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국가라는 무대와 하나의 장치로서의 검열 - <괴벨스 극장>

2016. 10. 12. 09:43Review

 

국가라는 무대와 하나의 장치로서의 검열

 <괴벨스 극장>

극단 파수꾼 / 오세혁 작, 이은준 연출

 

 

글_성지은

 

 

       분서갱유. 기원전 213년경 진나라의 시황제는 사상 통제를 위해 유학서적을 중심으로 많은 책을 불태우고 유생들을 죽였다. 스페인 종교재판의 검열. 기원후 1551년 가톨릭 교회는 점점 커지는 개신교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모든 책들에 대한 종교 검열을 시행했다. 그리고 베를린 분서. 1933년 독일 나치 정권의 괴벨스 역시 사상 통제를 위해 그가 ‘비독일적’이라고 생각하는 책들을 불태웠다.

 

검열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지난 2015년 예술계를 흔들었던 박근혜 정권의 검열 역시 그다지 놀라울 것은 아니었다. 현 정권의 보수성과 특이성을 생각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한 바이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검열의 수위는 강했다. 특히 상대적으로 직설적이고 가시적인 주제를 다루는 연극계에서는 그 타격을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 어떤 공연들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룬다는 이유로 공연 중에 취소되기도 했으니 말이다. 실제적인 검열과 탄압 앞에 연극인들은 무엇인가를 하고자 했고, 그렇게 모인 20개의 극단은 <권리장전 2015_검열각하>라는 5개월 간의 긴 축제를 무대에 올렸다.

 

 

 

 

 

극단 파수꾼의 <괴벨스 극장>은 그 중 하나로, 9월 연우소극장과 10월 아름다운극장에서 공연되었다. 재미와 풍자, 감동이 가득한 탄탄한 극을 써 온 오세혁이 극본을, 극단 파수꾼의 중심인 이은준이 연출을 맡았다. 공연의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이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의 일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골수염에 걸려 평생 한 쪽 다리를 절었지만 대신 그 열등감을 학교 성적으로 풀어낸 괴벨스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나라에 대한 헌신과 충성심을 키워 온 그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자진해서 군에 복무하고자 하였으나,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전쟁에 참여하지 못 했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의 열렬한 팬이 되고, 결국 히틀러의 마음을 사 그와 함께 일하게 된다. 그는 널리 알려진 대로 나치당의 선전장관이 되어 효과적인 선동, 선전을 만들어냈다. 2차 대전이 끝날 때 그는 히틀러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되었으나, 이튿날 부인, 자녀들과 함께 자살한다.

 

 

 

장애를 가진 몸으로 사람들의 무시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정권의 2인자 자리까지 올라간 괴벨스. 그는 아주 열정적이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양극단을 넘나들 수 있는 인물이다. <괴벨스 극장>은 그런 그의 힘과 극단성, 굴곡진 인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이 연극은 한 사람의 전기를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괴벨스의 마지막 날, 그가 군인에게 자기가 총을 쏘면 자기 시체와 집까지 불태워달라고 말하며 절규하는 부분은 다소 숙연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이렇게 질척이는 그의 인생이 검열과 무슨 상관일까? 극은 상처 입은 한 영혼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비뚤어진 욕망을 통해 세상을 통제하는 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검열이다.

 

극에서 검열의 메카니즘은 괴벨스의 입을 통해 드러난다. 그가 지키고 퍼뜨리고자 했던 신념이 옳은지 그른지를 떠나서, 그것을 효과적으로 알리는 방법은 바로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여러 번 말하면 말할수록 진실로 화하기 때문이다. 거짓이 진실이 되는 곳. 그곳은 바로 극장에 다름없고, 그래서 그는 자신의 무대인 국가를 하나의 극장으로 생각한다. “나치당을 배경으로 최고의 연극으로 만들겠습니다.” 이곳에서 히틀러는 주연배우가 되고, 괴벨스 자신은 조연배우가 되어 주연의 꿈을 무대 위에 펼치도록 도와준다. 이 극이 더욱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관객, 즉 일반 대중을 속여야 한다. 배우들의 말이 사실이라고 믿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는 대중을 나치 정권의 연극을 완성시켜 줄 동조자, 또는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괴벨스는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대중들을 협력자로 만드는 것이 선전의 기술입니다.”

 

사실 괴벨스가 이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어릴 적 보수적이고 국수주의적인 교사로부터의 가르침과 같은 반 아이들과의 갈등, 청년 시절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과의 모순적인 대립을 거치면서 그는 ‘진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굳혀 나간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빠르게 자신의 이상을 대중에게 집어넣느냐다. 그리고 대중은 단순하다. 그저 내가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기만 해도, 내 생각이 마치 대중의 생각인 양 교묘하게 바꾸어서 너의 생각이 맞다고 맞장구쳐주기만 해도 된다.

 

 

 

 

 

 

결국 검열이란 하나의 장치이다. 세상을 하나의 무대라고 본다면, 검열은 관객들에게 어떤 것은 보여주고 어떤 것은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가벽이나 소품과도 같다. 괴벨스는 독일인, 나아가 세계에게 ‘비독일적인 것’, 말하자면 유대인, 동성애자, 장애인, 거지, 집시의 좋은 점들을 가리고 나쁜 점만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그가 택한 장치는 바로 ‘분서’, 즉 책을 불태우는 것이었다.

 

유명한 베를린 분서를 보여주는 장면은 <괴벨스 극장>의 클라이막스에 해당한다. 괴벨스는 비독일적인 책들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불태운다. 그렇다고 작가들의 작품 활동을 막는 것은 아니다. 마음대로 쓰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책이 나와도 그가 불태우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항의하는 작가들에게는 교묘한 말장난으로, 형편없는 정부 밑에서는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하는 실력없는 자들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어떤 책이 불살라 없어진다면 그것은 정부의 탄압이 아닌 작품의 낮은 질에 대한 증명일 뿐이다. 분서를 통해 비독일적인 것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극적인 장면에서 괴벨스는 마치 예언인 양 이야기한다.

 

“그게 바로 너희의 문제야, 너희는 두 종류의 적과 싸워야 돼. 하나는 너희에 대한 탄압. 또 하나는 너희의 게으름. 둘 중 하나한테만 져도 너희는 멸망할거야.”

 

이처럼 <괴벨스 극장>은 베를린 분서의 원인과 과정을 괴벨스 자신의 삶과 심리를 통해 보여준다. ‘나치’라는 절대악이 행하는 악행은 2016년 한국과는 상관없는 남의 나라 이야기로 들리지만, 사실 괴벨스의 대사 중 많은 부분은 현재 한국의 상황을 바로 가리킨다. 2015년과 2016년 두 해 동안 검열과 관련해서 쏟아진 많은 유행어와 소문, 사실들이 나치의 검열과 섞여 있다. 괴벨스는 공산당과 좌파를 처단하고 박근형과 윤한솔의 작품을 불사른다.

 

 

 

 

 

하지만 극을 통해서 보이는 이 모든 검열의 뿌리에는 낙인이 있다. 괴벨스의 이상하게 생긴 몸은 신이 내린 벌이라는 낙인. “그것이 나를 평생 괴롭혔고, 결국 낙인이 나를 만들었지. 그 낙인이라는 콤플렉스가 나를 깨우쳤어.” 이 평생의 트라우마는 괴벨스의 사상 검열을 다소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동시에 한국 상황과 관련해서 검열을 하는 자, 검열에 찬성하는 자들의 심리적 메카니즘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한다. 그들에게도 이런 트라우마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것은 현실과 비슷한 역사 속 이야기를 극의 형태로 보여줌으로써 연극이 갖는 일종의 역사화 기능일 것이다. 우리가 2016년을 이야기하기 위해 1933년에 기대듯이, 미래의 누군가는 또 2016년에 기대게 될까? 그 때에도 검열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괴벨스 극장>의 부제, ‘어쩌면 브레히트가 될 수 있었던 사람’에 주목해보자. 극 중 괴벨스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생각은 똑같았죠. 호소력 짙고 흥미롭게, 대중이 귀 기울이는 연극을 만들자.” 하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무대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공감하지 못하도록 했고, 괴벨스는 관객의 공감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서로 상반된 두 개의 장치, 즉 소격효과와 검열이 모두 ‘대중의 관심’을 원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소격효과로 나온 이해할 수도 없는 이상한 작품을 애써 이해하려 하는 것처럼, 검열에서 나온 너무나도 그럴듯하고 진실된 것 같은 작품은 애써 의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괴벨스 극장>이 보여주듯, 대중의 관심과 동의 뒤에는 검열이라는 장치가 숨어 있고, 그것은 비뚤어진 욕망의 반증일 테니 말이다.

 

*사진제공 >>> 극단 파수꾼/권리장전2016_검열각하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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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_성지은

 소개_삶은 춤추듯이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감각주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