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크리에이티브 바키+두산아트센터 <Before After>

2015. 11. 28. 16:42Review

 

트라우마의 재현: 기억, 타자, 윤리의 문제들

<Before After>

크리에이티브 바키+두산아트센터

 

글_황지윤

 

망각의 불가능성

풀을 뜯어먹으며 네 옆을 지나가는 가축 떼를 한번 보라. 그들은 어제가 무언지, 오늘이 무언지 모르고 그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먹고 쉬고 소화하고 다시 뛴다… 인간은 동물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너는 왜 너의 행복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고 그저 나를 쳐다보기만 하는가? 동물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이야 - 그러나 동물은 이 대답 역시 곧 잊어버렸고 침묵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조차 잊어버리고 마는 동물의 순진무구한 기억력이 오히려 행복에 근접하는 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결코 망각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성이나 의지로는 설명되지 않는 영역의 것이며 잊고 싶어도 잊혀지지 않는 종류의 기억이다. 잊은 줄 알았던 혹은 저 깊숙한 곳에 잘 봉인해두었다 생각한 기억들이 생각지도 못한 순간 수면 위로 떠올라 우리에게 당혹감을 선사한다. 때로는 치유된 줄로만 알았던 상흔이 어느 순간 우리를 압도하고 잠식하기도 한다. 어떤 상처들은 무의식의 영역에 지워지지 않는 흉터로 남아있다. 이는 마치 어느 해인지 모를 겨울에 걸렸던 동상이 예기치 않은 추위에 덧나듯,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과거의 아픔이 현재화 되기도 한다.

나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있는 반면, 망각해서는 안 될 기억도 있다. 우리는 때로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지려 하는 기억을 ‘지금, 여기’에 붙잡아 두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는 기억이 윤리적 행위가 될 때이다. 우리는 기억함으로써 책임을 진다. 인류 문명의 악(惡) 앞에서, 악의 행위 주체인 인간의 망각은, 순진무구한 동물의 망각 행위처럼 손쉽게 정당화 되지 않는다. 사건 사고로 가득한 이 세계 내에서 내가, 우리가,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가 무엇을 기억할 것인지는 지극히 선택적이다. 그런 이유에서 더더욱, 특정한 사건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은 정치적인 동시에 윤리적이다.

최근 이어진 문화예술계의 검열 사태와 관련하여 무엇을 기억하고 표현할 것 인지에 관한 문제는 더욱 중요해졌다. 국가적 차원에서 벌어진 검열을 통해 우리는 특정한 사건은 공적인 애도가 부인되는 부조리한 일이 자행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모든 삶이 동등한 무게를 지닌다면, 왜 누군가의 죽음은 공적 영역에서 이야기 될 수 없는가? 왜 특정한 소재를 다룬 예술은 제지 당해야만 하는가? 기억의 윤리와 그 정치적 함의를 고민한 연극 - 10월 23일부터 11월 7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된 극단 크리에이티브 VaQi의 <비포 애프터>는 트라우마적 사건의 전과 후에 관해 이야기한다. <비포 애프터>는 망각할 수 없는 트라우마적 기억을 애써 환기하고 공적 애도가 부인된, 그러나 그 애도가 결코 부인되어서는 안 될, 특정한 사건에 관해 적극적으로 기억할 것을 요청한다.

 

 

타자 사유하기 - 취약한 몸과 죽음

공연에 앞서 관객들은 안전한 공연 감상을 위한 수칙을 제공 받는다. 물론 모두가 긴급히 대피하는 비상 상황이 없어야 하겠지만 배우들은 ‘유사시’에 ‘생존률’을 높이기 위한 대피 지침을 친절히 일러준다. 관객들은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의 안면을 인식해둘 것을 요구 받는다. 머쓱한 표정으로, 어색한 웃음을 나누며 옆자리에 앉은 이의 얼굴을 살피느라 관객석이 술렁인다. 하지만 어두운 극장에서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의 얼굴을 정확히 인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비상시에 정전이 되거나, 출구를 찾아 신속히 대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옆 사람의 얼굴을 살피기는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리하여 대안은 직접적인 접촉이다. 배우들은 옆 사람의 손을 잡을 것을 종용한다. 그렇게 반 강제적으로 우리는 옆 자리에 앉은 타인의 손을 잡는다.

무대 위의 배우들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의 얼굴을 한참 더듬는다. 어둠 속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인지할 수 있게 상대의 얼굴 윤곽을 감각하고 지각함으로써 기억에 남기고자 한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단순한 바라봄의 대상으로 타인을 인지하는 것을 넘어서려는 시도이자, 본 공연을 감상하는 동안 만큼은 ‘인식’이 아닌 ‘감각’으로 타자를 사유하고 다가갈 것을 관객에게 요청하는 일종의 예비 작업이다.

 

 

일행의 손을 잡았든 전혀 알 지 못하는 낯선 타인의 손을 잡았든, 위기의 순간을 상상하며 잡은 타자의 손에서 느껴진 감촉은 이상하리 만치 생경하다. 이것이 나의 신체적 취약성을 환기한다면 과장일까? ‘유사시’에 언제든 훼손될 수 있는 나의 신체는 불확실한 삶 속에서 유약하게 흔들린다. 나의 신체 그리고 마찬가지로 취약한 타자의 신체는 그 취약함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타자 의존성은 신체의 취약성을 통해 환기되며 타인과의 접촉을 통해 강화된다. 우리 몸은 취약하기 때문에 타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근본적 의존성이 윤리적 가능성의 토대가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상에서 우리 신체의 취약함을 극단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은 바로 죽음의 경험이다. <비포 애프터>에 등장하는 배우들은 각자가 지닌 상이한 경험들에도 불구하고 죽음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연결된다. 병환으로 인해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가는 아버지를 지켜보는 배우 성수연의 이야기에서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형언할 수 없는 공허와 우울을 느낀 배우 채군의 잔잔한 랩 가사가 이어진다. 2014년 4월 16일, 히말라야 등반 중 팽목항의 무수한 죽음을 전해 듣고 유감을 표한 배우 김다흰. 그리고 배우 장성익은 80년대 시위에 참가했던 기억을 풀어 놓는다. 그는 시위 현장을 죽음의 문턱으로 기억한다. 시위 진압이라는 미명 하에 행해진 극심한 국가 폭력으로 실명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음을 고백한다. 시위에 관한 기억을 풀어내는 와중에 윤일병의 죽음이 사진을 통해 넌지시 언급되기도 한다.

<비포 애프터>에서 죽음은, 죽음에 관한 사적인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어느 순간 공적인 죽음으로 외연이 확장된다. 타자의 죽음이라는 상실의 경험이 환기하는 신체의 취약성이 어떻게 윤리적이고 공적인 책임감으로 확장될 수 있는 지 보여준다.

 

 

한 명의 가해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나와 너의 신체적 취약성으로부터 윤리적이고 공적인 책임감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 능력을 전제로 한다. 극에는 배우 나경민과 성수연이 나란히 의자에 앉아 연기 연습을 하는 장면이 있다. 연습의 주제는 ‘슬픔’이다. 슬픔을 온전히 연기하기 위해 성수연은 가만히 의자에 앉아 슬픔의 구체적 상황을 상상하고, 이 슬픔이 야기하는 고통을 온 몸으로 느끼고 표현한다. 슬픔에 몰입한 성수연의 감정 상태가 점차 고조되자 나경민이 말한다. “자 그럼 이제 대사를 넣어보자.” 성수연은 고통과 슬픔으로 울부짖으며 대사를 읊는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세월호 침몰사고가 발생한지 오늘로 34일째가 되었습니다. 온 국민이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아픔과 비통함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께서 겪으신 고통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너무나도 담담하게 읽혔던 국가 수장의 대국민 담화문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지난 한 달여 동안 국민 여러분이 같이 아파하고, 같이 분노하신 이유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차분히 담화문을 읽어 내리며 한줄기의 눈물과 함께 공식 사과를 마무리 지었다. 그가 국민의 아픔과 분노를 정말로 잘 알고 있는지, 과연 얼마 만큼의 진정성을 담아 사과 했는지는 미지수이다. 다만 성수연이 보여준 슬픔의 연기는, 국가 수장의 대국민 담화가 동일시와 공감이 결핍된 실패한 ‘연기’였음을 노골적으로 폭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가해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지적했듯이, 세월호 사건은 가장 처참한 방식으로 누적된 부패의 고름이 터져 나온 구조적 사건이다. 복잡하게 얽힌 부패의 구조 속에 놀라울 만큼 이기적인 선장과 총체적 무능을 행사한 국가권력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사건의 본질을 직시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세월호의 선장에게 모든 죄를 전가하고 사건 직후 7시간의 종적이 불투명한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덮어 씌우는 편리한 방법을 택해선 안 된다.

그래서일까. 세월호 침몰을 재현하는 장면에서 배우 장수진이 왕관을 쓰고 관객석 맨 앞 줄 한 가운데 앉은 것이 유독 불편하다. 무대 위에 설치된 카메라는 왕관을 쓴 장수진의 얼굴을 클로즈업 촬영한다. 배우는 가라앉는 배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승객들을 담담히 지켜본다. 한 치의 미동도 없이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장수진의 얼굴은 감정의 변화 없이 담화문을 읽어 내려가던, 특정 인물에 대한 지목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얼굴을 상상할 수 없는 추상적 존재인 국가가 실존하는 특정 인물로 환원될 때, 우리는 세월호 사건의 복잡다단한 구조적 부패를 파헤치는 작업으로부터 되려 멀어지는 것은 아닌가?

 

 

트라우마의 압도: 재현과 거리두기

공연의 세월호 침몰 재현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다. 체육복을 입은 단원고 학생들로 분한 배우들이 무대의 바닥에 달라 붙어 테이블이나 의자와 같은 무대 장치를 절박하게 붙잡는다. 배우들의 몸짓은 카메라에 의해 촬영되어 무대 후면에 위치한 두 개의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된다. 무대 위의 재현과는 달리 스크린의 영상은 왜곡된 화면을 통해 기울어진 선체를 효과적으로 담아낸다. 마지막 순간 학생들이 주고 받은 카카오톡과 문자의 내용이 배우들의 입을 거쳐 대사로 전달된다.

침몰의 재현 장면은 체육복을 입은 배우들이 구부정한 자세로 차곡차곡 서로의 등 뒤에 연속적으로 눕는 연출로 끝난다. 겹쳐진 몸들은 싸늘한 주검이 된 학생들을 연상시킨다. 장면이 진행되는 와중에 관객석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탄식이 산발적으로 들려온다. 장면이 끝난 이후에는 간신히 참았던 통곡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기도 한다. 이어지는 고통을 감당하지 못해 공연이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자리를 지키며 숨을 고르는 사람들이 있다. 관객들은 재현 장면의 압도감에 몰입한 듯하다. 그렇다면 문제적 재현이 관객에게 불러 일으킨 정서는 과연 무엇인가? 만약 환기된 정서가 극심한 고통과 공포라면, 그의 연원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폭력을 직접적으로 건드리게 되면 폭력은 반드시 신비화 되는 경향이 있다. 이는 지젝의 말이다. 그는 폭력 행위가 갖게 하는 압도적인 공포감과 희생자에 대한 감정이입이 불가피하게 우리의 사고를 정지시키는 미끼로 작용함을 주시한다. 폭력의 유형을 개념화하고 폭력의 본질에 대해 냉정히 사유하기 위해서는 폭력으로 인한 정신적 충격을 무시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폭력의 재현은 필연적으로 어느 정도는 폭력을 재생산하고 공포감을 조성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이라는 주제에 접근하는 가장 적절한 방법은 사실로서의 진실(truth)을 넘어 진정성(truthfulness)에 호소하며 폭력의 희생자들을 존중하는 동시에 폭력에 다양한 변주를 시도하며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비포 애프터>에서도 거리두기의 작업이 완전히 부재하는 것은 아니다. 무대는 두 대의 카메라와 스크린, 몇 개의 의자와 테이블 등 여태까지의 배치 그대로 단출하게 유지된다. 시시각각 기우는 선체와 승객들의 급박한 상황을 전시적으로 보여주는 스크린을 미디어의 포르노그라피적인 보도를 환기하는 거리두기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화(異化)의 장치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문제적 재현 장면을 현실에 근접한 사실적 재현으로 인지하며 모종의 동일시를 경험한다. 학생들의 체육복, 대사를 통해 전달된 마지막 순간의 카카오톡과 문자들과 같은 미세한 장치 만으로도 관객들은 반사적으로 고통에 이입한다. 이는 극에 의한 효과이기보다는 현실에 의한 타격이다. 관객이 폭력의 재현을 통해 느낀 압도감, 고통, 그리고 공포의 정서는 극적 효과에 의해 유발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한 실제적 사건에 연원을 둔다.

연출은 세월호 사건이라는 국가폭력의 트라우마로부터 치유되지 않은 관객의 무조건 반사적 감정이입을 영리하게 활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폭력의 재현이 극적 긴장을 폭발시키는 하나의 도구로 이용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추궁이다. 그렇지 않다면, 연출 역시 비극적 트라우마의 일원이기 때문에 지젝이 그토록 경고한 폭력의 본질에 관한 냉정한 사유를 수행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래로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라고 천명한 이래로, 예술의 영역에서 재난의 재현 불가능성에 대한 논의는 아주 섬세하고 조심스레 다루어져 왔다. <비포 애프터>는 웰메이드 연극이다. 그러나 동일시를 이끌어내는 재현의 방식이 조심스럽게 숙고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 성수연이 사지를 비틀며 추는 춤은 일종의 씻김굿으로 죽은 넋들을 위로한다. 그러나 이 감정적 위무는 연극이 던진 질문에 대한 충분한 답이 되지 않는 듯하다.

 

 

부록. 그리고 남은 기억들

공연이 끝난 후, 함께 공연을 본 일행과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며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재현을 보았다” 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그렇게 계속 술을 들이켰나보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낯선 곳에서 깨어났다. 부재중 통화를 확인하고 희미해진 간밤의 기억들을 고생스럽게 상기했다. 그래 여기서 마시다가, 거기로 갔다가... 그리고…. 다행히도 사지가 멀쩡했고 잃어버린 물건도 없었다. 가방 속에 들어있는 낯선 물티슈 한 팩만이 간밤의 방황의 흔적으로 남았다. 심한 숙취를 느끼며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와 깊은 잠을 잤다.

잠에서 깬 후의 극심한 숙취, 피로, 공복감에도 불구하고 보다 생생하게 느껴진 감각은 어제의 공연에서 보아야만 했던 고통스러운 재현에 관한 기억이다. 니체의 동물처럼 순진무구하게 어제의 일들을 모조리 망각할 수 없기에 공연에 관한 기록을 남기기로 마음 먹었다. 니체는 “불면과 되새김질”이 인류를 파멸로 이끈다고 말했지만, 감각된 고통을 쉬이 망각하지 않고 불면과 되새김질을 지속하는 것이 필요한 기이한 시대인지도 모른다.

 

본문각주

* 프리드리히 니체. 이진우 옮김.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서울: 책세상, 2005. 「반시대적 고찰 Ⅱ: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이진우 옮김.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서울: 책세상, 2005. 「반시대적 고찰 Ⅱ: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주디스 버틀러. 양효실 옮김.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 부산: 경성대학교 출판부, 2008. 「2. 폭력, 애도, 정치」 참조

***슬라보예 지젝. 이현우 외 옮김. 『폭력이란 무엇인가: 폭력에 대한 6가지 삐딱한 성찰』. 서울: 난장이, 2011. 「서문」

 

*사진제공_두산아트센터 

 필자_황지윤

 소개_연극을 보러 다니는 철학도입니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삽니다.

 

 

 작/구성/연출: 이경성

 작/출연: 장성익, 나경민, 장수진, 성수연, 채군, 김다흰      드라마터그: 전강희

 무대디자인: 신승렬 / 조명디자인: 고혁준 / 사운드디자인: Kayip / 보이스코치: 최정선 /  

 영상디자인: VISUALS FROM. / 움직임지도: 이소영

 제작: 두산아트센터, 극단 크리에이티브 VaQ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