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당신의 구루마> 기도의 진술, 고백의 전술

2016. 2. 10. 10:56Review

 

기도의 진술, 고백의 전술

<당신의 구루마>

출연_한받, 김연희, 최소연, 정용택

 

글_H&M

 

1.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쫓겨남의 서사가 과포화된 나머지 내 통각점에 굳은살이 배겼다. 둔감이 곧 저질스러움인 것을 알지만 충격과 공포의 무게가 힘들어 이들 사이를 비집고 빠져나왔을 때 감수성 지수는 낮아졌다. 몇몇 고루한 논문과 정책들이 젠트리피케이션의 쓰라림을 경감한다는 명목 하에 예술가들을 문화 생태계의 천연기념물처럼 마냥 연약하고 보호할 대상으로 취급했다. 범론(汎論)에 대한 공연한 반감이 구석에서 몸을 옹그린 채 있었다. 타임라인의 공유와 좋아요는 강제철거 상황에 작은 위로보다도 나 스스로를 위한 무마에 가까웠다. 삽시간에 흘러내리는 파란 색 불빛들을 보면서 그토록 혐오했던 둔감함이 내 옆에 다가왔음을 알게 되었다.

대조적으로 한받과 구루부 구루마는 통증을 회피하지 않고 외려 자신의 바닥으로 삼아 강고해졌다. 그의 바닥은 딱딱하기보다는 사람들을 집어삼킬 수 있는 고해(苦海)에 가깝다. 한받은 고통을 풀어 넣은 깊은 물에 몸을 담군 채 ‘돈만 아는 저질’ 댄스와 ‘이단옆차기’ 등 독특한 헤엄을 치고 있는 중이다. 서강대에서 단 하루 막이 오른 <당신의 구루마>는 위 과정에 대한 축약본이다. 한받이 머물고 있는 물과 한받 자신과 그의 헤엄에 관한 연극이다. 극 속 쓴 물을 들이키면서도 계속 몸을 놀리는 한받 덕분에 나는 속으로 예술가가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반증했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굳은살을 걷어보았다.

 

 

한받의 연극은 2개의 막과 각 막에 3개의 장이 딸려있다. 각 장에 1에서 6까지 번호를 붙이자면 1. 기생운동 구루부 구루마, 2. 거리의 음악가, 3. 도시의 빈민, 4. 무너지는 거리, 5. 예수를 닮은 사람들, 6. 당신의 구루마 이다. 구성을 모른 채 극을 보아서 아직도 기억 속 <당신의 구루마>는 장이 나눠지지 않는다. 공연에서 받은 이상한 방식의 충격에 기억이 어그러져서 뇌에서는 극이 모호하게 잔존한다. 다만 인상적인 점과 점들이 남아있어 이를 임의적으로 연결해서 실로 삼고 이를 다시 직조하려한다.

작게 놀랐던 순간은 그가 할렐루야를 외쳤을 때이다. 어느 겨울 날 그의 아내는 쌀이 떨어졌다고 전화를 걸었다. 한받은 구루부 구루마를 끌고 거리로 나왔으나 CD 한 장도 팔지 못한 상황이었다. 갈급함에 주님을 찾아 기도했고 손님이 나타났다. 손님이 주고 간 CD값은 한 포대의 쌀이 되었고 남편은 당당하게 집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극 중 한받은 은혜에 감사하여 여호와를 찬양하였고, 나는 즉각적으로 아멘을 화답했다. 규범적인 대사(혹은 교회에서의 간증)가 발화되었을 때 관객들은 모두 웃었으나 웃음에는 서글픔이 자리 잡았다. 색동옷만큼 원색적인 한받의 일상 이야기는 그와 마주한 일상에선 들을 수 없었다. 공연장에서 언급된 비참함은 암묵적 예측과 맞아떨어졌다. 난 한받을 보았지만 삶에 대해서 못 보았다고 의식 없이 되뇌었던 것일까. 그와 처음 마주했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적 길이가 둔감함에 대한 내 부끄럼의 총 길이가 되었다.

 

▲ 독립영화<파티51>의 정용택 감독

 

울적한 고백과 간증은 더 세게 이어졌다. 두 번째로 마주한 슬픔의 경악은 정용택 감독이다. 그는 영화 <파티51>과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영화 속 두리반과 자립 음악씬은 존속했으나 <파티51>은 영화관에서 철거당했다. 상영관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잘못 없는 죄가 그에게 채무를 안겼다.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현 사태를 재서술하는 기제였다. 영화는 ‘뉴타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인간들의 잔학함을 지적하고 인간에 대한 너구리들의 봉기를 그렸다. 자본주의의 횡포, 연대와 투쟁 등 당연한 형용에 감독의 영화와 삶의 궤가 겹쳤다. 마땅한 소리가 삶의 궤적에 부딪혀 반사음으로 울려 퍼지자 내 속도 안심찮음에 큰 진폭을 가지고 요동쳤다.

마지막 당황은 스포트라이트 밑에 앉은 최소연 사장에게서 튀어나왔다. 철거 위험 속 그녀는 아들에게 편지를 썼고 공연장에서 읽었다. 먼저 크게 에둘러 결론을 끌어와 그녀의 읊조림이 강력했음을 말하고 싶다. 테이크아웃 드로잉은 작년부터 올해까지 중요 쟁점 위에 서있었다. 불행한 이슈 속 화제의 인물은 다른 각도의 조명을 받아 엄마라는 인간적 존재가 되었다. 소극장 무대 위에서 필연적으로 진솔한 가족극이 진행되었다. 강제집행을 목격했으나 다시 이를 목도에 둔 모자(母子)의 간접적인 대화는 재난 그 자체다. 한 엄마의 서간문은 비록 동그랗지는 않지만 얇게 퍼져있는 눈물방울 정도는 만들 수 있었다. 전의 고백들만큼의 혹은 그것 이상의 가슴 찔림이었다.

다만 에두름으로 가려진 이면에는 거북스러움이 숨겨진다. 최소연이란 한 인물과 더불어 그녀가 아들에게 쓴 편지가 위험하게 다가왔다. 언제라도 철거될지 모른다는 가능성 역시 감정의 파고를 거세게 했다. 공연 후 타임라인의 한받과 기획자 모라는 최소연 대표에 대해 미안함을 표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관객으로 그녀를 이 자리에 불러 세웠다는 죄송함과 애격(哀激)에 대한 회의감이 나를 먹었다. 견딤에 대한 경계나 빗금을 상상한다면 공연을 만든 자들과 관객이 이 금을 밟았다. 감정을 일깨우는 직접적인 일격이 누군가의 상처를 담보하고 있다는 생각이 미치자 또 다른 의미의 부끄럼이 작동한다.

 

 

나의 부끄럼, 찔림, 떳떳하지 못함으로 짜인 연극은 색색의 깃털 달린 낚시 바늘처럼 다가와 벤야민을 잡아 끄집어낸다. 『일방통행로 Einbahnstraße』(1928)에서 벤야민은 적나라한 빈궁에 대해 놀람이나 동정이 아니라 수치심을 말했다. ‘무수한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짊어진 궁핍은 모욕적인 것이고 용인해서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벤야민의 지적처럼 나는 ‘논쟁거리로서 그럴싸한 온갖 원인과 결과를 들어 분석하는 데 그치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삶을 예속하고 있는 저 어두운 힘들을 그 안에서 인식하지 못해 아무런 희망이 없는’ 자였다. 수치심에 대한 기만적인 회피는 내 자신에게 상흔으로 새겨졌다. 새살이 나리라 믿었지만 덮여진 상처는 곪았고 마치 무지근한 쇠스랑처럼 돌아와 연극 앞에서 더한 고통이 되었다.

간증으로 둔갑한 도시 빈민으로서의 선언, 비참함을 통해 밝히는 야만적인 세상에 대한 고발이 연극의 중심부를 뚫고 지나간다. 무대에 선 자들은 내가 빠져나가려했던 충격과 공포에 벗어날 가능성이 없음을 언명했다. 새까만 무거움 안에서 시도한 이들의 외침은 내 안에서 단순한 쓴 맛이 아닌 감성의 회복을 위한 약이 되었다. 볼 낯이 없음이라는 개념이 백혈구로 자라날 때 저들의 생존의 동력이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도 자란다. 이들의 생애는 가늘고 미약해보이지만 강한 장력을 지녔다. 물론 한받과 그 친구들의 생존 전제는 나와 다르다. 한받과 같은 투쟁의 삶을 나는 몸에 이식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이식하기 어렵다. 그러나 생존의 용기와 힘이 세밀하게 밝혀질 때 적어도 하나의 구루마가 드러날 수 있다.

 

 

2.

<당신의 구루마>가 말하는 구루마는 기획자가 던진 무수한 물음들의 밑바닥이다. 한받이 2012년에 처음 구루부구루마를 끌고 거리로 향했을 때 그를 사로잡은 질문들이 여기 있다. - 그는 왜 구루마를 끌고 거리로 나왔을까? 구루마를 끄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구루부 구루마를 끌며 어떤 거리의 풍경들을 목도했을까? 어떤 감정들이 그 시간의 흐름을 같이 했을까? 거리는 그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리고 지금 그 거리 위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가? 거리 위에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 이 길 위를 걷고 있는 나의 걸음은 어딜 향한 것인가? 한받의 구루마. 구루부 구루마. 내게도 그와 같은 구루마가 있을까? 그 구루마는 나에게 어떤 모습으로 발현하고 있는가? 당신에게는? - 질문의 물음표들은 서로의 몸을 걸어 튼튼한 사슬로서 극을 세웠다.(*)

낱개의 사슬들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단어는 ‘거리’ 다. 성급하게 매듭을 짓자면 몇몇 장르가 뒷골목에서 나왔어도 음악과 거리를 직선으로 잇기 어렵다. 음악가가 환대와 인정(투쟁)이 일어나는 공간인 공연장을 뒤로 물려야 거리가 앞에 펼쳐진다. 비판적 거리두기를 하는 『메타유니버스』(2015)의 남웅은 몇몇 지점을 독해해낸다. IMF 이후 구조조정 및 대량 해고로 발언권을 잃은 ‘을’들은 최후의 공간을 점유해 자신을 말할 권리를 되찾으려 한다.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눈을 뗄 수 없는 불리한 자의 배수진에 거리가 속한다. 투쟁의 장에서 독립 예술가들은 낙인찍힌 타자들과 자신의 고통을 같이 읽어내고 공유하는 작업을 진행한다. 과거 사회운동의 장식적 존재로 기능했던 예술가들은 투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새로이 구축하는 실험가이자 빈곤과 혐혐오의 소리를 담는 확성기다. 이 진술에 한받은 적확한 예시다.

 

 

앞선 고백들이 보여준 대사들을 제치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언급은 한받이 스스로를 거리의 주인이라 칭한 것이다. 한받의 한 마디의 말이 그 동안 짜인 날실들을 뒤섞는 수직의 씨실로 베틀을 오간다. 순진무구한 도식으로 건물은 건물주의 소유, 그 밖의 거리는 자신의 것이라 말한 셈이다. 거리를 예술과 접합시킨 수다한 이론들, 예를 들어 고상한 미술론 수업 시간 교수님의 침방울 수만큼의 산보객(flâneur) 개념은 학생들을 질리게 한다. 진력난 테제에 거리에 온당한 예술가들이 거리의 주인됨을 까먹었다. 속살은 간데없고 껍데기만 남은 기억에 한받은 자신의 존재를 알맹이로 증거한다. 길 위에 놓여 있기에 그는 고유한 음악정신을 유지, 갱신하고, 낮은 길바닥 외로운 이들에게 따뜻함을 건넨다.(**) 앞 문장에 등장한 두 개의 동사가 바로 한받 당신의 구루마다.

최소연 사장은 테이크아웃드로잉이 맞은 재난을 그네의 구루마로 간주했다.(***) 삶과 예술을 영속하는 담력이 그의 구루마가 아닌지 반문해본다. 그는 비참함에 함몰되지 않고 참담함을 기지로 삼아 세계가 가하는 폭력을 유희하고 있다. 상심어린 놀이는 자신의 삶을 이루고자하는 마음을 남과 같이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넓혔을 때 이뤄진다. 이는 한받의 구루마가 지니는 색조와 완연한 색조다. 공연 후반부에 한받을 예수로 비유한 것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는 점이다. 십자가 대속으로 고통 받는 주를 닮았다는 식의 서술에 한받의 구루마 바퀴는 멈춘다. 내 죄가 한받에게 넘어가고 그의 값진 희생으로 내 부끄러움을 사함 받으면 나의 구루마도 구르지 못한다. 성경의 고린도전서 13장은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의 제일은 사랑임을 명시한다. 가장 중한 것을 하기 위해 사람들과 연대하고 동행하는 한받의 구루마에서 성화(聖化)를 발견한다.

<당신의 구루마>는 한받과 그의 친구들의 구루마에 관한 연극이다. 극은 우리에게 우리의 구루마를 물었다. 극으로 인해 나는 내 구루마를 발견했지만 적갈색 녹이 슨 바퀴를 보며 삶에 구루부(groove)없음을 통탄한다. 글 속에서나마 삐걱거리면서 구루마를 밀어본다. 구루마의 마찰음이 익숙하지 않아 섬뜩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아마 둔감이란 유리벽을 깰 수 있을 정도의 강렬한 소리일 것이다. 감각이 되살아나면 통증은 더 심해진다. 손바닥에 못 박힌 한 남자의 슬픔에 근접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또한 그들과 같이 구루마를 끌고 가기를, 사랑의 주를 닮아가기를 기도해본다.

 

*사진촬영_박수환

**야마가카 트윅스터(한받) 인디언밥 인터뷰 바로가기 >>> http://indienbob.tistory.com/947

***영화 <파티51> 인디언밥 기사 바로가기 >>> http://indienbob.tistory.com/892

 

-참고-

(*) 2016년 1월 25일 오전 2시 37분 모라가 페이스북에 작성한 글.

https://www.facebook.com/profile.php?id=100001078051522

(**) <당신의 구루마> 리플렛 글귀 중에서 발췌, 2016.

(***) 2016년 1월 25일 10시 38분 최소연이 페이스북에 작성한 글

https://www.facebook.com/soyeon.choi.5268?fref=ts

필자_H&M

소개_섬세하게 듣고, (답 없게) 많이 생각하고, 깊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공연명: #당신의구루마

일시: 2016년 1월 23일 토요일 오후 7시

장소: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

연출: 유병주(모라)

출연: 한받 Vad Hahn , 김연희 김연희 , 최소연 최소연 , 정용택 정용택

연주: 정동민 Dongmin Jung

음향: 우정인 Morceau JungIn Woo

조명: 노명준 노명준

사진: 박수환 박수환

디자인: 김은하 Kim Eun Ha

조연출: 김재상 김재상

자문: 배현진 배현진

후원: 서울시 서울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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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획의도

홍대 앞에서 아마츄어증폭기, 야마가타트윅스터로 활동하는 음악가 한받의 구루부 구루마가 이 공연의 모티브이다. 한받은 자립을 외치며 홍대 앞에서 10년째 활동중인 음악가이다. 2012년 한받은 구루부 구루마라 이름 짓고 동료 예술가들의 책과 음반을 실은 구루마를 끌고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구루부 구루마는 때로 음악가들의 즉석 거리 공연 무대로 사용되기도 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묵묵하고 꿋꿋하게 거리를 구르는 구루부 구루마를 보며, 왜음악가가 환대받는 공간인 공연장을 벗어나 거리로 나오는지, 온갖 투쟁 현장에서 연대의 공연을 멈추지 않는 그의 동력은 무엇인지 궁금해하다가 '나의 구루마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시작했다.

거리는 한받의 삶에서 큰 인생 테마이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학창시절부터 중년의 음악가가 되기까지 그는 거리에서 자랐고 거리에서 위로 받았다. 구루부구루마는 항상 새로운 도전과 실험정신을 지향하는 한받에게 음악가의 수명을 연장시켜준 새로운 돌파구이자 그의 음악정신을 잃지 않기 위한 몸부림 중 하나이다. 빠르게 변하는 도심 한가운데서 느리게 굴러가는 구루마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어떤 정신들을 떠올리게 한다. 한받의 구루부 구루마를 빌어 어쩌면 내게도, 당신에게도 있을 구루마와 그 바퀴를 굴리는 원동력은 무엇일지 찾고 싶다.

2. 공연구성

본 공연은 보통의 대중음악 공연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연극의 형식을 빌어 만든 음악공연이지만 뮤지컬은 아니다. 대본에 따라 실연하는 공연자는 있지만 그는 배우가 아니다. 대본에는 지문이 있고 공연자는 그것에 따라 실연하지만 그것은 연기가 아니다. 대본은 있지만 극작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대본은 희극이나 시나리오에 기초한 대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무대에 오르는 음악가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대본을 만든다. 음악가는 연출자의 도움으로 정제된 자신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연출자는 음악가의 삶과 그의 창작물을 관통하는 개념을 끌어내고 새로운 무대양식을 만들어 낼 한편의 다큐멘터리 음악극을 창작한다.

/1막

1장. 기생운동 구루부구루마

2장. 거리의 음악가

3장. 도시의 빈민

/2막

1장. 무너지는 거리

2장. 예수를 닮은 사람들

3장. 당신의 구루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