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극단 신세계 <멋진 신세계> 멋진 것이 1도 없다

2016. 5. 9. 09:13Review

 

멋진 것이 1도 없다

혜화동1번지 6기동인 봄페스티벌

극단 신세계 <멋진 신세계>

 

글_황지윤

 

연극실험실 혜화동 1번지 6기 동인 봄 페스티벌의 막이 올랐다. 4월부터 6월 말까지 ‘심시티-도시 삶의 비용’이라는 테마로 6편의 공연이 무대에 오른다.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을 각색한 극단 신세계의 <멋진 신세계>(4/21~5/1)는 봄 페스티벌의 두 번째 공연으로 관객을 찾았다.

 

 

우스워진 신세계

사각형 무대의 두 면이 관객석으로 채워진다. 객석에 앉자 비어있는 정중앙의 공간으로 자연스레 시선이 향한다. 암전이 끝나고 빛이 들어오자 공터처럼 덩그러니 놓여있던 공간이 무대화된다. 무대 공간은 공연 내내 눈에 띄는 장치나 도구 없이 비교적 단출하게 유지된다. 공연은 도입부에 ‘문명국’이라는 낯선 곳을 소개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다. 생소한 세계에 적응할 틈을 충분히 주는 셈이다. 관객들은 무대 위의 배우들과 함께 1구역 기반 시설을 하나하나 시찰할 기회를 얻는다.

문명국은 ‘포디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상상적 미래 공간이다. 문명국의 인간은 자궁이 아닌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며 이들은 A, B, F 계급으로 나뉜다. A 계급이 가장 우월한 계급, B 계급은 중간 계급, F 계급은 가장 열등한 계급이다. 그러나 F 계급이 열등하다고 해서 이들이 불필요한 존재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F 계급이 아무리 하찮아 보일지라도, 이들은 부여된 일을 성실히 수행하는 문명국 사회의 엄연한 일꾼이다. 문명국의 구성원들은 계급의 우월성과 무관하게, 각 계급이 사회에 맡은 바의 역할을 다하는 필수적인 존재라는 점을 주지하고 있다. 이들은 불평등한 계급 체계의 효율을 무한히 긍정한다.

관객이 문명국이라는 공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때 즈음 기관 시찰은 끝이 난다. 공연은 이제 문명국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생활양식을 낱낱이 보여주기 시작한다. 문명국 인들은 극장에서 쾌락영화를 시청하며 집단 오르가즘을 느끼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이들은 모노가미를 경멸하고 내킬 때마다 섹스 파트너를 바꾼다. 한 명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불필요한 유착관계를 일으킬 위험이 있기에 금기시된다.

 

 

“헨리, 우리 성교할래요?” 1구역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B 계급 레니나가 난데없이 A 계급 헨리에게 던지는 대사이다. 이들에게 성교는 쾌락을 증진하는 ‘활동’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성교할래요?”라는 말의 무게감은 우리 식으로 치자면 “커피 마실래?” 정도의 뉘앙스랄까. 커피를 마시는데도 대상에 대한 호오(好惡)는 필요한 법이니까. 이들은 심지어 머나먼 옛날 존재했다는 ‘가족’이라는 개념에 질겁하며 연거푸 구역질한다. ‘어머니’, ‘아버지’라는 단어를 언급하자 토악질을 하는 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메운다. 혈연이라는 징글맞은 애증 관계에 노골적으로 구토를 해버리는 배우들의 과장된 연기가 묘한 통렬함을 주기도 한다.

나는 마치 한 명은 인류학자가 된 기분으로 이국의 낯선 풍습을 주시한다. 공연 전반에 걸쳐 문명국 인들의 생활양식은 과장된 방식으로, 아주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속 문명국 사람들이 딱딱하지만 세련되고 미끈한 느낌이었다면 극단 신세계가 재창조한 ‘멋진 신세계’ 속 사람들은 욕망에 충실하고, 땀에 번들거리는 신체를 지닌 시끄럽고 우스운 이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감정’이 없다는 사실을 쉼 없이 강조하지만, 무대에 난무하는 괴성이 그리 ‘감정 없음’의 상태로 느껴지지 않는다. 공연은 과장을 거듭하고, 이는 멋진 신세계를 살아가는 이들의 위선을 부각하는 효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아주 우스워진다.

 

 

주변의 야만인

레니나와 버나드가 ‘야만인 보호구역’을 방문하며 공연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야만인 보호구역은 멋진 신세계와 대비되는 공간으로 문명국이 일궈낸 진보를 수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정주하는 공간이다. 야만인들은 문명국에서는 사라진 지 오래인 일부일처제 가족 시스템을 유지하는 등 ‘미개한’ 구습을 따르며 야만국은 질병과 노화, 장애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된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다. 이들은 우울감이나 공허, 고독감을 단번에 해소해주는 ‘소마’라는 묘약을 갖고 있지 않다. 야만인들은 이러한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감내하는 수밖에 없다.

야만인 보호구역을 유지하는 시스템은 문명국의 것만큼 낯설지 않고 상당히 익숙하다. 야만국이 호출하는 시공간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레니나와 버나드가 그곳에서 만나는 야만인 존은 우리의 또 다른 초상이다. 존은 셰익스피어 극 속의 대사를 자주 인용한다. “인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인가! 오, 멋진 신세계여….” 극단 신세계의 각색 속에서 야만인 존은 연극배우로 재탄생한다. 그는 셰익스피어에 깊이 매료된, 연극을 하는 청년이다.

야만국에서 외톨이로 지내던 존은 문명국으로 함께 가자는 버나드의 제안에 응한다. 야만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소외된, 주변인의 삶을 살아온 그는 ‘탈조선’ - 앗, 실수 - ‘탈야만’에 주저함이 없다. 문명국 도착 후 일약 스타로 떠오른 그는 한동안 문명국의 가치에 매혹된다. 하지만 이내 자신이 문명국의 문화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깨닫는다. 존은 ‘소마’라는 환각제를 복용하며 희로애락의 과잉을 통제하는 신세계적 행동 양식을 당최 이해하지 못한다. 집단 난교, 포르노 시청 등 쾌락 증진을 위한 활동이 주는 효용에 공감하지 못하며 이를 더럽고 저속한 동물적 행위로 치부한다.

 

 

멋진 신세계와 불화하는 야만인의 갈등은 레니나와의 관계에서 최고조로 치닫는다. 존에게 매혹된 레니나는 그에게 성교를 하자고 조른다. 그 역시 레니나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레니나에게 오히려 강한 분노를 느끼며 그녀를 애증하기 시작한다. 레니나는 존을 향한 갈망이 단순한 성적 욕망 이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사랑이라는 낯선 감정을 최초로 경험하는 레니나는 소마로도 감정 통제가 되지 않는 지경에 이르자 괴로움에 휩싸인다.

공연 초반, 통통 튀어 오르듯 유쾌하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뽐내던 배우가 무대 한가운데 주저앉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의 비탄에 휩싸여 절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참다못한 레니나가 결국 존에게 달려든다. 레니나는 옷을 한 꺼풀씩 벗는다. 그녀는 무대 위에 완벽한 나체로 선다. 욕망과 사랑으로 뒤엉킨 알몸의 레니나에게 돌아온 것은 폭력이다. 존은 레니나를 후려치고 바닥으로 내팽개친다. “화냥년” 그는 레니나를 이렇게 불렀다. 폭력의 강도가 심상치 않다. 나체 상태의 여성에게 밀도 높은 폭력이 가해지는 것을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기 힘들다.

 

 

야만인의 정동(情動)

“그만해” 존이 자신에게 말한다. 공연 말미, 그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가 된다. 그는 뺨을 때리는 자해를 하며 스스로에게 그만두라고 성토하기 시작한다. 야만국에서 차별과 소외로 고통받던 이가 희망을 품고 이주한 문명국에서도 주류가 되지 못하자 수치심과 모멸감에 휩싸인다. 자신의 사유와 행동이 뒤틀렸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인지하지만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성찰할 여력(혹은 능력)이 그에게는 없다. 그는 다만 “적당한 집에서, 엄마와 아내와 적당히 잘 살고 싶었다”고 말한다. 평범한 소시민적 욕망이 충족되지 않았을 때의 패배감, 모멸감, 수치심이 뒤엉켜 배설된다. 그의 지저분한 배설물은 ‘여성 혐오’로 그 양태를 달리하여 모습을 드러낸다.

존은 셰익스피어 비극의 유려한 대사를 격앙된 어투로 종종 인용한다. 그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예찬하고 인간으로서의 고결함을 강조하기 위해 셰익스피어를 끌어온다. 이는 존이 마치 멋진 신세계로 불리는 문명국의 위선과 비인간성을 폭로하기 위해 투입된 인물이라는 착각을 준다. 하지만 시기심에 눈이 멀어 데스데모나를 죽인 오셀로의 대사를 읊으며 레니나를 바닥에 내리치는 존을 어느 누가 ‘고결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극단 신세계의 공연 속 존은 입체적 인물이다. 그는 멋진 신세계의 디스토피아적 면모를 폭로한다. 동시에 발전과 진보를 거부하는 반동의 정서가 향하는 기이한 종착점을 몸으로 구현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가 당면한 사회적 현상을 환기한다. 그는 감정 과잉의 반동이자 여성 혐오자이며, 방향성 없는 원한이 짙게 드리운 아웃사이더이다. 그의 낙오와 패배에 사회와 구조의 책임이 있지만, 분노와 혐오로 가득한 개인에게 동조하고 연민하기란 쉽지 않다. 그래서 공연 마지막에 제기된 물음 - 문명국에 살고 싶나, 야만국에 살고 싶나 – 에 답하기란 더더욱 어려워진다. 선택은 유보되고 결말은 나지 않은 채 공연은 막을 내린다.

<멋진 신세계>라는 공연의 제목이 무색하게 멋진 것은 하나도 없다. 120분에 이르는 공연은 욕망과 감정으로 질척이고 문명도 야만도, 어디 하나 마음에 드는 공간이 없다. 과학주의로 점철된 진보의 서사도, 반동주의자의 셰익스피어 탐닉도 모두 아니꼽게 느껴진다. 무대 위의 세계는 투박하고 추해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느낄 겨를도 없다. 하지만 투박함과 추함이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는 공연이다. 열린 결말도 닫힌 결말도 아닌, 선택 유보의 결말이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나로서도 딱히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체라도 되지 않고서는 비극을 폭발시킬 수 없는 존의 불우한 몸이 생각난다. 강마르지만 단단한 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노를 기억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그럼에도 그를, 도저히 연민할 수는 없다.

 

*사진제공_극단 신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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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_황지윤

  소개_연극을 보러 다니는 철학도입니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것들에 무한한 애정을 품고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