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말이 지나갔고, 글이 지나갔다. <소셜씨어터 뷰벽정>

2015. 2. 12. 02:56Review

 

말이 지나갔고, 글이 지나갔다.

<소셜어터 VIEW벽정>

 

글_K 

시는 애초에 휘발되기 위해 존재한다. 좋은 시는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와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시는 언제나 글자라는 허물을 쓴다. 그러나 순식간에 시는 떠나고, 축 늘어진 글자들만이 시집에 박제된다. 글자는 무덤의 뼛가루 위로 무성하게 남아있는 인간의 옷가지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 형체가 사라져도 옷가지는 인간을 기억한다. 시인들이 시집을 내는 것은 시가 곧 죽을 것을 직감하고 그에게 옷을 지어주기 위함이 아닐까?

20151월 문화역서울 RTO에서 상연된 <소셜어터 VIEW벽정>은 시를 닮은 연극이다. 다만 시집 대신 극장과 아프리카 TV 채널의 형식을 통해 시를 매개할 뿐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김시습의 금오신화 金鰲新話에 수록된 취유부벽정기 醉遊浮碧亭記가 모티브가 된다. 관객들은 극장에 들어가기 전에 아프리카 TV에 가입하고 방송 채널로 입장하라는 안내를 받는다. 스마트폰을 통해 채널에 입장하고 극장에 들어서면 부벽정여신의 두 시녀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잠시 후 김시습과 부벽정여신의 방송이 시작된다.

취유부벽정기는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꿈같은 사랑을 다루는 이야기다. 개성 상인 홍생(洪生)은 달밤에 부벽루에서 시를 읊다 아름다운 여자와 그녀의 시녀들을 만난다. 여자는 자신이 과거에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긴 기자의 딸이라고 소개하며, 지금은 천상계에 있지만 달빛이 고와 잠시 내려왔다고 고백한다. 홍생과 여자는 시를 주고받으며 밤을 보낸다. 그러나 여자는 이내 사라진다. 후에 홍생은 꿈에서 여자를 보고 세상을 떠난다. 김시습은 이러한 꿈같은 이야기에 취유부벽정기라는 한문 옷을 입힌다. 여자는 시녀를 시켜 홍생에게 옥황상제의 명이 엄해 나는 이제 흰 난새를 타고 돌아가겠다.”라는 말을 전하게 한다. 김시습은 취유부벽정기말미에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 이후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땅을 휘감더니 홍생이 앉았던 자리도 걷고 여인의 시도 앗아가 버렸으며, 방금 전에 읊던 시 또한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김시습은 이 모든 이야기를 문자로 남겼으며 취유부벽정기가 무성하게 남아 후대인들에게 전해진다. 그리고 <소셜어터 VIEW벽정>은 아프리카 채널을 통해 홍생과 기자 여인을 환생시킨다. 여기서 관객은 홍생의 역할을 맡게 된다. 관객들이 문화역 서울 RTO의 문으로 통과하는 순간 그곳은 부벽정으로 변한다. 물론 취유부벽정기에 묘사된 부벽정처럼 달빛이 바다처럼 넓게 비치지도 않고, 기러기가 모래밭에서 우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낡은 역사 건물을 개조한 그곳은 부벽정만큼이나 신비롭다. 우선 위아래로 하얀 옷을 입은 시녀 두 명이 등장해 뇌쇄적인 춤사위와 함께 관객들을 안내한다. 하지만 그들은 일반적인 극장 안내원과 다르다. 자기 마음대로 춤을 추다 한 관객에게 따라붙기도 하고, 금방 다른 관객에게로 관심을 돌리기도 한다. 관객들은 중간의 공터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앉게 된다. 무대에는 커다란 물고기가 들어있는 대야가 놓여져 있고, 곳곳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구석에서는 연신 클럽 음악을 틀어대는 DJ와 아프리카 TV 채팅을 진행할 부벽정여신이 노트북을 켜고 앉아있다. 관객들은 보통의 극장과는 다른 내부의 풍경에 낯설어하지만, 아프리카 채널에 가입을 했던 사람들은 이내 스마트폰을 열고 채널로 입장한다. 여기서 스마트폰이 없거나 대기 시간에 아프리카 채널에 가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무대 기둥에 비춰지는 빔프로젝터 영상을 본다. 거기엔 갓을 쓴 김시습과 아프리카 부벽정 채널의 채팅창이 띄워진다.

김시습 역할을 맡은 남명렬 배우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채널에 입장하는 관객들의 닉네임을 불러준다. 이러한 과정은 관객들에게 묘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아프리카 TV 채널의 특징은 BJ가 시청자들의 이름을 불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때 BJ가 부르는 시청자들의 이름이 무수히 많을지라도, 시청자 입장에서는 자신이 호명된다는 사실이 짜릿할 수밖에 없다. 보편적인 아프리카 방송에서 별풍선을 받은 BJ들이 닉네임을 부르며 “~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와 같은 쾌감을 이용하는 것이다. 나 역시 실제로 내 닉네임이 불리니 신기했다. <소셜부벽정 어터>은 아프리카 TV인 동시에 연극인데, 여지껏 연극에서 관객으로서 이름이 호명된 적이 단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기존의 연극에서 배우가 관객을 무대로 불러내거나, 관객에게 말을 걸었던 적은 많지만, 연극의 꽤 오랜 시간을 그저 하나하나 이름을 부르는데 쓰는 상황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반적으로 연극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이야기를 압축하여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경제성의 원칙을 지향하는데, <소셜어터 VIEW벽정>은 경제성을 초월하여 관객을 들뜨게 하는 것에 더욱 관심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이렇게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장면은 일종의 맥거핀이었다. 단지 이름이 불렸다고 해서 관객과 부벽정여신, 김시습이 체계가 있는 소통을 지속했던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취유부벽정기에서 홍생은 1명이었다. <소셜어터 VIEW벽정>에서 홍생의 수는 실시간으로 변동했다. 채팅에 잘 참여하며 부벽정여신과 대화를 시도하는 홍생이 있는가하면, 채팅에 시종일관 자동기술법으로 자기 할 말만 하는 홍생도 있었다. “이게 무슨 연극이냐고 채팅에 상황 설명을 요청하는 홍생이 있는가하면, 스마트폰이 없어 가만히 구경만 하던 홍생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부벽정소셜 부벽정, ‘어터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구경하듯 이 모든 상황을 관음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금방 이 연극의 공기를 읽고 대화에 참여했다. 나는 연극 초반에 안내를 받고 아프리카 TV 채널에 입장을 하긴 했지만, 시종일관 자기 할 말만 하는 홍생에 속했다. 무대 중앙에 살아있는 물고기가 퍼덕거리고 있길래 갑자기 참치회가 떠올랐고, 계속 참치회가 먹고 싶다”, “연어 참치 연어 참치”, “애인이랑 참치 먹을거야라고 채팅창에 썼다. 누구도 내 말에 반응해주지 않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참치회가 먹고싶다는 이야기만 했다. 누군가 님들 우리 채팅하는 것 밖에 다 떠요라고 말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할 말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야말로 자기분열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나 나로선 그게 최선이었다. 나는 이 연극이 어느 시점에서 시처럼 휘발될 것을 알고 있었다. 124일 저녁 6시 연극은 시작했고, 나는 6시와 7시의 사이에 있었고, 7시에 이 모든 상황은 끝날 예정이었다. 연극이 끝나면 모든 언어가 취유부벽정기의 후반부처럼 소거되어버릴 것은 자명했다. 채팅창의 언어들은 누가 일일히 캡쳐를 해두지 않는 한 우리의 기억 속을 부유하다 사라지기 때문이다. 홍생은 달밤이 끝나갈 줄 모르고 여자와 시를 주고받았으나 나는 연극이 끝날 것을 알았기에 주고받기를 포기하고 내 할 말만 했다. 그래서 다른 관객들이 부벽정여신과 어떻게 채팅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정극이 아니니까, 굳이 모든 언어들의 기승전결을 따질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런데 딱 한 번 부벽정여신과 주고받기가 가능했던 순간이 있었다. 한참 동안 참치회 이야기만 하던 내가 나 이거 리뷰로 써야 하는데 어떡함이라고 말하자 다른 관객들이 웃기 시작했고 부벽정여신도 따라 웃었다. 나는 처음으로 내 말이 주목받았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래서 다른 말을 통해 부벽정여신과 대화를 이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참하게도 나는 이내 혼자가 되었다. 부벽정여신은 수많은 홍생들은 그때그때 자신의 이목을 끄는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꽤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할 말만 하고 있었다. 연극이 후반을 향해 갈 때까지 이거 대체 무슨 연극인가요?”라고 질문을 던지는 관객도 있었다. 결국 나는 다시 참치회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것이 부벽정의 달밤을 보내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중간중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 김시습 역할을 맡은 남명렬 배우가 김시습과 남명렬의 삶을 섞어 지금까지 살아온 과정에 대해 긴 독백을 했다. 그런데 그 독백은 뒤로 갈수록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었다. 분명히 남명렬은 다른 누구보다도 풍부한 성량과 정확한 발음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발음이나 성량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시녀들이 몇 관객에게 술을 주기도 했고, 연극 자체가 전체적으로 취해 있는분위기였기 때문에 남명렬의 말이 내게는 술김에 지나가는 소음처럼 들렸던 것이다. 남명렬은 무대 중앙에서 큰 붓으로 종이에 무언가 쓰기도 했다. 그런데 내 자리에서는 그 글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애써 보려고 하지 않았다. 연극 중간에는 말끔하게 옷을 차려 입은 두 남자 배우가 등장하여 셀카봉으로 사람들을 찍고 다니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대사와 질문을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관객들은 그 사람들의 대사보다는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 있음에 집중하는 듯했다. 나를 포함한 수 많은 홍생들은 저마다 그들을 두고 목도리 예쁘다”, “저 선글라스 어디 건가요?”, “잘생겼음같은 말만 반복했다. 취유부벽정기를 떠올려봐도 그렇고, 이미 이 연극에서는 어떤 말을 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말이 있었다라는 사실과 글이 있었다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련의 과정은 내가 생각한 시의 본질과 정확히 닮아 있었다. 그 자리에서는 모든 것이 매 순간 휘발되고 있었다. 하지만 시집과 다르게, 누구도 이 모든 대화들을 박제하려 하지 않았다. 모두가 각기 다른 의미로 취해있었기 때문이다.

취유부벽정기에 따르면 홍생은 기자 여인이 사라진 뒤 정신을 차리고 난간에 기대어 방금 전의 상황을 모두 기록하고 시를 읊는다. 김시습은 이상한 이야기를 인간 세상에 퍼뜨리지 못하도록여인이 모든 흔적을 치웠다고 묘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시습은 홍생을 만들고 홍생은 이야기를 기록해버렸다. 내가 이 연극에 대한 리뷰를 쓰는 것은 홍생이 상황을 기록하고 시를 읊던 상황과 닮았다. 부벽정여신은 7시가 다가오자 채팅을 종료하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미한 기억에 의존하여 부벽정여신과 김시습과 수많은 홍생들을 또 한 번 환생시켰다. 애초에 김시습은 이상한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모든 이야기를 걷어버린 척하며 홍생으로 하여금 다시 쓰게 한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이상한 연극을 널리 인간 세상에 퍼뜨리고 싶었다. 그곳은 어느 겨울밤의 부벽정이었다. 말이 지나갔고, 글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