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절망에게 안부를 묻다 <아이엠파인투>

2015. 12. 19. 09:49Review

 

절망에게 안부를 묻다

<아이엠파인투>

극단 달나라 동백꽃

 

글_권혜린 

 

어떤 죽음은 애도되지 않는다

무대 위에 일곱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중앙에 한 개가 있고, 양옆에 세 개씩 놓여 있지만 일정한 규칙이나 질서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 의자들은 곧 도시의 소음 속에서 바쁘게 다니는 사람들과 섞이며 일상이 된다. 그러나 인물들은 의자들을 바로 지나치지 않고 의자 옆에서 잠깐씩 멈춰 무엇을 찾는 듯 의자에 시선을 둔다. 그리고 그 의자들은 곧 사회에서 일어나는 ‘우발적’인 살인, 폭행, 자살 들을 상징하는 ‘분노’의 자리이자 그러한 행위를 한 이들을 심문하는 공간이 된다. 표면적으로 이러한 죽음-물리적인 죽음이든, 정신적인 죽음이든-은 애도되지 않는다. 행위를 한 이들이 범죄자로 낙인찍히거나, 실패자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가 일어나기 전에 이들이 괜찮았는지, 한 번이라도 안부를 물어볼 수는 없을까? 또는 그러한 행동을 촉발한 분노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할 수는 없을까? <아이엠파인투>는 이렇게 사회면의 기사 몇 줄로 요약할 수 없는 공백들을 추적하고자 하는데, 특히 한창 ‘괜찮아야 할’ 젊은이들의 분노로 일어난 사건들의 정황을 파악하고자 한다. 물론 그 정황은 연극 속 대사에 따르면 “쓰여진 것”이 아니라 “추측과 상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서,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러니 당연히 정답이 있을 수 없으며, 그 과정이 원활할 리 없다.

 

 

짐작과는 ‘다를’ 일들

이 지점에서 <아이엠파인투>는 정답이 없는 과정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는 방법을 택한다. 30대, 반지하, 취업준비생, 상경, 시위, 기자, 휴직, 대학원생 등 파편화된 정보들로 규정되는 인물들의 정체성은 그 인물을 연기하는 배우의 정체성과 경계를 허물면서 서로 넘나든다. 그뿐만 아니라 배우들의 경계 역시 자유롭다. 취업준비생의 역할을 하는 배우가 의자에 앉으면, 그 배우의 실명을 거론하면서 다른 배우들이 그 배우에 대해 설명하고 그 배우를 연기하는 식이다. 의자에 앉은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하는데 이는 연극 만들기의 과정을 그대로 연극 속에서 그리는 메타연극에 해당한다. 자신도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인물을 연기하는 것은 그 인물에 관해 짐작하는 것들과는 ‘다를’ 예측 불가능한 일들을 보여주는데, 그 안에 실제의 자신이 투영되기도 한다. 특히 자기반성적인 모습을 보일 때 그것이 배우의 실제 경험인지, 아니면 연극 속의 대사인지 혼란을 주면서 확실하게 설명할 수 없는 분노 자체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토사물을 쪼아 먹는 비둘기와 무료 급식으로 받은 짬뽕 밥을 먹는 노인을 동일시하면서 분노를 느끼는 자기 자신에 대해 또다시 반성하는 모습은 그들이 ‘왜’ 분노해서 일을 저질렀는지를 설명하는 것에는 정작 비껴가고 있지만, 더 근원적인 부분을 건드리고 있다.

 

 

그러므로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보여 주는 에피소드들은 인물들의 삶이 분노의 밑바탕에 깔린 절망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가정폭력을 벌레와 동일시하면서 집에 들어가기 싫은 마음을 표출하는 남자, 상경해서 여러 집을 전전하며 지상에 방 한 칸 얻기 어려운 고달픔을 길을 헤매는 모습으로 보여주는 여자, 부당해고를 당한 직장에 복귀하지 못하고 집 안에 또 다른 집인 박스를 만들어 칩거하는 남자, 어항 속 물고기처럼 연구실에 갇혀 끝없는 일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자, 끊임없이 자기소개서를 생산하는 여자, 모두의 일이라고 생각해서 참여한 시위에 대해 친구에게서 멋있다는 말을 들으며 자신의 삶이 철저히 타자화되었음을 느끼는 남자 등의 사연은 겹겹의 절망들이 쌓인 뒤 서서히 분노의 지점으로 점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점화되는 과정은 쳇바퀴 돌듯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으로서 끊임없이 원을 그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분노는 알게 모르게 쌓였을 것이다. 자신을 함부로, 무례하게 대하면서 고맙다거나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무심한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못하고 스스로 삭이면서 억누른 분노가 늘어났을 것이다. 문제는 알지만 해결책은 없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노력만을 요구당하는 처지가 분노를 늘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새 절망이 붙인 분노가 폭발하면서 존재가 무너지는 소리는 극 속에서 처절한 파열음으로 나타난다.

 

 

탈출의 불가능성

삶의 파열음으로 나타나는 파국은 지구의 종말로 확장된다. 이는 배우들이 번갈아가며 하는 내레이션 속에서 펼쳐지는 잔혹 동화로 상징된다. 지구의 종말로 홀로 남은 ‘불쌍한 아이’가 구원의 공간을 찾기 위해 달과 해와 별을 찾아가지만 이는 각각 썩은 나뭇조각, 시든 해바라기, 녹슨 바늘이라는 현실로 아이에게 다가온다. 결국 구원을 찾지 못한 아이가 돌아오는 곳은 지구이다. 구원을 향한 방황이 제자리로 회귀한다는 것으로서, 절망에서 탈출하고자 하지만 돌파구가 없는 지구는 ‘엉킨 실 뭉치’로 나타난다. 시간이 경과해도 여전히 그대로인 상황에서 남는 것은 ‘불가능’뿐이다.

 

 

고통인 몸

<아이엠파인투>는 그 불가능을 절망이나 분노로 표출하는 배우들의 몸성이 살아 있는 연극이다. 그것이 극대화된 것이 사회적 사건으로 인물들의 위치가 가시화되기 전, 그들의 분노가 스스로에게 일으킨 사건들이다. 격투하고, 몸부림을 치고, 종이를 먹고, 종이를 흩뿌리고, 형광등을 쬐며 자학하는 몸들은 ‘고통인 몸’으로서 죽을 자리를 마련하는 마지막 자리를 만든다. 인물들의 끝은 일종의 제의처럼, 난장처럼 슬픈 자유로 나타난다. 소리를 지르고, 단말마적인 춤을 추고, 가볍게 가려는 듯 옷을 벗고, 마침내 쓰러지는 모습들은 연극의 제목인 <아이엠파인투>가 철저하게 반어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에 처음과 맞닿은 독백으로서 반복되는 사건과 존재의 명명들은, 이들의 존재가 여전히 사회에서 보고 싶은 대로 규정되거나 이들의 사건이 일회적인 일로 치부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 번, 반복해서 이러한 사건들을 되뇌는 것은 인물들이 단순히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괜찮은 척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괜찮겠지?’라고 스스로 되물으면서 일상이 안정될 것이라고 믿었던 마음이 배반당했을 때 절망을 낳고, 분노를 쌓게 된다. 이렇게 분노의 원인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 미시적인 일들 사이에 있다. “바라는 것은 단 하나, 여기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이라는 대사는 고통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 안부를 묻는다면 평화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절망에 대한 것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 물음을 가능하게 할 조건이자, 물음의 답은 이미 연극 속에 있었다. 괜찮지 않다. 다만 괜찮은 척 할 뿐이다.

 

 

*사진제공_극단 달나라 동백꽃

**극단 달나라 동백꽃 SNS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moontheater00

 

 필자_권혜린

 소개_작은 매처럼 책과 책 사이를 날아다니고 싶은 ‘골방 탐험가’입니다. (blog.naver.com/grayhouse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