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제20회 서울변방연극제 리뷰 : 비/인간의 윤리학을 탐사하기

2021. 8. 17. 12:55Review

 

 

제20회 서울변방연극제 리뷰 : 비/인간의 윤리학을 탐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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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0회 서울변방연극제 프로그램 중 ‘〈Connections〉(장지아), 〈재주는 곰이 부리고〉(원의 안과 밖), 〈요정의 문제〉(이치하라 사토코 X 김보경), 〈재난일기_어느 연극제작자의 죽음〉(이하 〈재난일기〉)(홍사빈), 〈I'm the church〉(정세영),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 창출을 위한 연출과 연기술 연구 - 코로나 바이러스를 中心으로〉(이하 〈베르톨트...〉)(극단 성북동비둘기)’를 관람하고서 작성하는 리뷰입니다.

 

   큰길을 따라 걷다 보면, 좌우로 늘어선 건물들이 오가는 이들을 향해 환하게 열려 있는 걸 볼 수 있다. 거기에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이 가득하다. 매끈하고 건강한 얼굴들이 혹은 또렷한 글씨가 적인 간판과 홍보물들이 좌우로 잔뜩 늘어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그것’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린다. 열린 문으로 혹은 유리창에서 길 한가운데로 쏟아져 나오는 실내조명의 빛은 마치 무대 위를 비추는 조명의 그것과 같아서 오가는 이를 환히 비춘다. 그 거센 빛은 큰길을 벗어나 작은 길로, 좁은 골목까지 들어서서야 누그러든다. 몇몇 건물은 등을 돌려 앉아 그가 짊어진 에어컨 실외기니 하는 것들을 드러내고 있고, 대개의 건물이 꽁꽁 싸매어서 자기 안의 빛을 감추고 있는 곳. 그 사이에 극장이 있었다.

   제20회 서울변방연극제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This is not a church’, ‘신촌문화발전소’, ‘뚝섬플레이스’ 이렇게 세 곳의 극장을 찾았다. 엄청나게 비밀스러운 장소라고는 할 수 없지만, 큰길 사이 골목을 얼마쯤 파고들어 가야 찾을 수 있는 이 극장들을 마주하면서, 이 극장들이 자리한 곳 또한 하나의 ‘변방’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미지1. 서울변방연극제 포스터 / 출처: 서울변방연극제 누리집

   변방은 ‘중심지에서 멀리 떨어진 가장자리 지역’을 이르는 말이다. 지구는 둥글어 그 표면에 중심과 가장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내부와 외부를 구분하는 주권 권력의 미학은 대지의 표면에 포함과 배제의 동심원을 그려내고, 그 결과 중심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떨어진 곳에 가장자리도 나타난다. 하지만 가장자리는 경계 바깥으로 완전히 밀려나지는 않은 장소이다. 중심에서 배제되었지만 여전히 권력에 의해 포함된 곳. 조르조 아감벤은 포함적 배제, 포함이지만 배제하는 것이 ‘예외’의 기능이라고 보았다. 변방 역시 그 성질상 이러한 예외의 장소라 할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남은 자들》(2012)에서 아감벤은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예외의 공간’이었음을 지적하면서, 프리모 레비가 증언한 바 주권 권력의 생명 정치를 가장 극단적으로 증언하는 ‘벌거벗겨진 생명’으로서 이른바 “무젤만(Muselmann)”에 집중한다. 극한의 영양실조와 바닥난 희망으로 인해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비틀거리는 ‘무젤만’. 프리모 레비는 너무나도 지친 나머지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을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물으며 나치의 비인간적 폭력을 규탄한다. 그러나 아감벤이 보기에, ‘무젤만’은 인간이며, 오히려 ‘무젤만’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증언하고 있다. 주권 권력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를 규정함으로써 유기체 즉 비-인간으로서의 인간과 정치적 주체 즉 인간으로서의 인간을 구분하여 왔으며, 권력의 시각에서 ‘인간답지 않은 자’를 사회에서 그리고 주체의 자리에서 추방함으로써 주권 권력을 공고히 지켜왔다.

   나치 수용소의 간수들이 ‘무젤만’을 ‘움직이는 시체’라 부르며 조롱한 것은 그들을 인간다움 바깥으로 추방하는 폭력적 행위였다. 그렇기에 아감벤은 나치의 의도에 넘어가 ‘무젤만을 인간이라 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기보다는 오히려 ‘무젤만’에서 시작하는, 비-인간과 인간을 차별하는 권력을 뿌리부터 문제 삼는 새로운 윤리학을 전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비-인간과 인간이 구별되지 않는, 그러나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포함하지도 않는, 그저 둘이 포개어져 있는 비/인간의 윤리학이 요청되는 것이다. 아감벤은 이에 관해서 ‘도래하는 공동체’라는 모호한 유토피아적 공동체를 제시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변방’은 여전히 우리로 하여금 비/인간을 위한 또 다른 윤리학을 상상할 여지를 열어준다. 왜냐하면, 변방은 순전히 주권 권력에 의해 창출되는 장소가 아니라, 처음부터 ‘장소’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이미지2. I'm the church / 출처: 서울변방연극제 누리집

   교회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한 ‘This is not a church’에서 열린 〈I'm the church〉를 보면, 이 극은 극장을 찾은 관객을 가상현실의 세계로 불러들인다. VR기기를 쓰고 가상현실 세계로 들어선 관객은 순례자의 모습을 하고, 큰 나무보다도 더 큰 안내자를 따라 걸어가 가상의 극장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안에서 눈이 커다랗고 비쩍 마른 외계인 형상을 한 배우의 퍼포먼스를 감상하며, 마지막으로 굉음과 함께 하늘로 날아가는 가상 극장의 모습을 보게 된다.

   전염병 대유행의 시대, 거리 두기와 자가격리의 시대에 수많은 공연 예술이 ‘현장’을 떠나 온라인 세상으로 이주하고 있다. 말이 이주이지, 공연장에서 떠밀려 온라인 세상으로 내쫓긴 형국이다. 기존에 관객은, 자신의 유기체적 몸으로서 극장에 찾아왔다. 철근과 석재 같은 단단한 재료로 지어진 극장에. 그리고 그 극장의 관객들 앞에서 배우 또한 자신의 유기체적 신체를 움직여 연기를 수행하게 되는데, 이때 배우는 중력과 가속도 그리고 진동 따위의 고전역학적인 운동에 터잡아 몸의 움직임을 만들어나간다. 그러나 가상현실에서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관객의 신체와 호흡하던 몸은 카메라 앞에 내던져졌고, 배우의 신체는 딱 스크린의 두께만큼 납작해진다. 스크린 너머 보이는 무대와 배우의 영상은, 무대에서 쫓겨난 연극과 관객의 처지를 계속해서 상기시킬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I’m the church〉는 가상현실을 소위 ‘진짜 현실’의 불완전한 대체만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 극은 우리에게 가상현실 또한 그 자신만의 특성을 가진 어떤 장소임을 일깨운다. 이 안에서 배우는 날아다닐 수도, 물처럼 흐르거나 촛불처럼 깜빡일 수도, 반동 없이 급정지하거나 등속 운동을 할 수도 있다. 전혀 다른 종류의 극장, 연극이 끝난 후 안전하게 폭파되는 극장을 만들 수도 있다. 관객 또한 새로운 감각으로 공연을 보게 된다. 과연 가상현실에서 극장은, 관객은, 배우는 어떻게 자신을 준비해야 할 것이며 또 그 결과 무엇으로서 서로를 만나게 될 것인가? 〈I’m the church〉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향해 대담하게 발걸음을 내딛는 공연이다.

   변방은 분명 예외적인 장소이다. 그러나 변방은 주권 권력에 의해 마냥 창출될 뿐인 공간은 아니다. 중심과 변방으로 구별되기 전, 변방은 중심과 함께 대지를 이루는 한 부분이었고 변방과 중심은 그저 각자 다른 특성을 지닌 서로 다른 땅일 뿐이었다. 아주 오래전, 변방과 중심은 각자 그저 한 필의 대지로서 생명을 키우고 서로 만났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중심과 변방을 구분하는 권력이 형성되었고, 중심은 자신에게로 ‘중심적인 것’들을 빨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것들을 변방으로 몰아냈다. 그 결과 지금에 이르러 변방은 내버려 진 땅이 되어 그 잠재력을 잃어가고 있고 심지어 예외의 장소가 되어 벌거벗은 생명들을 수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변방은 여전히 터전으로서의 잠재성을 보유하고 있는, ‘인간’을 중심에 놓는 근대의 (정상)인간중심적 권력에 수탈당한 비-인간으로서 비/인간의 하나이다. 따라서 비/인간의 윤리학에 의해 무너져야 할 수용소와는 다르게 변방은 최소한이나마 긍정되어야 하고, 나아가 비/인간의 윤리학의 대상이 될 수도 있어야 한다.

이미지3. 재주는 곰이 부리고 / 출처: 서울변방연극제 누리집

   〈재주는 곰이 부리고〉의 마지막, 무대에는 여러 개의 천막이 설치되고 촛불이 하나둘 켜지며 극장은 따뜻한 빛으로 채워진다. 한때 많은 관객이 모여들었던 서커스 천막과 그 천막이 높이 솟아있었던 빈 광장, 공터가 서커스 단원들이 웅크릴 작은 천막들을 위한 장소가 된 것이다. 서커스 단원이면서도 ‘곰’인 이들, 이들은 비/인간이며 서커스 천막은 그들이 수용된 예외의 장소였을 터다. 서커스 천막 안에서 그들은 하나의 주체가 아닌 특이한 신체적 능력을 소유한, 그저 ‘몸’으로 여겨졌고, 서커스의 전성기가 저물자 맨손으로 철탑을 오르는 고된 작업으로 내몰린 것도 모자라 그 일화조차 여행 가이드에 의해 관광객들의 ‘이야깃거리’가 되어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에게 서커스 무대가 단지 억압과 배제의 공간인 것만은 아니다. 이들이 무대로 나올 때마다 분출하는 몸의 에너지는, 할머니의 만류에도 서커스에 이끌리는 소녀의 모습이 말하듯이, 한편으로는 서커스 무대가 그들의 역량을 분출할 수 있는 포용적인 공간이기도 했다는 점을 짐작케 한다. 물론 요란한 복장으로 샹송에 맞춰 춤을 추는 여성 서커스 단원이, 퍼포먼스가 끝나자마자 피곤함에 늘어진 몸으로 퇴장하는 모습만 봐도, 서커스 무대가 이들에게 좋은 곳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커다랗던 서커스 천막이 무너진 후 다시 그 공터로 모여들어 함께 촛불을 밝히는 그 모습을 보면, 비/인간의 윤리학이 이 작은 변방에서도 작게나마 긍정해나가야 할 것이 무언지 명확해진다.

   변방에는 비/인간이 산다. 비/인간들은 ‘인간다움’이라는 환상 그 바깥에서 인간답지 않게 살아간다. 매끈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몸을 달고서, 근심과 무지를 이고서. 비/인간은 인간처럼 자유로운 정신으로 고독한 우주를 유영하는 단독자가 아니므로 세계를 자신만만하게 통찰해낼 수 없으며, 어떤 역경도 뚫어낼 불굴의 의지도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비/인간의 윤리학은 ‘인간의 자유로운 이성’이라는 환상이 만든 이분법적 선악 개념과 멀어지고, 단지 모든 비/인간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고유한 역량을 마음껏 펼쳐내며 살아가되 서로가 서로를 억압하지 않고 공존하는 삶을 만들어나가는 것을 목표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비/인간의 윤리학은 비/인간의 물질적 조건인 몸의 역량과 한계를 가늠하는 행동학에서 시작하여 그 몸들이 부딪치며 살아가는 대지-변방-를 탐사하는 지리학을 가로지르고, 여럿이 연대로서 마주닿아 서로의 역량을 상승시킬 수 있는 정치학에 이르러 해방과 공존의 윤리를 만들어 나간다.

이미지4. Connetions / 출처: 서울변방연극제 누리집

   그리고 서로 다른 신체의 마주치는 방식을 탐구하는 영상 공연 〈Connections〉,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를 정치적 실천으로까지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베르톨트...〉와 배제된 인간 그리고 비-인간 모두를 무대로 이끌어내는 〈요정의 문제〉는 연극으로 이러한 비/인간의 윤리학을 탐구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Connections〉에서 배우들은 여럿이 혹은 둘이 모여 신체의 만남, “접촉이 아니라 일종의 접속으로서의 교감”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실험한다. 먼저 배우들은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는 바로 그 몸에서 출발하고, 뒤이어 신체와 신체의 만남이 촉각적 인지를 넘어 어떤 긴장감 즉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는지를 몸짓과 표정으로 보여준다. 즉 〈Connections〉는 신체가 가진 만남의 역량을 측정하고 기록하는 비/인간 행동학적 탐구에 대응한다.

이미지5.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 거리두기 '   효과 창출을 위한 연출과 연기술 연구   -   코로나 바이러스를 中心으로 / 출처:서울변방연극제 누리집

   극단 성북동비둘기의 〈베르톨트...〉 또한 비/인간 행동학적 탐구라 할 것이나, 그 방향은 반대이다. 〈베르톨트...〉는 시작부터 ‘짜고치는’ 게임을 통해 관객을 (심적으로) 밀쳐냄으로써 ‘거리두기’를 생각하게 한다. 코로나19 판데믹 시대, 모두가 ‘거리두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지만, 정작 다른 ‘거리두기’, 가령 비-인간 존재자들(천산갑, 박쥐와 같은)이 살아가는 자연과의 거리에 대해서는 그에 비해 적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베르톨트...〉는 브레히트의 ‘거리두기 효과’를 위해 고안된 여러 방식들을 무대 위에서 시연하다가 막바지에 이르러 편견에 대항하는 이란 여성에서 제의적으로 표현한 이한열 열사 그리고 군부 정권에 항거하는 미얀마 민중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거리’는 항상 문제였음을, 다만 어떤 것을 물러세우고 어떤 것에 다가갈지가 바로 정치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거리두기’의 태도임을 역설한다.

   그리고 “2016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사가미하라 장애인 시설 살상 사건’을 계기로 집필”되었다는 〈요정의 문제〉. 이 연극의 무대에는 우생학적 사상에 잠식당한 사회에서 배제될 위기에 처한 여성이, 혐오의 대상인 바퀴벌레가,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 신체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공생 세균이 등장한다. 극 중 세계에는 폭력이, 평균과 정상의 폭력 그리고 강박적인 결벽의 폭력이 맴돈다. 힘이 떨어지는 노인과 생김새가 평균에서 벗어나는 추한 인간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치인, 바퀴벌레 같은 몰골의 기형아를 투명인간인 양 취급하는 어른들, 완벽하게 살균한 무균의 몸이 이 세계에서는 (우리의 세계에서처럼) 권력을 쥐고 있다. 그리고 〈요정의 문제〉는 이 권력자들을 무대 밖으로 몰아낸다. 무대에 들어서는 것은 추녀, 장애아동의 부모 그리고 ‘보거트’의 신봉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나름대로 자신을 긍정하고 승인하고 있다. 비록 이들의 긍정이 상식과 도덕의 잣대에는 어긋난 것일지라도, 그 거대한 잣대가 폭력에 침묵하는 동안 말이다.

   〈요정의 문제〉는 이들을 ‘요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들에게 코미디 무대를, 가요 무대를, 강연 무대를 내어준다. 끔찍하게 추한, 기형의, 세균범벅인 신체에게 그들에게 온당한 자리, 다른 이들 모두와 같은 자리를 내어주고 긍정함으로써, 〈요정의 문제〉는 비/인간의 정치학이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이미지6. 요정의 문제 / 출처: 서울변방연극제 누리집

   제20회 서울변방연극제의 주제는 리콜렉션(Recollection, 회상)이다. 보통 회상이라 하면 먼 때, 먼 곳을 추억하는 것을 말하지만, "돌아봄은 현실의 재발견이기도 하다. 현실의 재발견은 현실을 감각하는 우리의 인지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서울변방연극제의 소개글처럼, 어찌보면 회상은 인지의 원리 그 자체라 할 것이다. 회상은 과거의 기억이 현재로 돌아오는 그 움직임이기 때문이다. 회상을 통해 현재로 달려온 과거는 내 눈앞에서 현재와 포개어져 나로 하여금 과거를 통해 현재를 해석하게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해석된 현재는 과거의 기억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곧이어 현재의 빈자리로 미래가 흘러들어와 다시 회상과 만나는 현재가 된다. 따라서 회상은 비/인간의 윤리학이 지리학과 행동학을 가로질러 정치학으로 치닫게 하는 운동 그 자체이자 동력이다. 이 변방의 대지와 그 대지 위에 살아가는 비/인간을 탐사하고자 할 때, 회상은 기억을 불러내어 탐사의 방향을 미지의 영역으로 돌려세울 뿐만 아니라 고유한 두 신체가 만나는 방식을 결정하는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신촌문화발전소에서 만난 〈재난일기〉는, 떠나간 이에 대한 기억을 돌아보는, 남겨진 이의 ‘애도 작업’이 지닌 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극이었다. 배우 홍사빈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을 무대 위에 하나둘 풀어놓지만, 결코 그 기억을 다듬고 이어붙여 어떤 서사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서사란 중심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완결된 서사는 그 이상의 이야기를 용납하지 않고 자신과 동일하지 않는 이야기를 밖으로 밀어낸다. 그것이 떠나간 이에 대한 온전한 존중일 수가 있을까. 그래서 홍사빈은 떠오르는 장면들, 기억들을 덧대어 일종의 콜라주 작업을 수행한다. 연극제작자, 연극의 ‘대중화’를 고민한 연극 운동가, 자식을 둔 부모, 생활인. 수많은 인간이 한 사람의 몸 안에 살고 있다. 미디어가 일련의 정돈된 이미지를 통해 그를 오직 ‘연극제작자’로 만들었을 때, 그는 혼자서 그 바깥의 자신들을 감당해야 했다. 

   장면들이 만든 콜라주의 불연속면은 그다음에 이어질 또 하나의 장면을, 또 하나의 애도를 요청한다. 또 하나의 장면을 이어붙일 때마다, 콜라주는 완전해지지 않고 오히려 또 하나의 불연속면이 더해진다. 불연속면이 더해질 때마다 콜라주 속 장면의 배치는 달라지고 달라진 배치는 매번 서로 다른 이미지들을 만들어 낸다. 수많은 이미지가 물결치듯 떠오르고 또 떠오른다. 애도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애도는 공연을 찾은 관객들에게도 이어진다. 관객은 애도의 콜라주를 이루는 또 하나의 조각이 되고, 그 불완전하고 불연속적인 조각은 관객의 삶 속에서 또 어떤 이미지들을 산출한다. 그 이미지들 중 어떤 것은 때론 정치적일 테고, 그래서 그들을 한 곳으로 불러모으기도 할 것이다.

이미지7. 재난일기 / 출처: 서울변방연극제 누리집

 

   리뷰를 마무리하며, 서울변방연극제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순간들(〈Connections〉, 〈재주는 곰이 부리고〉, 〈요정의 문제〉, 〈재난일기〉, 〈I'm the church〉, 〈베르톨트...〉)을 다시금 회상한다. 이 회상의 궤적을 따라 서울변방연극제라는 커다란 대지 일부분의 지도가 그려진다. 각각의 공연은 그 자체로 행동학과 지리학, 정치학이 교차하는 하나의 지도이고 회상의 과정에서 간섭하는 기억에 따라 매번 다르게 그려지기 때문에, 지금 나에게서 새로 그려진 지도는 이 리뷰를 처음 시작했을 때 그린 것과는 또 조금 다르다. 그리고 연극에서 함께 했던 이의 수만큼, 그들이 연극을 돌아보는 횟수만큼 지도는 새로 그려진다. 서울변방연극제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 무한한 지도제작의 과정에서 비/인간의 윤리학은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고, 중심과 변방의 질서를 무화하는 해방과 공존을 향한 지름길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한 함께함의 장을 여는 연극제였다.

 

필자소개
갈피: 술과 책을 좋아하고, 연극 보고 나서 기분에 의지해 글쓰기를 좋아하는 공학도.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넓혀가는 중입니다. 연극, 뮤지컬 보느라 책값도 술값도 떨어져 가서 난처해하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