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5 산울림 고전극장 - <모파상 단편선'낮과 밤의 콩트'>

2015. 2. 26. 02:16Review

 

육질 좋은 이야기와 날렵한 칼질 

: 2015 산울림 고전극장 

- 양손 프로젝트의 <모파상 단편선 '낮과 밤의 콩트'>

 

글_장수진 

선수는, 아무도 감지하지 못하는 그 순간, 바로 '그곳'을 정확히 가격한다. 날씬한 칼이 두툼한 살을 순식간에 발라내듯, 가장 맛있는 곳을 향해 날과 손을 대는 자들, "양손프로젝트"의 신작을 보았다. 그들은 '모파상'의 육질 좋은 이야기를 날렵하게 썰고 가른다. 신선한 피와 보기 좋은 마블링, 그것은 참 맛있는 맛이며 씹을수록 만족스러운 식감이다. 이 맛있는 연극을 모파상은 못 봤다. 나는 봤다. 내 친구도 봤고 상징적 철수와 영회도 봤다. 그것은 그들이 쏟아낸 이야기들이 '가능한' 것이라는, 모파상으로부터 어디 어디 사는 청년, 애늙은이, 진짜 늙은이 누구라도 시시덕거리다 화들짝 서늘해질 수 있다는 나의 말이다.

 

무엇을 보았는가. 혹은 들었는가. 혹시 읽었는가. 이것은 <고전극장>이라던데. 고전이 무언가, 먹는 건가. 말해보라, 양손프로젝트여

 

'읽기'

배우 양조아와 양종욱은 끊임없이 말한다. 그들은 무대에서 감히 소설을 읽는가. 아니, 말한다. 모파상의 정확하고도 단도직입적인 묘사를 사람의 말로 바꾼다. 그것은 물론 형식적으로는 희곡의 지문과 대사다. 전통적인 연기술에서 배우는 지문을, 행위나 대사의 밑말(근접한 정의로는 서브텍스트가 있다), 혹은 뉘앙스의 형식으로 변환하지만, 그들은 지문을 진술의 형태 그대로 무대에 올리는 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말과 글''의 혼용을 통해, 사실은 소설이기 때문에 납작한 '그것'에 활력과 부피를 더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고 듣고 결국엔 삼킬 수 있는 좀 더 능동적 형태의 참여(관극)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작가나 독자에게 소설이 납작한 것일 리 없다. 다만 읽/읽히는 행위에 의해 규정된 '쓰기'이므로. '배우의 읽기''독자의 읽기는 다르다. 배우는 상상력을 동원해 책 속에 누워있는 인물의 멱살을 잡고 어떻게든 그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아니, 여기까지는 독자도 같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보이는 상상'(표현)을 실현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배우는, 독자와 읽기 이후의 노선을 달리 한다.

<크리스마스 이브>

  

육감

"기차는 막 제노바를 떠나 마르세유를 향해 가고 있었다."  (2014_현대문학_최정수 옮김)

 

단편소설 <목가>의 첫 문장이다. 찬사를 보내 마지않을 이 작품의 첫 장면은, 정면(객석)을 보고 앉은 두 배우의 움직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5월의 태양 아래, "너무나 기분 좋고, 너무나 진하고, 너무나 관능적이고 달콤"한 것이었다.

 

두 배우는 사물과 성질, 그리고 풍경이 된다. 팔과 다리, 시선, 그리고 목소리 등이, 앉은 채로 그들이 선택한 도구이다. 그들은 바퀴로 시작해 기차가 된다. 그리고 속도를 내며 순식간에 길로 뻗어나가 시작과 끝이 뒤섞인, 지극히 사소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그들은 그 모든 것이며 동시에 그 모든 것들을 움직인다. 그렇게 그들은 당분간 말이 없다. 달콤하고 향긋하고 부드럽고 봉긋한, 물질과 비물질의 세계가 조화롭게 뒤엉켜 싱그럽게 넘쳐나는 순간을 나는 보았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는 그 때의 감각이 되살아나, 비밀스런 볼륨으로 손 안이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낀다. 바로 이것이다. 그들이 나를 '건드린' 것이다. 나의 생각, 나의 거대한 삶을? 아니, 전혀. 그들은 생각할 필요 없는 세계, 궁리와 염려 밖에 놓인, 논리가 아닌 채로 충만한 세계를 불쑥 꺼내놓는다. 관객은 기꺼이 감촉한다. 이것은 '매혹'이다. 설득과 이해가 아닌 파토스, 무언가 '받은 상태'. 그들로부터, 그리고 그들이 읽어낸 그들 너머의 오래된 '기 드 모파상'으로부터

<목가>

 

'되기'

배우 양조아. 그녀는 출산 직전의 만취한 여자 <크리스마스 이브> 부터, 어린 나를 왜 부잣집에 팔지 않았느냐 부모에게 고래고래 분통을 터트리는 다 큰 청년 <전원 비화>, 부푼 젖을 낯선 사내의 입에 넙죽 넣어 주는 시골 아낙 <목가>까지, 빠르고 쾌활한 변신을 시도한다. 그녀의 주된 도구는 '목소리'이다. 그것은 노래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기괴한 신음과 높고 낮은 음, 억울한 개의 으르렁거림 같은 것이다. /그것들은 천연덕스럽고 우악스럽다가도 끝내는 보편적인 것이 된다. '속성'만으로 움직이는 것일까. 그것은 얼핏 어떤 운동성으로도 보이는데, 빠르고 더디고 느긋하고 나긋하며 날카롭고 무른 채로 이곳저곳(인물과 인물)을 누비는 '그 무엇'에 대해 나는 다시 질문한다. 그녀의 '연기', 여자와 남자, 아이와 어른, 즉 인물 '되기'가 아닌, 결국에는 그 모두가 잠시 머물 수 있는 '빈 공간' 되기가 아닐까. 비존재로서의 양조아. 그것은 가능한 것일까. 아주 짧은 순간 텅 빈, 무한.

<전원비화>

 

투지

배우 양종욱. 그가 홀로 연기한 <29호 침대>의 경우. "전쟁과 사랑을 하기 위해 태어난, 키 크고 건장한, 억세고 굳건한 남자" 실은 비루하고 천한 속물인 '에피방 대위'를 무대에 세우기 위해, 무대에 오르기 전의 그는 몹시 분투한 듯하다. 양종욱과 에피방, 배우와 인물. 그들은 서로 간섭하고 대립하며 팽팽한 긴장을 형성한다. 그에게는 어떤 '투지' 같은 것이 엿보였는데, 그것은 아마도 텍스트와 인물을 향해 던지는 배우''의 집요한 질문들이 만들어낸 자장이었을 것이다. 그는 끊임없이 묻는다. 대상(인물)을 멀리서 보고 가까이 다가가 다시 본다. 둘러보고 째려본다. 조명의 위치를 여러 번 조정하여 마침내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돌을 내리치는 조각가처럼 그는 인물의 바깥에 있다. 여기서 그는 양조아와 구별된다. 양조아가 양조아-인물1-인물2 등의 순서로 이동한다면, 그는 양종욱-인물1/양종욱-인물2, 즉 나와 인물, 다시 나,인 것이다. 나는 잠깐, 양조아의 고불고불하고 유연한 기질이 양종욱에게 이식된다면 그것은 근사할까, 상상해 본다.

<29호 침대>

 

의자

양손프로젝트의 무대는 텅 비어있다. 그러나 그곳엔 '의자'가 있다. 그것은 있'' 것인가 없'' 것인가. 무대는 비어 있으나 의자는 있다. 여기서 의자는 학교 집 사무실 카페 등에 놓인 그 의자인가. 침대다. 아니 기차다. 아니 창문이다. 아니다. 배우가 의자를 침대로 사용하는 순간, 의자는 의자를 상실한다. 그러나 그것은 배우의 의지, 다시 말해 배우에 의해 '오브제'로 사용'', 의자 밖의 의지이다. 여기서 나는 '의자 의 의지'에 주목한다. 의자는 끊임없이 의자''을 탈각시키며 주체적으로, '다만 의자가 아닌' 상태로 가려한다. 이는, 양손프로젝트의 의자는 배우와 소도구의 관계에 놓인 피동의 의자가 아닌, 하나의 고유한 존재라는 것. 그들의 의자에는 분명 '푼크툼(punctum)'이 있다는 것이다 

정면에서 바라본 무대

 

'쓰기'

그들의 '읽기''다시 쓰기'. 소설을 각색해 글을 말로, 무대와 장치를 더해 무대'' 언어로 바꾸는 것이 아닌, 텍스트가 추동해내는 텍스트 이후의 공간에 침투하는 것이다. 그곳은 문학 너머나, 저편이 아니다. 모호하고 아득한 것은 가라. 문학''인 것은 더 멀리 가라. 그들이 건드리는 감각은 연쇄적으로 다음-다음의 차원의 상상을 돕는데 흥미롭게도 그것은 마침내 관객을 소설로 귀환하도록 한다. 다시 묻는다. 그들에게 고전이 무언가. 먹는 거다. 그들은 그것을 잘도 먹어 버렸다. 모파상을.

 

* 사진촬영_양승호

필자_장수진

소개_2012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데뷔한 후 꾸준히 시를 발표하고 있으며
       
동시에 극단 크리에이티브 바키와 함께 연극 작업을 하고 있다. 

 

2015 산울림 고전극장 <모파상 단편선 '낮과 밤의 콩트'>

장소: 산울림 소극장
일시: 2015년 1월 23 - 2월 1일

작: 기 드 모파상
연출: 박지혜
각색: 양손프로젝트
드라마투르그: 손상규
출연: 양조아, 양종욱
조명/무대디자인: 박슬기
그래픽디자인: 천녕슬
오퍼레이터: 이희애


제작: 양손프로젝트
주최/주관: 소극장 산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