 결성된 집단임은 그녀가 이상적 종교의 형태로, 또 그 기원으로 제시하는, ‘여성적 신성’과는 대별된다. 또한 이러한 측면이 어느 정도 플라톤의 이데아와 현실의 분리와 연결된 사유로 짐작된다. 그러니까 서영란의 직관들이 틀렸다기보다, 또 비판될 수 있다기보다 그 간격 안에 다른 사유들이 연결될 수 있고, 그랬어야 앞의 문장은 조금 더 납득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불가능에 가까운 기원, 가능할 수도 있는 공동체의 염원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지역에서도 인도 사람들이 춤추는 것을 보고 만족. 집시의 기원을 따라 푼잡에 와서 그 전통춤이 얼마만큼 아라비아 춤과 비슷하고, 플라멩코와 비슷하고를 따지거나, 혹은 그것이 옛날의 종교와 얼마만큼 연결되고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떤 인도 학자가 지금의 나를 만나주겠나.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본 대중들의 춤은 호기심으로 무작정 떠난 욕망을 충족시켜 주었다. 터키의 작은 술집에서도 마찬가지. 나는 터키 아가씨로부터 그들이 생활 속에서 추는 벨리댄스를 즉흥적으로 배웠다. 그리고 함께 춤췄다. 불꽃손도 만들고.”

현지에서 역시 시원의 모습과 그 근거를 현재의 모습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녀가 그 춤이 담는 신성성을 현재 공통 감각화할 수 있다는 점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이는 우선 근(현)대의 춤에 대한 대안이다. 커뮤니티 댄스를 하기도 했던 그녀가 공동체(=커뮤니티)의 가치를 진정 구현하고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는 경계를 해체하는 하나의 이상적 공간을 제시하려 하고 있다고 보이는데, 이는 처음 발 구름과도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애초 그녀가 불기둥을 느꼈던 것처럼, 렉처 퍼포먼스의 형태가 렉처의 전달 방식이 아닌, 불기둥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소규모 워크숍의 연장들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그러나 그것이 서영란의 목적이었다고 또 말할 수 있는가의 질문을 하자면 그 또한 의문이다). 그러니까 공연을 대치한, 공연보다 더 나은 깊은 차원의 경험이 가능해지는 워크숍(같은 공연)의 형태, 애초 원-체험·인식으로부터의 직관, 곧 책의 기원으로, 거꾸로 소급해 가는 워크숍 형태는 한편 모두에게 있어 가능한 것인가.

결국 이 공연에서 중요한 건 동양과 서양의 경계가 해체되는 지점, 종교-문화-예술이 혼합되는 시원적인 기원에 대한 재정립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아님 그 경험이 그러한 역사를 증거하고 있음을 아는 것일까. 어쩌면 이 공연은 체험을 통해 앎(그리고 체험) 그 이후의 체험을 다시 의미화하는 것에 가깝지 않은가(그 경험에 대한 인식적 증명으로서 앎이 필요했다면, 약간의 진지한 농담을 더하자면 서영란이 플라멩코를 추고 열 감지 측정 장치와 스크린 표시로 그 뜨거워짐을 포착했을 수도 있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역사와 현재가 표면적으로 상응하는 지점을 찾을 수 없다는 바로 앞 인용된 문장은 그녀가 마지막에 보인 ‘불가능성’의 결론과 맞물린다. 나아가 그녀의 또 다른 여정을 예고하는 한국 여신에 대한 관심으로 건너뛰며 또 다른 현재의 순간이 더해진다. 어차피 결말, 결론은 없으며, 쌓이고 더해지는 과정이 지속되며, 그리고 아마 계속 지속될 것이다.

 

 

종합하자면 서영란의 작업은 곧 인문학적 앎과 예술(춤)적 체험과 문화적 공통됨의 배경이 합쳐질 수 있는 삼위일체의 ‘공동의 앎-체험에 대한 어떤 열망’이 자리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한편, 렉처 퍼포먼스의 과정에서 춤을 추고 끊고 말(연기)하고 하는 부분 동작-말의 과정은 일종의 구연동화에 가까워지는데, 말을 자막에서 타이포그래피의 안무로 두고, 나아가 춤과 결합하는 식의 퍼포먼스 운용도 괜찮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사실 그녀 대사의 발성이 완벽한 편은 아니었던 탓이기도 하다).

아니면 이 책 자체의 완성된 형태의 연장으로서 렉처를 강화하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다. 춤과 말이 절반씩 끊기며 진행되는 렉처 퍼포먼스는 그저 말 그대로만 렉처(반) 퍼포먼스(반)의 형태를 구현하고, 실제 렉처 자체가 퍼포먼스가 되는, 또는 그 반대가 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다.

이 리서치의 시간들과 쌓아 간 메모들, 사유들을 존중하고 그 잠재성의 크기를 신뢰한다. 그래서 다른 식의 결이 다원의 형태를 이루는 것 역시 좋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몇몇 가정들을 서툴게 꺼내봤고, 또 몇몇 문장들에 얕은 주석을 보태 봤다.

p.s. 어쩌면 이 공연을 포함해 리서치 북은 그토록 많이 시도된 하지만 공회전에 그치고 마는 듯한 인문학의 사유와 예술의 감각이 뒤섞이는 합체 불가의 몸에서 나아가, 아마도 춤-인문학, 예술-인문학의 성공 케이스로 남을 수 있는 어떤 지점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쯤 됐으면 다원예술이 가리키는 다원에 대한 접근도 전면 재점검해볼 때가 됐다고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번 서영란의 작업은 여러 모로 다원예술의 현재와 미래를 숙고해볼 중요 좌표로도 보인다.

*사진제공_<내일은 더 예뻐질거야> 프로덕션

**안무가 서영란 개인 웹페이지 바로가기 >>> http://yeongransuh.com/

*** 서영란의 지난작업 공연리뷰 바로가기 >>> indienbob.tistory.com/681 

indienbob.tistory.com/791

필자_김민관

 소개_공연예술 프리랜서 기자 및 자유기고가. 문화예술 분야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 중. 온라인 뉴스채널 http://artscene.co.kr 편집장

<내일은 더 예뻐질거야>

공연일시 : 2014년 12월 20일 토요일 3시, 6시 / 21일 일요일 3시 (러닝타임 60분)

장소 : 아르코 인력개발원, 실험무대

컨셉 : 서영란

안무, 출연: 김은경, 서영란

이 작업의 창작자들은 평소에 요가, 기공, 불교무술, 벨리댄스, 플라멩고, 폴댄스를 통해 스스로 수련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수련들은 모두 고대의 종교를 기원으로 하고, 현재에는 상업적이고 섹슈얼한 상품으로 소비되고 있다. 이 공연의 퍼포머들은 이 모든 수련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숨겨져왔던 타 문화와 타 종교가 만나는 지점들을 발견하며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낸다. 그것들이 현대인의 욕구와 엮어지면서 섹슈얼리티의 새로운 공간을 탐험한다.

The performers of this performance have experience with Yoga, Taoism Ki, Buddhist Martial Art, Flamenco, Belly dance and Pole dance. Ironic thing is that all these practices are based on ancient religion and tradition, but now it is used as a very commercial and sexual product.

The mixing of all these practices creates new stories and new connections between different cultures and traditions. Matching it with the desire of Modern people, they find a new inspiration to explore sexual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