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6 산울림 고전극장 - ‘달나라 동백꽃’ <오레스테이아>

2016. 3. 11. 09:56Review

 

2016 산울림 고전극장

원죄와 구원: <오레스테이아>와 <연옥>

‘달나라 동백꽃’ <오레스테이아>

 

글 김신록

 

들어가며, <연옥>을 경유하여

<죽음과 소녀>로 유명한 아리엘 도르프만의 희곡 <연옥>에는 한 쌍의 남녀가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정신병원 혹은 감옥의 면회실을 연상케 하는, 그러나 정확한 시간과 장소가 불분명한 곳에서 일대일로 만나, 역시 실체가 정확하지 않는 사건에 대해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서로를 심문합니다.

제목처럼, 아마도 이곳은 사후 세계인 듯 하고, 두 남녀는 구원의 가능성을 눈앞에 두고 살아생전의 모든 죄과를 낱낱이, 마치 ‘독수리에게 뼈까지 쪼아 먹히듯’, 실토해야 합니다. 극이 진행되면서, 뜻밖에도, 이 두 사람이 고대 그리스 비극의 두 주인공 메데이아와 이아손이거나, 혹은 그 둘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결코 용서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죄를 지은 철천지원수 관계임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곳은 ‘연옥’이고 서로가 서로를 용서해야만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딜레마!

작가는 ‘구원의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이 작품을 썼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하늘 아래 네이팜탄을 쏟아 붓고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에 자살테러를 감행하는 이 시대에, IS와 서방국가가 종교전쟁을 빙자한 정치전쟁을 선포하고, 포탄에 토막 난 피 흘리는 시체들이 산과 들과 페이스북에 넘쳐나는 이 시대에, 과연 구원이란 무엇일까. 가해자와 피해자와 고발자가 너무나 손쉽게 뒤얽히는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감히 분노와 비난과 폭력의 순환을 깨고 넘어설 수 있을 것인가, 과연 용서나 화해라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고 작가는 말합니다.

 

 

현대화된 비극이 던지는 질문, “너에게는 복수, 나에게는 정의”

뜻밖에도 저는, ‘산울림고전극장’ 시리즈 중 한 편인 ‘달나라 동백꽃’ 윤혜숙 연출의 <오레스테이아>를 보고, ‘구원’의 대척점에 있는 ‘원죄’라는 개념에 가 닿았습니다. 사전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이미 가지고 있는 죄, 성서적으로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구분하는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전 인류에게 이어져 내려온다는 죄, 원죄.

세 명의 여배우가 광대놀이 하듯 10여개의 역할을 바꿔가며 그리스비극 3부작을 80여분 정도에 훑는 미니멀한 공연이라는 사전 정보 때문이었는지, 되는대로 만든 왕관과 막대기를 들고 왕비공주놀이 하듯 찍어놓은 포스터 사진 때문이었는지, 철학적인 사유나 비극적 공감에 대한 별 기대 없이 무방비 상태로 객석에 앉아있던 제 머릿속에 ‘원죄!’라는 단어가 떠올랐을 때는 적잖이 놀랐습니다.

 

 

<오레스테이아>는 ‘오레스테스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아가멤논 집안의 피의 복수와 저주에 대한 막장 줄거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왕인 아가멤논이 전쟁을 위해 딸을 제물로 바치자, 이에 대한 복수로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가 왕과 왕의 여자를 죽이고, 또 이에 대한 복수로 아들 오레스테스가 왕비, 즉, 엄마와 엄마의 남자를 죽이고, 이 아들은 친족살해 죄로 ‘자비로운 여신들’에게 쫓기다가 아폴론에 의해 구제 받는 것이 이 막장 드라마의 주된 플롯입니다.

윤혜숙 연출은 자비의 여신들이 나오는 마지막 이야기 대신 이 모든 복수극이 시작되는 딸 이피게네이아의 이야기를 넣었습니다. 그리고 전체 이야기의 순서를 뒤집어,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인 이피게네이아의 죽음을 가장 마지막에 배치함으로써 ‘어쩌다가, 왜, 이런 엄청난 일들이 애초에 벌어지게 되었는지’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이 연극의 거의 마지막 장면에 왕과 왕비와 딸이 나란히 서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왜 딸을 전쟁의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는지/ 왜 딸을 전쟁의 제물로 바쳐서는 안 되는지/ 왜 아버지가 나를 죽여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 정말이지 전 존재를 걸고 온몸으로 역설합니다. 그리스 비극의 고통이 집약되어 있는 격정의 순간. 파토스!

그 순간, 세 사람은 정말이지, 모두, 옳았습니다. 누구하나 개인의 사리사욕이나 사사로운 감정, 허영심, 이기심으로 부당한 주장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모두 물러서지 않고 ‘자신의 우주가 온 몸을 찢어가며 부르짖는 정의’를 결국 실행합니다. 왕은 딸을 전쟁의 제물로 바치고, 왕비는 왕의 목숨으로 딸의 목숨 값을 갚고, 딸은 입에 물린 재갈 너머로 자신의 부당한 죽음을 ‘기억하라’고 당부합니다. 피가 피로, 피가 피로, 피가 피로.

 

 

그런데 제게 이 연쇄과정은, ‘받은 것이 억울해서 기필코 되갚는 복수’라기 보다는, 한 사람으로서, 한 개인으로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불의에 대한 응징’처럼 읽혔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끝나지 않는 복수’가 아니라 물러설 수 없는 ‘정의에 대한 처절한 수호’였습니다. 자신이 믿는 정의를 위해 전 존재를 걸고 투쟁하다니 그들 모두 얼마나 고귀합니까!

인간. 다른 자연과는 다르게 유일하게 ‘자아’를 가진 존재. ‘나’라는 작은 우주 안에 물러설 수 없는 옳고 그름을 가질 수밖에 없는 존재. 자신의 기준에서 선과 악을 구분하여 분노하고, 악한 것을 응징하고 선한 것을 수호하고 싶어 하는 의로운 존재.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 물러설 수 없는 의로움 간의 충돌로 삶의 비극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원죄를 가진 존재.

 

 

풀리지 않는 답을 향해가는 예술의 여정 “원죄와 구원의 (불)가능성”

아리엘 도르프만의 <연옥>의 두 등장인물은 자신의 전 인생의 매 순간을 통째로 고백하고 성찰하는 일, 그 중에서도 특히 죄를 저질렀던 부분에 대해서 낱낱이 고백하고 인정하고 뉘우치는 일을 하도록 서로를 강요하고 서로에게 강요받는 중입니다.

참회하느니 차라리 구원의 명단에서 자신을 지워달라는 여자를 결코 포기 하지 않는 남자에게, “너는 왜 포기하지 않지? (중략)왜 자꾸 돌아오는 거지?”라고 여자가 묻습니다. 남자가 말합니다.

“너. 너 때문에 돌아오는 거야. 네 아들이 지켜볼 때 그 눈에 담겼던 표정 때문에. 우리는 함께 그걸 지워버릴 수 있어. 잊을 수 있어. 함께. 그걸 다시는 기억할 필요가 없어. 모조리 다시 시작해. 너와 나 말이야. 평화의 물결. 용서의 따뜻한 물결. 너 자신을 버릴 때의 따뜻한 물결 말이야” 여자가 답합니다. “영원의 시간이 걸릴 거야.” 남자가 답합니다. “나는 갈 곳이 없어.”

‘너 자신을 버릴 때’라니 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불가능한 일입니까. 전 인류가 자아를 버리고 해탈하지 않으면 이 사회의 비극의 수레바퀴는 결코 멈추지 않는 것일까요? 자신의 딸을 성폭행하고 살해한 마피아 일원을 수십 년 동안 추적해 결국 살해한 여성에게, 바다에 가족을 묻고 2년 토록 시신도 찾지 못한 가족들에게 원죄와 구원이라는 말이, 아르엘 도르프만의 희곡이, 그리스 비극이, 연극이, 이런 글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소용이 있을까요?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영원의 시간이 걸릴지라도.

 

 

*사진제공_극단 달나라동백꽃

*극단 달나라 동백꽃 SNS페이지 >>> https://www.facebook.com/moontheater00   

 필자_김신록

  소개_연극하는 김신록입니다. 오늘부터 잘 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