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팰름시스트palimpsest> 15분, 누군가의 삶을 만나는 시간

2016. 2. 15. 07:07Review

 

얼라이브아츠코모(alivearts como)의

<팰름시스트palimpsest>

15, 누군가의 삶을 만나는 시간

 

 글_전강희

 

 

익숙하지 않은 단어인 팰름시스트는 여러 번 사용한 양피지를 뜻한다. 식물로 만든 종이인 파피루스와 달리 동물가죽으로 만든 양피지는 값비싼 재료였기 때문에, 효용이 다하면 표면을 깎아 내고 다시 사용하였다. 이 과정이 여러 번 반복된 양피지가 바로 팰름시스트이다. 종종 고대의 팰름시스트에 적힌 내용을 복원하는 중에 예상치 못한 낯선 이야기가 흔적을 드러내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얼라이브아츠코모의 김지현과 홍은지는 팰름시스트를 작업의 제목으로 삼았다. 스스로를 순간 채집가혹은 시간 수집가라고 명명하는 이들과 제목이 썩 잘 어울린다. 공연은 인천아트플랫폼 스튜디오 E-21에서 있었다. 이 장소는 공연장으로 쓰이는 공간은 아니다. 어떤 예술가에게는 작업실이, 공연을 올리는 단체에게는 숙소로 쓰이기도 하는 장소이다. 그렇다면 이 공연에서 팰름시스트가 되는 것은 공간 자체가 아닐까라는 선입견이 생길수도 있겠다. 유의해야할 점은 얼라이브아츠코모의 작업에서 집중하고 있는 지점은 공간이 아닌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김지현과 홍은지의 공연은 전통적인 블랙박스 극장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작년에 보았던 </어나/>도 전시장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전시장을 두 군데로 구분하여 사용하였는데 한쪽은 일반적인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로, 다른 한쪽은 블랙박스를 닮은 전시 공간으로 꾸며졌다. 때문에 공연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설치미술로도 보였다. 배우 또한 등장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의 작업이 공연이었던 이유는 배우의 역할까지도 껴안게 되는 관객이 있기 때문이었다. 얼라이브아츠코모는 관람 관객을 매 회 단 한명으로 제한한다. 이들에게 공간은 한 명의 관객이 작품을 관람하는 동안,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집중할 수 있는 조건으로써 고려해보는 대상이다.

 

check-in을 하고 나면

<팰름시스트>1211일과 12일 이틀 동안, 오후 1시부터 6시까지 15분 간격으로 이루어졌다. 프런트 데스크에서 등록카드를 작성한 후, 공간 배정이 끝나고 나면, 소지품 하나를 맡기고 열쇠를 받는다. 해당 방으로 찾아가 15분간 혼자서 머무는 것이 공연의 전부다.

방안으로 들어서면 4개의 2층 침대가 있다. 한 침대를 제외하고 세 침대의 1층에는 몇 가지 오브제들이 놓여있다. 관객은 비어있는 침대에 앉거나, 눕거나, 또는 방안을 서성이며 오브제들을 관찰할 수 있다.

한 침대 위에는 어릴 적 동네 빵가게에서 팔았던 버터크림 케이크가 놓여있다. 침대 앞에 놓인 사이즈가 각기 다른 신발 다섯 켤레로 보아 한 가족이 모여 파티를 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맞은 편 침대에는 만화책이 잔뜩 놓여있는데, 중고등학교 때 보던 <아기와 나>도 보인다. 또 다른 침대에는 드레스가 옷걸이에 걸린 채로 있다. 놓여있는 신발 중에서 드레스 차림에 어울릴만한 예쁜 것이 눈에 들어온다. 유년기, 청소년기를 거쳐 이제 어른이 되었나? 드레스의 주인은 또 어디로 갔을까? 다른 누군가의 흔적을 따라가다 나의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 시간의 주인이 여성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여성인 필자 자신에게로 감정을 이입하여 과거의 기억들이 불려온다. 어린 시절 가족과 먹던 케이크 앞에서는 울컥하는 순간도 있다. 이렇게 과거의 시간을 순서대로 배치하고 있는 와중에 어그러지는 것들이 조금씩 생겨난다.

선적인 시간 구성을 방해하는 첫 번째 요소는 소리이다. 방안에 있는 스피커에서 과거의 한 순간으로 추측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소리 역시 기억 속에 있던 익숙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할머니가 말하는 방식, 어린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등 누구에게나 기억 속에 있을 법한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소리들이다. 그런데 내용을 자세히 듣고자 귀를 기울이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목소리의 고저를 제외하고는 감지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 목소리의 주인공들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상황인지도 알아챌 수 없다.

소리를 자세히 알아듣기 위해 벽면에 투사된 영상에 맺힌 이미지와 겹쳐서 생각해 본다. 축구를 하는 것 같은 영상으로, 처음에는 한 아이가 등장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여러 명의 모습이 보인다. 이 또한 정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이미지는 아니다. 마치 흐릿한 그림자처럼 보이는 영상이다. 아이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이 영상으로 해독해내려 했지만 두개의 시간이 한 접점으로 만나기란 쉽지 않다. 두 개의 이야기는 서로 빗나가고 있다. 매체 각각이 다른 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치되는 것이 찾아지지 않자 익숙하던 매체마저도 어느 순간 낯설어진다. 갑자기 방안에 놓인 신발들이 침대 위의 오브제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질서정연하다 여겼던 이미지가 서로 교차하고 중첩되면서 결국에는 단절된 이미지로 공간에 쌓인다.

과거의 시간들을 재구성하고자 했던 나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간다. 오브제, 소리, 영상에서 어떤 의미를 파악해내기에는 이들이 본래 가지고 있던 기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로지 물질로서 공간 안에 존재한다. 이제 이미지들을 해독하기 위해서 다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질서정연한 이미지들 사이를 흐르던 선형적인 시간은 단절된 이미지들 사이에서 방향을 잃고 비선형적인 시간으로 흐른다. 관객인 나는 이제 나의 입장을 정해야한다. 이 시간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시작, 중간, 끝이 없는 이 사건을 종결지을 결정적인 역할은 관객인 나에게 있다.

 

 

관객, 더 멀리 보는 사람

독일어로 관객(zuschauer)(zu)’보다(schauer)’가 합해져 만들어진 말이다. 관찰자, 목격자, 참여자 등 여러 가지 관객의 역할을 모두 고려해 보았을 때, 성질의 근간을 이루는 것이 보는 사람이라는 데에 반론을 제기할 누군가는 없을 것이다. 김지현과 홍은지가 몇 가지 장면들을 유기적인 관계없이 나열해 놓고서 관객이 보기를 바란 것은 무엇이었을까? <팰름시스트>에서 병렬구조로 나열되어있는 장면을 인지하기 위해서 관객은 보는 방식을 익숙하지 않은 지각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인터넷 서핑에 익숙한 현대인들이 속도를 늦추고 무언가를 깊게 들여다볼 의지를 다지고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다. <팰름시스트>는 관객이 자세히 바라볼 수밖에 없도록 연출되어 있다.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는 것에 더 가깝다. 본인의 속도와 이해정도에 맞추어 속도를 조절할 수도 있고, 다시 뒤로 돌아가 페이지를 열어 볼 수 있듯이 공연의 구조가 짜여 있다. 느린 템포로만 가능한 관극이다. 김지현과 홍은지가 의도한 보기체험하기’, 혹은 경험하기라고 여기는 것이 적절하다. 느리게 체험하는 것, 자신만의 속도로 15분을 경험해 내는 것이 보기의 다른 말일 것이다.

적극적인 보기가 요구되는 공연은 관객에게 새로운 역할을 부여한다. 창작자의 역할이다. ‘적극적으로 경험하기를 빠져나갈 수 없도록 만들어진 공연에서 관객은 단순히 참여자의 역할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관객은 병렬로 배치되어 있는 것들 중 자신을 가장 두드리는 감각에 반응한다. 이때부터 공연은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충돌하는 기표들 속에서 의미를 해석해 내고, 감각의 영역을 확장시키는 역할은 관객이 수행한다. 해당 공간을 상징적인 공간이 아니라 수행적인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관객에게 달려있다. 연출가는 예견할 수 없는 것으로 제안자의 역할에 만족해야한다.

15분 동안 만나는 삶의 주체는 누구일까? 결국 타인의 삶을 바라봄으로써 완성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서사가 아닐까. 공연 밖에 있는 나의 삶이 공연과 만나는 순간이 발생한다. 팰름시스트에서, 예술가가 배치해 놓은 기호들 사이에서, 흔적을 드러내는 것은 삶에 대한 자신의 태도이다. 공연은 이렇게 허구를 넘어 실제 사건으로 관객에게 다가간다.

 

얼라이브아츠코모는 check-out을 하는 관객들에게 공연에서 무엇을 보았는지에 대해서 메모를 요청했다. 관객들은 15분 동안 자신들이 창작해 낸 결과물을 기억을 더듬어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짧은 순간 경험한 감각의 세계가 그들의 몸속에 기입되었기를 고대해 본다. 연극학자 마리 마들렌은 관객은 보고 있는 자가 아니라 시간이 흐른 후 기억의 지층을 통해서 보게 되는 자라고 언급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관객은 공연 바로 그 순간이 아닌, 공연 전이나 그 이후에 무언가를 행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몸속에 기입된 감각의 기억이 삶에 작은 파동을 만들어 내는 것을 상상하며 이글을 마친다.

 

필자_전강희

소개_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 사진제공: 얼라이브아츠코모
** 이 글은 인천아트플랫폼 레지던시 이론가 매칭 프로그램의 지원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얼라이브아츠 코모 <팰름시스트 palimpsest>

일시 : 2015.12.11~2015.12.12 / 1:00-6:00pm

장소 : 인천아트플랫폼 스튜디오 E-21

 

얼라이브아츠코모 alivearts como

collectors of moment를 줄인말로,

순간 채집가들 혹은 시간 수집가들을 의미합니다. 공연예술, 미디어, 사운드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예술가들이 협업작업을 통해 공간, 관객과 능동적으로 소통하고 반응하기 위해 예술창작 실험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휩쓸려 지나가는 것들을 뒤지고 그 속에 숨은 순간들을 찾기 위해 공간을 발견하거나 기억을 불러오기도 하고, 때로는 기억을 재생시키기 위해 공간을 탐색하기도 합니다.

<벙어리시인> (2009-2011), <TAKE OFF /어나/> (2014)

 

김지현

비디오, 사진, 인터랙티브 미디어 아트 등 단일 매체에 국한되지 않는 작업들을 시도하고 있다.

6년간의 파리에서의 생활이 작가의 개인 작업에 있어서 출발점이 되었고, 서울로 거점을 옮긴 이후 주변을 관찰하고 수집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개인 작업과 더불어 2010년부터 그룹<얼라이브아츠 코모>를 통해 모인 타분야 아티스트들과 함께 인터랙티브 퍼포먼스<벙어리 시인>을 공연하였고, 2012년 미디어&사운드 그룹의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밴드<로로스>, <니나이언>등의 뮤지션 공연에서 미디어 작업을 함께했다.

 

홍은지

공연연출. 공연그룹 은빛창고를 통해 삶의 이면에 현미경을 들이대고 질서와 순응에 대한 질문과 균열을 주제로 작업을 해왔다. <사막을 걸어가다>, <세자매- 크로스아시아버전>, <내입장이 되어봐>, <까페더 로스트>, <야만적 낭만>,  <벙어리시인> 등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