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궤 속의 일물(一物)을 찾아서<박흥보 씨 개탁(開坼)이라>

2017. 6. 28. 08:32Review

 

궤 속의 일물(一物)을 찾아서

<박흥보 씨 개탁(開坼)이라>

창작집단 희비쌍곡선 / 남산 컨템포러리(남산국악당)

 

글_채민

 

남산골한옥마을의 입구를 지나 길지 않은 오르막길을 오르면 좌측에 서울남산국악당이 자리하고 있다. 마당과 돌담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건물 자체가 자그마한 안뜰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지하인데도 볕이 가득 드는 이곳에 앉아 건네받은 설문지를 살폈다. 상자(궤)에 들어있었으면 하는 단 하나의 물건을 적어보라는 질문이다. ‘돈’, ‘주식’, ‘ 증권’등은 안 된다며 손쉬운 보기들은 애초부터 지워버렸다.

예로든 답안은 빨간색 람보르기니, 동아연극상, 작업용 원목책상(1800mmx600mmx600mm), 연습실(32평/전면거울/지상) 등으로 꽤 구체적이었는데, 수단(돈)을 지우고 보니 소원한 이들의 성향과 지향하는 바가 보였다. 주어지지 않을 것에 대해 골몰하는 것이 수고스러워 다시 햇살 가득한 안뜰에 눈길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나의 궤에서 나왔으면 하는 것이 있다면 ‘바람이 선선하고 햇살이 가득한, 무언가에 쫓기지 않는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흥보 씨 개탁(開坼)이라>는 남산 컨템포러리 ‘전통, 길을 묻다’의 2017년 기획공연으로 제작된 창작집단 희비쌍곡선의 작품이다. 작년에도 이곳에서 같은 극단의 <필경사 바틀비>라는 작품을 만났다. ‘허먼 멜빌’의 소설<필경사 바틀비>를 판소리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주인공 ‘바틀비’와 배경이 되는 ‘그 때’와 ‘지금 여기’를 바라보는 희비쌍곡선의 해석이 분명하게 드러나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박흥보 씨 개탁이라>는 <흥보가>를 원작으로 앞선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다. 이번 작품에서 공유하고자 하는 사유의 흐름이 다소 원론적이긴 했지만, 지난 작품보다 원작을 풍부하게 읽어낸 면이 있었다. 또한 본 극단이 작품을 만들 때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왜 지금 이 이야기여야 할까’라는 질문은 전통에서 길을 물어보고자 하는 남산 컨템포러리의 의도에 상응하는 작품이 되도록 하는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해설과 함께하는 판소리 콘서트?

무대 중앙에는 궤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박흥보씨 앞으로 도달한 이 궤를 중심으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그 뒤로 병풍 한 폭 크기의 스크린이 천장부터 떨어져 바닥에 닿아 있다. 이것은 스크린이 무대 전면을 차지하는 것을 피하고, 공연 중 이따금씩 맺히는 영상과 전달하고자 하는 텍스트가 표구된 액자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준다. 연출은 이를 통하여 일정한 영역으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거나 거두었다.

무대 양편으로 악사들이 자리하고, 소리꾼 박인혜가 등장하며 공연은 시작된다. 한 소절이 끝나면 국문학 박사 신호림이 무대 위로 올라온다. 작품은 <흥보가>에 대한 신호림 박사의 설명과 소리꾼 박인혜의 ‘발췌한 구절’ 소리가 번갈아 이어지는데, 형식적으로만 보면 음악과 풀이가 함께 있는 렉처 콘서트의 구성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국문학 박사 신호림 역의 이한밀 배우가 일찌감치 본인이 배우라는 사실을 밝히는 점과, 스토리에 따라 배우가 다른 등장인물로 분하는 것, 두 사람이 던지는 질문과 대화를 통해 사유가 전개되는 점들 들어보아 렉처 콘서트의 형식을 빌은 또 하나의 극이라고 할 수 있다.

 

‘...보고 읽는 경우가 많을 거란 말씀입니다. 저한테 질문을 하셔도 대답해드릴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말씀이기도 하고요.’

- 국문학 박사 신호림 역의 이한밀 배우 대사 中

 

 

 

문답

소리꾼 박인혜는 ‘우리가 잘 살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이야기의 편의를 위해 ‘무한재보담’이라는 설정에 손을 댄다. 제비가 흥보에게 보은하고자 물어다준 박씨에서 나온 궤. 원래는 필요한 모든 것이 무한정 쏟아져 나오는 그 궤에서 ‘단 한 가지’만 나올 수 있다면 무엇을 바라야 하는가, 무엇이 삶에 꼭 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공연 전 나누어준 설문지는 ‘미리 생각해보기’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다.

그들은 원작<흥보가>가 다루는 의식주에 대한 사유에 집중한다. 흥보의 배고픈 자식들이 저마다 먹고 싶은 것을 가지고 어미를 조른다. 각기 입맛도 다르고, 먹는 것을 가지고 채우고자 하는 욕구도 다르다. 극은 송편 때문에 엎드려 또래아이들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간 열일곱째 아들이 송편 세 개로 설욕하고자 하는 대목을 발췌하여 ‘관계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제시한다. 이는 관계를 맺고 존중 받기 위해 일차적으로 요구되는 의복에 대한 논의로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궤에서 나온 귀한 흑공단으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치장한 흥보를 보고 흥보의 아내는 ‘까마귀 같다.’고 한다. 안목 없음이 빚어낸 촌극이다. 이렇게 먹고, 입는 것. 그것이 가지는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서다보면 궁극적으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희망하게 된다. 이것은 물건의 가치를 알아보고 쓸모 있게 만드는 것. 가치관, 신념, 지혜 등이다.

 

 

 

현실고백

‘천불생무록지인(天不生無祿之人)이요, 지부장무명지초(地不長無名之草)라.’

(하늘은 먹을 것이 없는 사람은 낳지 않고, 땅은 이름 없는 풀을 기르지 않는다.)

매품 팔러가는 흥보를 말리며 흥보의 처가 말했다는 ‘다 먹고 살길이 있다’는 이 구절은 삼순구식을 면치 못하는 그들이 스스로 외는 주문 같은 구절이다. 사람이 굶어죽고, 아이가 버려지는 시절에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지금 여기’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능청스럽게 연주되는 원로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의 멜로디가 분위기를 환기시키자 연주자부터 소리꾼, 배우까지 집과 관련된 각자의 빠듯한 재정 상태를 고백한다. 이들은 모두 젊은 예술가이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먹을 것만 있어서는, 입을 것만 있어서는 되는 게 아니다.’하며 넘기기에 님은 차치하고서라도, 내 한 몸 누일 ‘집’문제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모양이다. 정신적 가치를 고양하던 스토리는 현실에 발목 잡혀 다시 지상으로 내려앉는다.

 

‘이제 궤 속의 단 한 물건을 정하는 일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겠습니다. 그 안에 담길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하고, 심지어는 그 안에 담길 수 없는 무형의 것들까지도 반드시 필요하다는 걸 알겠니다. 그럼에도 ...(중략)... 지금이라면 저는 다른 건 다 됐고 저 안에서 작은 집이 한 칸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배우 이한밀입니다.’

- 이한밀 대사 中

 

 

 

 

표면적 생소화

판소리 대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극적인 구성과 감정을 자유자재로 담아낼 수 있는 다양한 창법, 관객과 호흡하는 즉흥성 등은 판소리가 지닌 특성이자, 장르의 강점이다. 소리꾼은 이야기의 안팎에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관객을 카타르시스로 몰아가다 어느 순간 털어내고 환기 시키는 재주를 부린다. 이는 브레히트의 ‘생소화하기’를 상기시킨다. <박흥보 씨 개탁이라>에서는 소리꾼 박인혜의 기량으로 관객을 사로잡고, 이에 더불어 극을 환기시키는 몇 가지 장치들을 실험한다. 막간극으로 질문에 답하는 실제 신호림 박사의 영상 상영, 주요 텍스트의 나열, 작업자들의 목소리 삽입 등이 그것이다. 알다시피 ‘생소화하기’의 목적은 관객으로 하여금 사건과 거리감을 두어, 그것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여 내용을 분석, 비판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렉처 콘서트 형식을 이용하여 <흥보가>와 관객 사이에 ‘구조적 거리’까지 둔 <박흥보 씨 개탁이라>는 오히려 생소화하기의 효과를 보지 못한다. 그들이 던진 질문에 끊임없이 스스로 대답하고, 관객이 사유의 흐름을 놓칠까 하는 염려에 요약정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반복하여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고가 샐 틈을 허락하지 않는 극의 진행은 다음과 같이 다소 원론적인 결론을 던져준다.

 

‘함부로 삶을 통틀어서 생각하지 말고, 매 순간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분명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해보는 일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요?’

- 소리꾼 대사 中

 

맺음말

시종일관 무대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던 궤가 열리면 그 안에서 작은 궤가 나온다. 그 작은 궤를 열면 더 작은 궤가 나온다. 아마 궤는 점점 더 작아지고 끝도 없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각자의 필요에 골몰하고, 섬세해지자는 당부를 은유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의식주’는 생을 영위하는 것과 맞닿아 있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어느 것 하나 ‘이것만으로는...’이라며 넘길 수 있는 것은 없다. 때문에 그들이 다음, 그 다음의 논의로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석연치 않았던 듯하다. 음식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고, 옷도 입어본 사람이 잘 입는 법이다. 오히려 물리적인 것들이 해결되지 않는 이상 가치관, 안목, 취향들이 쉽게 생겨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극중 이한밀이 털어 놓았던 것처럼 (‘이제 궤 속의 단 한 물건을 정하는 일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는 걸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우리에게 필요한 ‘궤 속의 일물(一物) 추적’의 끝을 관객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희비쌍곡선이 제시한 유의 흐름보다는 <흥보전>을 풍부하게 읽어낸 것에 대해 더 박수를 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제공_창작집단 희비쌍곡선 제공

** 희비쌍곡선 SNS페이지 바로가기 >>> https://www.facebook.com/HeebieJeebieJuice

 

 

필자_채민

 소개_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가치를 믿습니다. 아직 부족하지만, 시간을 가지고 충분히 고민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