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8. 9. 17:26ㆍReview
어떤 (좋은) 거리감
<sonans:오이디푸스왕과 함께> 리뷰 @삼일로창고극장
글_김송요
왜냐면, 예전에 나는
공연을 보는 날, 어쩌다 이른 시간에 삼일로창고극장에 도착했다. 얼마나 이른 시간이었냐면 아직 티켓 배부도 시작되지 않았을 때다. 아 아직 티켓을 받을 수 없군요, 중얼거리고 머쓱하게 웃으면서 극장을 빠져나와 잠시 명동성당엘 갔다. 나는 불교지만 스무살 때 기독교미술 수업을 들으면서 마리아님을 좋아하게 되어서 명동을 지날 때마다 마리아님을 보고 간다. 그전까지만 해도 가톨릭 신자가 아닌 내게 마리아는 ‘예수님 엄마’였는데, 스무살에야 처음 수태고지 그림들을 보며 임신의 경위(?)를 알게 되었다. 젊은 여자가 대체 어떤 미래 무슨 상황이 펼쳐질 줄 알고 대뜸 저더러 애를 배라는 말에 ‘당신 뜻대로 되게 하소서’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당시 내게는 그 말이 충격적일 정도로 결연하고 용감하게 느껴졌다.
그러고도 여전히 시간이 남아, 가톨릭회관 안에 있는 카페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해 마셨다. 나는 에스프레소를 보면 김승옥의 「다산성」을 무조건 떠올리는데, 다방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그녀는 커피만큼 작게 말했다’는 문장 때문이다(디테일이 살짝 틀렸을 수도 있다). 교과서에는 ‘당시 다방에서 커피를 주문하면 에스프레소처럼 작은 사이즈가 나왔으므로, 커피잔의 사이즈에 목소리의 크기를 빗댄 것’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김승옥 전집에서 그 문장은, 그녀는 ‘커피’만큼 작게 말했다, 라고, ‘커피’에 따옴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작중 ‘나’와 데이트 엇비슷한 것을 하게 된 그가 수줍음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커피’를 읊조려 주문하였으므로, 그 이후 말도 모두 주문할 때 웅얼거린 ‘커피’ 정도의 음량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이 진실인지 그냥 평생 모르고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도, 그 모든 것을 하고도 나는 극장에 여전히 빠르게 도착하여 그러나 이번엔 티켓을 받고―티켓은 나뭇가지였는데 나는 그것이 오이디푸스의 지팡이 은유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쿨하게 행동하는 사람인 척하느라고 여기다 ‘해리포터 지팡이 같았다’며 모른체 너스레를 적을 뻔했다―, 연출의 글을 차근차근 읽으려고 했지만… 마지막 단락에 ‘이 글을 읽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고 적힌 것을 보고 읽기를 멈추고, 공연이 끝나면 가톨릭회관 앞에 흐드러지게 핀 백합을 한번 더 보아야겠다는 생각이나 하다가, 일찌감치 객석에 앉았다. 얼른 리플렛을 닫았음에도 연출의 글에서 읽은 표현 하나는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까워지면서 동시에 멀어지기’.
관객을 포함한 동료와의 만남
<sonans>는 ‘가까워지면서 그와 동시에 멀어지기’라는 화두를 여러 기획자/창작자가 자신의 방식으로 읽어내고 표현하며 만들어가는 작품이다. 에잉, 이렇게 간단히 정리한다고? 당연히 이게 전부가 아니다. 그러나 한 문장만으로도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세부요소를 조금쯤은 짐작 가능할 것이다. 작품은 한 사람의 한 가지 해석으로, 곧고 선형적인 결론을 향해 치달아가는 대신 하나의 발상을 두고 여러 사람이 펼친 여러 고민을 여러 방식으로 헤쳐나가는 과정 자체이자 이리저리 가지치고 샛길을 걸어가며 그려낸 결과물로서 완성된다.
연출을 맡은 박한결은 다른 예술가-작업자-동료들과의 만남과 만남이 촉발하는 화학작용 역시도 작품의 일환으로 포섭한다. 탈을 만드는 서공희, 안무가인 김건중, 미술을 공부하고 밴드로 활동해온 정무키, 발레를 하는 최형준, 시각예술그룹 헤비급, 생활적 무용을 일구어가는 손나예가 박한결과 함께 창작하고, 오이디푸스(이명하)와 이오카스테(캐서린 매덕스) 그리고 테레시아스(정민영)이 무대를 오고간다. 매 챕터가 시작할 때마다 삼일로창고극장 위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각 챕터를 이끌어가는 창작자가 극장에 입장하는 실황(?)이 무대 위 화면에 영사된다. 극장 바깥에서 극장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 대기 공간의 분주함과 긴장감까지도 카메라로 촬영되어 공연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이는 삼일로창고극장이라는 공간의 재미난 부분―누군가는 물리적인 ‘한계’라고 부를지도 모르는 공간의 특성을 ‘가능성’으로 바꾸는 연출인 동시에, 관객 역시도 공연의 준비과정 혹은 백스테이지에 끌어들이는 몸짓처럼 느껴진다.
일곱 주체가 만든 일곱 챕터는 토끼굴 같기도, 다리로 섬과 섬을 이어놓은 다도해의 지도 같기도, 디오라마로 구현한 경이의 방 같기도 하다. 그만큼 옴니버스식인 것 같으면서도 그만큼 유기적이기도 한 방식으로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 느슨하지만 서로를 지탱하고 있는 이 연결은 오이디푸스 이야기라는 지반 위에서, 혹은 지붕 아래서 이루어진다. 신탁을 피해 집을 떠났지만 결국 신탁의 예지대로 비극을 맞이한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가까워지면서 멀어지기’라는 말이 가진 관념적 뉘앙스에 인물, 서사, 상황, 주제 등의 디테일을 적용할 수 있게 한다. 누가 어느 부분을 취사선택하는지, 같은 텍스트를 기반으로 한다고 했지만 실은 동상이몽 아니었을지, 그 모든 개별성과 예측불가능성 역시도 작품의 재미가 된다.
오이디푸스라면 알지만? (모르지만?)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와 때로는 안팎으로 연결되기도, 때로는 내외로 단절되기도 하면서 상호작용하는 챕터는 공연의 흥미를 배가한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sonans>를 지배하는 대신 연결고리로서 제 기능을 다한다. 원작을 아주 잘 아는 사람이라면 공연을 더 수월히 이해할 수야 있겠지만, 원작을 잘 모른다고 해서 공연 자체가 어려워지진 않는 정도다.
첫 챕터를 맡은 서공희가 오이디푸스를 위해 만든 탈이 그렇다. 기능적, 의미적, 존재론적 측면을 고려한 탈들은 ‘탈’이라는 연극의 친구와 ‘(그 탈이 그 탈이 아니지만) 탈바꿈’이라는 연극의 속성, 나아가 정체성으로 신음하는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의 특수성까지 아우른다. (그리고 실은 무엇보다도… 어떤 탈은 눈에 구멍이 뚫렸고 어떤 탈은 앞이 안 보인다. 이렇게 원초적인 이유를 들어도 될까. 죄송합니다.)
정무키는 오이디푸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중 가장 ‘가깝고도 먼’ 상태를 유지하는 인물로 예언자를 선정하고, 예언자의 처세술을 정리하여 합창곡을 만들었다. 일부러 나약해 보이기, 대명사를 남발하기, 스스로에게 덕담하기, 진실은 동물의 입으로, 대뜸 노래 부르기, 홀연히 사라지기 등으로 정리된 그의 행각은 과연 우회의 방식을 통한 생존 기술이었다. ‘이거 저거 그거’를 읊조리는 주술적인 곡부터 새의 목소리를 흉내낸 (디즈니풍을 살짝 선회한) 히치콕풍의 곡, 왠지 장엄한 곡, 왠지 깜찍한 곡 등이 현장의 배우와 다른 창작자와 스태프들의 음성으로 노래된다. 이 공연에서 가장 많은 인물이 동원되는 챕터로, 현대적인 프레젠테이션(!)과 고전적인 합창의 풍경이 이루는 화음을 듣는 일이―사실은 속어를 써서 ‘아다리 맞는’ 무언가를 보는 일이라고 하고 싶다―무척 유쾌했다.
헤비급은 오이디푸스와 ‘가까워지면서 멀어지기’로부터 누구나 갖고 있는 ‘맹점’을 도출해낸다. 그리고 배우가 착용한 어안렌즈를 통해 이 맹점을 나누는 일에 주목한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고프로로 타인의 시선을 공유받는 일은 브이로그 시대에 흔한 일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영영 알 수 없는 것들―사랑하는 사람을 볼 때 씌는 콩깍지나 거울을 볼 때 느끼는 미묘한 애증(?) 같은―이 있다는 사실이 괜히 머릿속을 스쳐간다. 어쩌면 그것마저도 맹점일까? 탈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배우의 이마에 둘러진 카메라로 세상을 보는 것은, 그럼으로써 캐릭터와 배우를 분리시키는 과정은 그 자체로 ‘연극적인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기묘한 위트가 되기도 한다.
가까워지면서 멀어지기
그렇다고 반드시 매 챕터가 오이디푸스를 드러내놓고 호명하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바키거나’ 챕터에서 김건중과 박한결은 텍스트 없이 그저 서로 얼굴을 붙이고 몸을 움직인다. 옆에서 뺨과 뺨을 맞댄다거나 이마를 마주대는, 흔히 ‘스킨쉽’이라고 했을 때 상상하는 접촉이 아니라, 얼굴의 표면적을 꽉 맞부닥치고 발걸음을 떼는 아주 끈끈하고 밀접한 접촉이다. 퍼스널 스페이스, 즉 ‘가까우면서 먼 존재’에게 요구되는 물리적 거리감을 의도적으로 깨뜨리는 강렬한 (간접) 신체경험이다. 관객인 나는 굳이 이 챕터가 오이디푸스의 어떤 이야기에 대응하는지 끼워맞추는 대신, 그저 ‘인간은 서로 맞물린 요철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애쓰지 않고도 퍼즐처럼 이어져 있기란 불가능하구나’ 생각하면서 몰래 탄식한다. 밀리지 않을 따름인 건지, 전심전력 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새 좌표에 더듬거리며 발을 딛는 이들을 숨죽여 쳐다본다. 서로를 밀어내지만, 그로 인해 아주 바싹 달라붙게 되는 두 사람의 모습은 힘겹고 기이하고 아름답다. 솟아오른 무대나 단차가 큰 객석이 없는 극장의 구조도 경험에 한몫한다. 숨결, 땀, 시선이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처럼, 너무나 가깝고 실감나게 현존한다. 몸뚱아리가 들썩이도록 설계된 털뭉치 고양이 장난감만 보아도 그 모방된 생명의 징후에 심장이 콩닥이는데, 살아있는 숨소리와 땀냄새가 지척에 다가오는 경험에 긴장하지 않기란 어렵다. 어떤 순간에는 투쟁 같고 어떤 순간엔 관능 같은 긴장감. 아마 오이디푸스가 공연되던 먼 옛날의 극장에서도, 무대 위에서 배우가 구슬땀을 똑 떨어뜨린 찰나, 상대역의 가슴을 툭 밀친 순간 그 생생한 현존의 감촉이 영원으로 확장되는 경험을 한 관객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이 공동 창작자 동료들은 각자의 도구를 각자의 방식으로 다루며 <sonans>를 완성해 간다. 최형준은 글을 쓴다. 마치 ‘스터디 윗 미’ 타입랩스처럼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고, 한숨을 쉬고,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들어오고, 주변인과 이야기 나누기를 반복한다. 와중 관객은 무대 위에서 두 가지의 물성이랄지 육체성이 교차하고 대조되는 광경을 본다. 브라운관에 출력되는 흑백 영상에 의해서다. 현장에 실재하는 작가가 정적인 움직임만을 보이는 동안, 화면 속의 동일인물은 몸을 바쁘게 움직인다. 물리적으로 만져지는 존재는 가만히 있고, 영상이라는 꺼풀 너머에 있는 존재는 쉬지 않고 액션을 취한다―하지만 실은, 글쓰기 또한 정중동의 ‘액션’이고, 격투기 선수의 펀치도 작가의 글쓰기도 모두 쉴 틈 없는 노동인 것 아닌가? ‘쿵푸’의 한국식 한자 발음이 ‘공부’라는 것은 왜 또 갑자기 떠오르는지. 손나예는 듣고 움직인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전달되면서 어쩔 수 없이 왜곡되고 벽에 부딪히는,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교감을 자아내는 ‘대화’를 움직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관객은 방금 귀로 들은 음성언어를 바로 눈앞에서 신체언어로 돌려받고, 일종의 동시통역이면서 완전한 재해석이기도 한, 구전口傳이 아닌 신전(?)설화의 간극을 가늠하는 역할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그럴싸하게 표현되는지 두고 보겠어’ 같은 평가의 태도가 아니라 실패할지라도 문을 두드리고자 하는 사람을 향한 귀 기울이기에 가까운 태도를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연극 속 수많은 대화는 오해를 통해 ‘이야기’가 되건만, 그는 최대한 정확한 방식으로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 오해하지 않기 위해 대화를 숙고한다. 그 문법-깨기가 도리어 새 문법이 되는 순간이 재미나다.
그리고 또, 공동창작자
공연의 마지막 순간이자 박한결 연출이 맡은 종장 ‘엑소더스’를 위해, 오이디푸스는 가면을 벗고 독백을 읊는다. 가면을 쓴 채로는 대사를 전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른바 ‘가면을 위해 가면을 벗기기’다. (어라, 탈-탈?) 배우는 표지와 속지를 밸크로로 이어붙인 가면을 벗고 무대 가운데 선다. 가면을 벗은 이명하 배우가 독백을 시작하면, 그가 가진 고유의 아우라가 공기중에 또렷하게 드러난다. 오이디푸스의 처절한 비탄은 여성의 목소리로 울려퍼진다. 비강 안쪽 깊은 데서 내는 촉촉하고 낭랑한 목소리가, 물리적인 탈에 가로막히지 않고, 삼일로창고극장에 옹기종기 앉은 사람들에게 전해진다. 그 대사는 너무도 분명한 오이디푸스의 것이어서 각 작가가 자신의 입말을 살려 했던 설명과는 완연히 다른 기운을 뿜어내지만, 동시에 자의식을 걷어낸 상태로 오롯한 문장을 전달하는 인물―배우가 어떻게 배우의 방식으로 이 공연의 일부가 되는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비로소 무대 위 모든 사람의 얼굴을 똑바로 본 기분이 들면서 마음이 꽉 차오른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sonans>는 계획되고 연출된 틀 사이사이 꽤 많은 우연과 돌발이 존재하는 공연이었다. 때문에 시간이 지나 작품을 잘 반추할 수 있을까 걱정하기도 했다. 공연이 끝나고 쓰는 글은 과연 공연을 얼마나 그러모아 움켜쥘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관객 중 한 사람이 쓰는 글이 아주 사적인 감흥 외 그 무언가를 움켜쥐는 건 얼마나 가능성 있는 일이며 얼마나 절망을 동반하는 일일까? 결국 그 과정 역시도 ‘가까우면서 멀어지기’가 아닐까? 그러나 가까워지면서 멀어지는 일이 무용한 발장구가 아님을 나는 믿는다.
결국 어쩌면 ‘가까워지면서 멀어지는’ 것은 공연 자체가 가진 속성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제4의 벽’이라는 말처럼, 무대와 객석 사이에는 가상의 벽이 상정되곤 한다(모두가 그렇지 않지만, 여전히 많이들 그렇기도 하다). 정해진 좌석에서 정해진 위치의 무대를 보는 것은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통용되는 규칙이었다. ‘이머시브 씨어터’ 중에서도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영역을 일종의 빈 슬롯처럼 두고 다른 부분의 톱니를 채우는 식으로 운영되는 공연이 적지 않다. 무엇보다, 물리적인 위치 가르기가 없더라도, 무대 위와 무대 밖은 다른 우주이기 마련이고,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멀어지기’를 통해 그 우주에 돌을 던지길 마다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무대 위 세상, 그 이야기가 허구인 것을 알면서도 관객은 그 세상과 인물과 이야기에 이입한다. 일부러 낯설게 해야만 이지러뜨릴 수 있는 몰입 속에 빠져들면서 하염없이 낯선 세계와 가까워진다. 멀어지는 동시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책 『전국축제자랑』에서 읽은, 품바 악단 사이에 난입해 자신의 악기로 자신의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춤을 추는 묘령의 각설이 할아버지 이야기가 생각난다. 정체불명의 할아버지가 너무 태연히 극단에 섞여들어 공연을 함께하는 바람에 극단 사람들은 당황하고 관객들 역시도 위화감을 느꼈다는 이야기. 맛있는 문장으로 서술된 에피소드는 너무나 재미있었고 사려 깊은 표현은 자유인 할아버지를 백안시할 마음이라곤 들지 않게 했지만, 그럼에도 생각했다. 가까워지면서 멀어지는 것은… 중요하구나. 사람에게도 공연에게도…
거리두기와 사랑하기
이 글을 대뜸 사적인 방식으로 시작한 것은, 나 또한 내 나름대로 가까우면서 멀어지기를 시도해보고 싶어서였다. 때로 개인적인 이야기는 듣거나 읽는 것만으로도 마치 그 주인과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게 하지만, 또 때론 너무나 사적이고 고유한 것이어서 도리어 심정적으로 그 사람과 멀어지기도 하니까. 물론 공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양가성은 충분히 확보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심지어 글을 적는 나조차도 나 자신과 영점조절이 되지 않는 거리감을 느끼고 말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어린 마리아가 목숨을 걸어가며 구설수의 주인공이 되게 놔둔 이들이 너무 얄밉고, 비싼 돈을 주고 에스프레소 사이즈의 쓰디쓴 커피를 마시면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여자를 관조하는 시선이 얄궂다. 나는 그 당시의 나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한편으로 그 당시의 나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그래서 당분간은 계속 생각할 것 같다. 가까워지면서 멀어지는 일. 결코 나쁘다고도 슬프다고도 할 수 없는, 당연하고도 노력이 필요한 일. 문득 언젠가 사랑에 대해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다. ‘아무 노력 않고도 그저 편한 사람이 좋다고들 하지만, 그리고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럼에도 저는 사람을 대하는 데 에너지가 드는 걸 감내하고 싶어요’ 말했더니 친구가 ‘정말로, 그 불편과 긴장감과 거리마저도 사랑’이라고 이야기해주었던 일. 그러고 보니 바로 지금이 딱, 그런 ‘거리두기 사랑’을 할 시국 같기도 하고?
필자소개 김송요: 덜 재밌어도 남 속상하지 않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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