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2017 변방연극제 <노동집약적 유희> 丙 소사이어티 공동구성

2017. 7. 15. 11:45Review



노동집약적 유희 = 연극?

2017 변방연극제 <노동집약적 유희>

丙 소사이어티 공동구성


글_유혜영



우선 형식에 대해 생각해보자.

무대 위에는 거대한 보드게임 판이 있다.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수만큼 전진하는데, 빨강 바탕에 멈추면 소비, 파랑 바탕에 멈추면 일을 할 수 있다. 일을 하면 돈을 벌고, 소비를 하면 체력을 비축한다는 것이 플레이어들의 생존 법칙이다. 출발점에서 그들은 최저시급을 적용한 월급 120여만 원을 지급받는다. 이동 거리에 따라 일반 버스비 또는 광역 버스비가 적용되는 디테일이나, 헬스장에서의 체력 충전은 재방문 시부터 적용된다는 치밀한 게임 규칙에 한창 빠져있노라면 어느새 첫 번째 탈락자가 발생한다. 이후, 객석에서 등장한 연출가가 탈락한 플레이어에게 실제 게임에 생존한 시간을 계산하여 최저시급에 해당하는 사례비를 지급한다. 첫 번째 탈락자는 29분을 생존하여 3,470원을 받았다. 공연 시작과 함께 카운트되기 시작했던 실제 공연의 소요시간을 관객 모두가 스크린을 통해 확인한다. 이처럼 모든 참가자가 파산하기까지 혹은 사전 공지된 공연시간 60분이 될 때까지 게임은 그리고 연극은 계속되는 것이다.

말 그대로 게임이다. 실제 사람이 게임판에 선다는 점이나 그 게임을 중계하고 해설한다는 설정은 일반 보드게임보다 우리를 자극하지만, 사실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미 여러 차례 봐왔던 광경이다. 무대의 플레이어들은 사전에 모집된 관객들인데, 배우로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책임감 없이 담담히 게임에 임하는 모습이 오히려 관객의 몰입을 극대화한다. 우선 게임이 시작되면 주어진 규칙 안에서 어떻게든 생존하거나 미션을 완수하려는 욕구가 발생한다. 플레이어는 물론이고 지켜보는 사람들도 그 축소된 세상 안에서 승리하기 위해 집중력을 발휘한다. 우리가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같은 이유로 이 연극을 보는 재미가 있다.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은 모든 것은 흥미롭다.

다만, 연극이 시도한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연출가의 등장이다. 그녀는 연극에 대한 사례비를 준다는 점에서 제작자이고, 사례비가 노동에 대한 대가라는 점에서 고용주이다. 그녀의 등장은 은유와 허구의 놀이에 ‘리얼’을 개입시킨다. 그 경계가 차지하는 단 2-3분의 시간동안 이 연극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의미를 짚어보자.

생산과 소비로만 이루어진 생활, 소비를 통해 힘을 얻는다는 착각은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현대 일상이다. 잠시라도 일을 쉴 때는 TV 광고에 몰입하곤 한다. 이런 점에서 이 게임의 기본 세팅은 상당히 예리하게 우리 삶을 은유한다. 그러나 노동에 대한 시각은 아쉽다. 플레이어들은 편의점, 주유소, 패스트푸드점이나 대형 의류매장들을 ‘콩콩’ 뛰어 전전해보지만, 월 40만 원의 월세를 감당할 수 없고, 그마저도 계속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주사위의 운에 맡겨진다. 우리 사회 노동자들의 문제가 주로 임금의 액수보다는 분배의 불균형에, 공간적 불안보다는 시간을 저당 잡힘으로 인한 노예화에 있다는 점에서 연극의 문제의식은 한계를 갖는다. 플레이어들의 단순한 퍼포먼스 반복이 산업사회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노동환경의 ‘소외’문제를 연상하게도 하지만, 이미 1936년 <모던타임즈>가 완성한 동일한 표현으로 동시대 노동자들의 감정과 성격에까지 침투한 기계화를 통찰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므로 일반 관객들에게 무대에서 일어나는 일은 특정한 생활패턴을 과장하여 희화화한 단지 게임에 머문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마우스를 움직여 결말 근처 뒷부분으로 건너뛰기를 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거나 파산할 수밖에 없도록 짜인 게임 룰에 회의를 품게 되기도 한다. 플레이어들이 모두 파산할 수밖에 없다는 설정은 오히려 흥미로운데, 노동자의 삶은 이미 파산으로 결정되어 있고, 주사위 결과에 좌우되는 랜덤한 것조차 아니라는, 그런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종말적 시각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을 게임판에 세운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연출가다.

객석에 있던 연출가는 탈락자가 발생하면 무대 앞쪽 중앙으로 나와서 최저시급을 적용한 생존 시간당의 사례금을 참여관객에게 지급한다. 그 순간 연출가는 고용주가 되고, 배우는 노동자가 된다. 게임판과는 확실히 다른 시공간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그곳은 연출된 실제다. 사례금을 지급받는 이들의 노동이 연극이었다는 점에서 무대 위 게임의 의미도 이곳, 연극을 대가로 임금을 지급하는 현장으로 귀결된다. 관객은 연극이라는 얼마 남지 않은 창조적 일의 영역에조차 자본주의 논리로 정해진 최저시급이 적용되고, 창작자 간의 관계가 고용주와 노동자로 전락하는 것을 보게 된다. 연출가와 배우는 더 이상 창조 공동체가 아니고, 배우는 창작자가 아닌 노동자다. 그들의 창작 활동은 최저시급에 해당하는 노동이 된다.

연출가가 동전 하나까지 칼같이 세어 최저시급을 지급한 이유는 그 액수의 비참함에 대한 고발이다. 그 돈으로는 파산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연출가는 왜, 배우를 최저시급 노동자로 만드는가? 굳이 체제 안으로 들어와 예술과 예술가들을 평가절하 시켜버리는 연극인들의 자학인가, 아니면 예술까지도 유급노동으로 여기도록, 그럴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고 있는 돈밖에 모르는 사회에 대한 고발인가. 어쩌면 둘 다였겠지만, 현재 우리에게 닥친 노동과 예술의 본질, 그 관계에 대한 탐구와 예술가로서의 입장이 드러났다기보다는 표면적 현상 자체와 그에 대한 분노나 무기력 같은 감상만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현대 노동 문제의 본질은 높은 경제 생산량과 그것을 이루어내는 ‘일 자체에 대한 엄청난 숭배' 가 인간의 고유함과 각각의 독창성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데 있다. 이것은 철학의 문제다. 그러한 철학이 최저시급을 결정한다. 시장은 체제를 공고히 하고, 노동자는 익숙해진다. 예술은 바로 그 지점에 저항한다. 예술은 예술가의 고유함과 독창성을 지향하고, 지지하고, 오직 그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온전한 저항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가 우리 사회 대다수 무력해진 노동자들을 자극한다고 믿는다. 다시 인간이 되라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연출가가 이후에도 계속 이렇게 살게 될 것 같다고 말했던 것 같다. 그렇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유로운 것 아닌가. 삶의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생각으로 사느냐다. 더 많은 연극인이 노동자가 아닌 예술가로 살기를 바래본다. 사회는 여전히 예술에 허기를 느끼고 있다.



*사진제공_서울변방연극제 사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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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_유혜영

 소개_연극을 공부하기 시작한 새내기입니다. 공연장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