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 갖는 몇 가지 물음들 - 2015인디다큐페스티발

2015. 4. 16. 08:45Review

 

인디다큐페스티발 2015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 갖는 몇 가지 물음들

글_김민관

 

인디다큐페스티벌2015에서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 3월 27일과 31일, 두 차례 상영됐고, 31일에는 포럼이 함께 열렸다. 포럼에서 이야기된 주요한 언급을 소개하고, 영화에 대한 단편적인 감상도 함께 전하고자 한다.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audio visual film Critique)이라는 이름 자체가 국내에서 생소하다. 이를 문장으로 구성한다면 ‘시청각적 매체로써 필름(영화)을 비평한다’쯤이 되겠다. 시청각적 필름(에 대한) 크리틱이 아님에 유념하자. 이는 결과적으로 시청각적 비평이 영화에 ‘포함’되는 형태의 또 다른 필름 양상으로 드러나며, 그러한 포함은 때로 ‘불포화’ 상태로 드러난다고 보였다. 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영화(의 장르)라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니까 비평(의 영화적 장르)이 영화 그 자체로 수렴, 승화되는 것은 가능한가. 한편, 이러한 장르 혹은 ‘다른 비평’의 형태가 동일한 이름으로 단 하나의 상영을 통해, 이 장르 자체가 하나의 영화(들의 묶음)의 제목이 된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는 자기 지시적인 언급이라는 점에서, 이 새로운 장르에 대한 메타 비평적 접근이 이뤄질 여지가 농후해진다.

인디다큐페스티발2015의 프로그램으로, 작품의 상영 이후 열린 페스티벌의 부대행사인 다큐멘터리 포럼에서 발표자로 참여한 유운성 영화평론가가 “심포지엄을 위한 참고 상영”이라고 이번 상영의 취지를 소개한 것이 전적인 농담만이 아닌 것은, 기존의 영화들을 차용한 것의 저작권 문제가 불거져 나올 것(사실 이번 포럼에서 그것과 함께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플랫폼 마련을 통한 지속 가능성에 대한 언급이 꺼내지긴 했으나 깊게 들어갈 시간은 부족했다)에 대한 일말의 우려 외에, 이러한 학술적인 차원에서의 근본적인 물음과 성찰의 성격을 가져가려는 의도가 이미 이러한 군더더기 없이 투명한(?) 제목에서 드러나고 있었다고 보인다.

도대체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은 무엇인가? 유운성 평론가의 발표를 따라 정리해 본다면, 영화 작업이 디지털 방식으로 옮아가는 90년대 후반의 시점과 맞물려 ‘파운드 푸티지’의 실천 양상이 한층 구체적인 양상으로 ‘확장’되며 그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며, “영상의 전유와 자율화”를 가능케 했고, 나아가 “비평적 차원을 획득”하게 됐다는 것이다. 가령 영상 아카이브의 보고(寶庫)인 유투브와 같은 채널에서 영상을 자유롭게 구할 수 있게 되는 것과 함께 기존의 자료들을 ‘인용’의 소재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실제 2014년 호주 멜버른국제영화제는 자크 리베트의 <아웃 원(Out 1)>에 대한, 몇몇 평론가들의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 작업을 맡긴 바 있는데, 그 중 케빈 B. 리는 그 자신의 ‘판도르Fandor’라는 사이트에서 ‘매우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 작품인듯 작품아닌 작품같은 “너”,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 캡쳐본

 

이날 현장에서는, ‘이미지의 전적인 자율화’(유운성)나 “단순한 ‘예증’으로서의 ‘인용’”의 불가능성(변성찬)이 주요 화두로 부상했다. 가령 유운성의 의견을 좇는다면, 때로 비평(글)은 이미지를 더 적절하게 설명한다. 또는 이미지의 인용이 본래의 이미지에 대한 부족한 접근이 된다. 가령, 글은 이미지를 전적으로 묘사할 수 없지만, 전적으로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이는 소쉬르의 기표-기의로 이뤄진 언어 작용을 떠올리게 하는데, 기표(말의 소리)가 기의(이미지)의 연쇄 작용을 자동적으로 낳듯 글(묘사)은 이미지(장면)를 함축하는 것이다. 반면 하나의 이미지는 기호학에서 ‘계열체’의 일부로서, 그 자체로 분리되는 순간 원래 갖고 있는 의미를 잃게 된다. 따라서 말이 묘사한 이미지는 원래의 영상 조각 그 자체가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외떨어져 원래의 영상으로부터 전적으로 ‘자율화’되지 못하는, 이미지(훼손의 결과)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용’하기 위해 떼어내는 순간,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그 이미지가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계열체 안의 맥락에서 역시 자유롭지 않음(자율화되지 않음)을 또한 의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곧 다른 맥락으로 재배치될 수 있는 가능성을 띤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는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라는 장르가 파운드 푸티지의 기괴한 산물이나 변용태라기보다 파운드 푸티지라는 장르 자체의 내재적 특성이 이미 비평적 작업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선취하고 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다시 이어진다고 하겠다.

이날 포럼에 참여한 사회를 맡은 안건형 다큐멘터리 감독, 유운성·변성찬 영화평론가를 비롯해, 총 12명의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 상영됐는데, 이는 지난 1월부터 3달 정도, 미디액트에서 진행된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 강좌-포럼에 참여한 3명은 강사로-에 참여하여 만든 결과물들인 것이다.

실제 인용된 영화들을 보는 것은 실제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른 경험이었다. 감독의 부재가 은폐된 영화적 이미지의 현존을 그 자체로 경험하는 대신, 그것을 편집해서 보여주는 이의 시선이 매개돼, 어떤 경우에는 2차적인 감독 또는 편집자의 신체적 현존으로 영화적 경험이 옮겨 가기도 했다. 이는 내레이션이라는 장치에서 전적으로 그리고 극적으로 빚어졌는데, 평평한 영상 자료에 울퉁불퉁한 목소리와의 거리가 합성돼 스크린의 표면에 포함되며 불포화됐던 것이다. 이는 일견 우리가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보는 과장된 리액션의 내레이션, 또는 진지한 ‘코멘터리’ 식의 접근 같은 영화적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는 영화를 축약해서 ‘주요 장면’이라는, 그러나 전적으로 결말은 배제한 채 몇몇 장면을 보여주며 거기에 묘사를 더하며 영화적 경험을 중계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영화 소개’ 같은 시청각적 비평의 양상은, 이미지의 비평에의 종속보다는, 오히려 비평의 이미지에의 종속의 결과를 낳는 것처럼 보였다. 보이는 이미지를 말이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기존의 “글 비평의 ‘인용 불가능성’”(변성찬)은, 앞서 말했듯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에서 영상 비평의 인용 불가능성으로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또 다른 인용의 문제(‘전적으로 자율화되지 않는 이미지’)로 옮아가는 것과는 별개로, 어떻게 보면 실천되지 않은 새로운 이미지를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거나 이미지와 이미지에 간극을 삽입하여 비평적 경험을, 이미지-시간의 경험을 낳을 수 있음의 가능성을 갖는 것은 아닐까.

 

▲ 실제 소년의 성장과정을 극영화와 포개어 만든 작품 <보이후드>(2014, 미국)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영화 <보이후드>의 주인공의 늙어감의 현존을 가시화하는, 3시간에 육박하는 러닝타임을 주인공의 확연한 외모 변화의 단 3장면으로 압축해 보여주는 하나의 단편(참고로 크레딧이 너무 빨리 올라가거나 또는 생략돼 각 영상의 제목을 알 수 없는 경우가 생겨났다)은, 한 관객에게 충격을 선사했다. 그의 경험이 포럼의 주요한 의제로 떠올랐고, 기존 극영화(앞서 영화적 현존은 이런 극영화의 대부분의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의 진지한 몰입이 붕괴될 수 있음의 가능성이 문제시됐다. 그러한 우려는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 기존 영화를 대체하기보다 기존 영화, 비평이 갖지 못하는 가능성의 또 다른 실천으로 봐야 한다는 유운성 평론가의 말로 정리·답변되기는 했지만, (압축을 포함한) 인용으로 인한 소비가 영화의 본래적 경험을 해체할 수 있음은 분명한 듯 보인다.

처음 장면들 이후에야 나오는 자막으로만 처리된, 인용된 영화들의 짧은 컷들을 담은 단편을 보며 갑자기 영화가 얕은 이미지로 체현됨을 느꼈다. 곧 ‘이것은 이미지다’라는 것이었다. 이는 영화를 영화 그 자체로 본다는 게, 실은 영화를 지나간 이미지들의 총합이 아닌, 현재 발생하는 매력적 이미지의 시간으로 봄을 새삼 자각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그럼에도 산개된 이미지가 전적으로 산만한 경험을 안기는 것이라고는 볼 수 없을 듯하다. 이는 장면들을 잇는 말이라는 매체로의 수렴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기묘하게도 각각의 감독/비평가는 대체로 자막 이상으로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엮는 가운데, 냉정해지기보다는 그 자신의 목소리 내기에 심취해지는 듯했다. 그러니까 글이라는 매체에 비해 자신의 녹음을 하고 있음의 동시적인(그리고 도래할) 현존에 잔뜩 더듬이를 내세우게 되는 듯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처음 영화를 감상하며 받았던 인상을 전하듯, 본래의 1차적 영화적 경험의 재현에 침잠하기도 했다.

 

▲ 365개의 저작권료 없는 동영상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디지털 시대의 유물>(2014, 브라질) 프리데리코 후아스 감독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창립 시절, 산업혁명 이후의 분업화된 시스템을 적용해, 효율적인 작업 진행의 이면에, 노동자의 임금 착취의 문제가 숨겨져 있음을, 디즈니 애니메이션 필름들의 나열과 함께 자막으로 보여준 또 다른 단편은, 크리틱이 그 자체로 영화로 수렴돼 일종의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필름으로 보이게 된다는 점에서, 따라서 말이 영화에 포화된다는 점에서, 여타 내레이션을 쓴 영상에 비해 특이하다고 느껴졌다. 그런 점에서 영상 그 자체의 완성도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기존 다큐멘터리 필름과 유사성·연속성의 차원으로 수렴되며,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만의 차이를 어떻게 드러내는지에 대해서 또 다른 물음을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이는-영화 사운드 이론가 미셸 시옹의 의견을 좇는다면- 이미 무성영화에 자막을 삽입하며 구현된 “텍스트-말”의 연장선상의 논의이다. 곧 이는 “시청각 장면의 독자성”, “시-공간적 연속성”의 개념을 의문에 부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극영화의 몰입, 거기에 전제된 말과 영상의 일치, 곧 “연극-말”-영화는 태생적으로 연극을 모방·함축하며 등장했으며, 연극 그 자체를 영화로 옮기고자 하는 시도가 초기에 존재했다-의 정반대의 위치 전환(적 실험)이 되는 것이다. 초창기에 무성영화로부터 출발한 영화가, 유성영화가 등장할 당시에 이미지의 자율적 실험을 훼손한다는 비판이 부상했었다는 것을 떠올려보자. 이쯤에서 다시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라는 이름 자체로 자연스레 돌아오게 되는데, 다시 돌아온 이 이름은 마치 시청각의 합치될 수 없는 간극/균열이 ‘필름’과 외떨어져 그것(필름)을 과잉으로 수식하는 것으로 지각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아마도 텍스트-말의 가능성을 실천하거나 온전한 ‘묘사’를 향한 낭만주의적 내레이션의 가능성을 실천하는 것에 가까워 보이는(이른바 비평을 넘어 일종의 연기演技의 측면을 체현하는)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특성에는 아마 해당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는, 마지막 세 번째 “발현-말”이 있는데, 이는 “유성 영화 초기에 말을 상대화하고자 하”는 운동에 닿아 있다. 여기서 말은 명료한 것이 아닌, 음향의 일부, 곧 물질이 된다. 어떻게 보면 말과 이미지의 일치(연극-말), 말과 이미지의 대립(텍스트-말)이 아닌, 이미지와 말의 병치의 측면을 구현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명확한 말’의 가능성으로 이미지를 전유하거나 소격시켜야 하는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에서의 오디오(비평)는 비디오와의 간극을 완전히/온전히 은폐할 수 없는 지점을 향해 가야 하는 운명 아닌가.

포럼의 결과를 인계해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의 가능성과 전망을 점치기에 아직은 시기상조(더 많은 경험이 뒤따라야 하며 이것이 거의 최초의 국내의 공론화된 장에서의 상영이자 언급이라는 점에서)라는 식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을 공연의 크리틱에 가져온다면 어떨까 하는 개인적 의문이 한편에서 부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쯤에서 이야기의 방향을 튼다. 곧 메타 연극·무용이 가능하냐는 것.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이 필름이라는 상영 형식을 그대로 있는 것이 가능한 것에 비해, 관객과의 동시적 현존을 지향하는 공연으로서는 영상 아카이브의 인용 차원으로는 불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 개인적으로 메타 연극·그리고 메타 크리틱, 나아가 메타 크리틱적 연극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기에 그러한 다른 매체에서의 비평의 다른 실천 양상의 연장에서 이를 생각해볼 여지가 있었다. 곧 이번 자리의 논의를 영화라는 매체에 한정지을 필요는 없다고 보인다. 그럼에도 개인적 생각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보다는, 앞서 언급된 부분들만으로 인용의, 비평의, 나아가 영화(이미지)의 근원적 문제로의 수렴의 지점들을 생각해보는 것은 다른 매체의 실천 양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단서가 될 것 같다는 것으로 이를 대신한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또 다른 논의(의 장)를 기약한다.

 

*인디다큐페스티발 홈페이지 바로가기 >>> http://www.sidof.org

**사진출처 >>> 인디다큐페스티벌 홈페이지, cine21.com (보이후드), 네마프 홈페이지(디지털시대의 유물)

 필자_김민관

 소개_공연예술 프리랜서 기자 및 자유기고가. 문화예술 분야에 전반적인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현장을 쫓아다니며 기록 중. 온라인 뉴스채널 http://artscene.co.kr 편집장

 

  오디오 비주얼 필름 크리틱

 감독_권은혜, 권진경, 김다연, 박다윤, 박진희, 변성찬, 송재상, 안건형, 연승주, 유운성, 이희향, 장승미

 작품정보_2015 | HD | Color | 83min | 자막없음

 시놉시스_ 오늘날의 영화비평가들은 더 이상 문자나 말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룬 파로키나 톰 앤더슨 같은 비평적인 영화감독들은 물론이고, 켄트 존스, 태그 갤러거, 케빈 B. 리 등 현장 영화비평가들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영화 그 자체를 활용하는 사례도 빈번해지고 있다. 본 작품은 존 포드, 허우샤오시엔, 장-피에르 주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장률, 사라 폴리 등의 감독, 영화의 존재론 그리고 오늘날 영상문화 전반(애니메이션, 서브컬처, 다운로드) 등의 주제에 대해 시청각적인 자료들을 다양하게 활용해 비평적으로 접근해 보려는 시도다.

연출의도_2009년에 작고한 영화비평가 고(故) 로빈 우드는 비평의 대상이 되는 문학작품을 직접 “인용할 수 있는 문학비평가들은 얼마나 큰 이점을 지니고 있는가!”라고 말하며, 자신이 비평하는 대상을 창작하는 이들과 같은 도구로 작업할 수 없는 영화비평의 한계를 애석해했다. 영화감독 장-뤽 고다르는 “진정한 영화비평가는 이제 영사하게 될 것”이라며 예언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어느덧, 오늘날의 영화비평가들은 더 이상 문자나 말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하룬 파로키나 톰 앤더슨 같은 비평적인 영화감독들은 물론이고, 켄트 존스, 태그 갤러거, 케빈 B. 리 등 현장 영화비평가들이 영화에 대해 말하기 위해 영화 그 자체를 활용하는 사례도 빈번해지고 있다. 본 프로그램은 미디액트에서 진행된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 강좌의 결과물로서, 영화비평 및 시각예술의 영역을 넓히고자 한다.  (본문출처 : 인디다큐페스티발 2015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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