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2. 22. 23:38ㆍReview
부조리하게 연극하기
제6회 단단 페스티벌 〈위험한 커브〉(극단 아트맥)
갈피
연극을 보러 다니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형식의 연극들을 접했다. 그 중엔 고전적인 3막 혹은 5막 구조로 된 연극부터 1막과 2막이 순환하는 구조로 이루어진 2막 구조의 연극도 있었고, 극 자체를 보아서는 막 사이의 전환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 연극도 있었다. 연극의 서사 구조에 대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가운데에서, ‘단막극’이라는 형식에 집중하기란, ‘단막극을 하기’란 어떤 일일까? 이런 궁금함을 가지고서 제6회 단단 페스티벌 참가작인 극단 아트맥의 연극 〈위험한 커브〉를 관람하러 소극장 혜화당을 찾았다.
연극 〈위험한 커브〉의 이야기는 차 사고가 빈번히 발생하는 위험천만한 커브길 근처에서 사는 형제의 등장으로 시작된다. 시인 지망생 안톤과 자동차 수리공 루돌프는 커브길에서 사고가 날 때마다 사망자의 장례를 치르고 커브길을 수리하면서, 차량이 지나갈 때마다 사고의 예감에 몸을 떤다. 그들 자신의 힘으로는 사고를 막기 힘들기에 안톤은 사고가 날 때마다 고속도로 사무국장 크리그바움에게 탄원서를 쓰지만, 그렇게 스물네 통의 탄원서를 보냈음에도 별다른 조치는 취해지지 않아 안톤은 자신의 탄원서가 상황의 심각성을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 탓이라고 자조하며 더 좋은 탄원서를 쓰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반복되는 나날을 보내던 그들에게 마침내 크리그바움이 찾아온다. 그것도 그냥 찾아온 것이 아니라, 문제의 급격한 커브길을 지나다가 사고를 당해 크게 다친 채 구사일생으로 안톤과 루돌프 형제에게 구조되어 그들은 만나게 된다. 당연히 크리그바움은 커브길의 안전 상태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하고, 안톤은 처음엔 크게 기뻐하지만 이내 루돌프와의 대화를 통해 두 가지를 깨닫게 된다. 한 가지는 그동안 그들의 생활과 안톤의 시집 출간 비용을 위한 수입이 커브길에서 사고가 나 사망한 이들의 부서진 차량을 수리해 내다 파는 데에서 온다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크리그바움이 커브길을 지나가게 된 진실한 계기가 안톤의 탄원서에 응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불륜 상대를 만나기 위해 급하게 달려가던 길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것 즉 크리그바움의 약속이 지켜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혼란에 빠진 안톤이 크리그바움에게 그의 불륜에 실망했다고 말하면서 그를 살해하는 것으로 극은 마무리된다.
계층 간 적대적 공생 관계가 만들어내는 현대 사회의 부조리한 풍경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이 한 편의 이야기는 언어를 향한 불신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부조리극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러한 부조리함을 극단 아트맥은 위험한 커브 길의 안전 관리 대책을 늘어놓는 크리그바움의 과열된 모습을 보여주고 혼란에 빠진 안톤의 불안함이 크리그바움에 대한 공격성으로 전이될 때 충분한 시간을 두고 감정선을 보여주는 대신 빠르고 격동적인 변화를 보여줌으로써 그리고 마지막 살해 장면에서 그로테스크한 조명을 활용하여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연극 〈위험한 커브〉의 부조리함을 효과적으로 부각해낸다.
안톤은 고속도로 사무국장인 크리그바움이 자신이 쓴 스물네 통의 탄원서를 들고 등장하자 자신의 문장이 이루어낸 쾌거에 환호한다. 하지만 커브길의 안전 상태 개선이 곧 자신의 경제적 곤란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문장에 대한 안톤의 믿음은 곧바로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고, 뒤이어 루돌프가 크리그바움의 가방에서 연애편지를 찾아내자 안톤은 크리그바움에게 커브길을 방문한 진실한 목적을 추궁하지도 않은 채 그가 연인을 만나기 위해 위험한 커브길을 질주하다 우연히 사고를 당한 것으로 단정하더니 크리그바움을 커브길에서 안전사고로 죽어간 이들의 이름으로 비난하고 공격한다. 생계 앞에서 자신의 문장에 대한 믿음, 자신의 문장이 정말로 고속도로 사무국장을 움직였으리란 가능성에 대한 그 믿음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마는 안톤의 모습, 그리고 처참한 살해 장면에서 공허하게 울리는 안톤의 위령문은 그간 안톤이 갖고 있던 언어의 힘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를 드러낸다.
언어의 무력함에 대한 폭로는 크리그바움이 커브길의 안전 개선 방안을 약속하는 연설 장면에서도 반복된다. 커브길 통행을 안전하게 만들겠다며 크리그바움이 제시하는 수많은 방안 중 어떤 것이 현실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는 별개로, 루돌프가 크리그바움의 연애편지를 찾아내고 그의 진실한 의도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그 의문에 무게를 실어주는 건 하나의 언설이 그 자신 바깥의 물질적 변화를 담보할 능력이 있는가 하는, 언어의 힘에 대한 의심이다.
언어의 무능과 그로 인한 불신, 그리고 언어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배후에 대한 불안이라는 테마를 담은 연극 〈위험한 커브〉는 한 편의 부조리극으로서 단막극이라는 형식과 조응한다. 왜냐하면, 단 하나의 막으로 이루어진 극, 단막극의 구조 자체가 극으로 하여금 ‘설명하지 않음’을 자신의 내용으로 삼도록 이끌기 때문이고, 여기서 부조리극의 ‘설명 불가능함’과 단막극의 ‘설명하지 않음’이 짝을 이루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제1 원리는 플롯이며 플롯 전체는 처음과 중간, 끝으로 나뉜다고 한 이래로, 고전적인 3막 혹은 5막 구조는 개연성 혹은 필연성의 과정을 따르는 인간의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고자 해왔다. 이렇듯 개연성에 의해 조직되기에 장막 구조는 그대로 설득의 형식이 된다. 설득의 시작에 설득의 기초가 되는 전제들이 있으며, 그러한 전제들이 합리성에 따라 전개되어 끝에 하나의 닫힌 결론이 나타나는 것처럼, 장막 구조는 최초에 인물과 상황에서 시작하여 그 끝에 이르러서 관객이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선택을 이해하게 하고자 만들어진 구조이다.
이에 비했을 때 하나의 막으로 이루어지는 단막극은 장막극과는 막 수의 많고 적음 이상으로, 질적으로 다른 어떤 형식이다. 단막극은 장막극과 같은 노력을 시도할 수 없는데, 단막극에 허락된 오로지 하나의 막은 이른바 ‘합리적 전개’를 위한 여지를 남겨놓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언어, ‘말이 되는’ 언어는 단막극에서 곤경을 겪는다. 기본 전제의 단계적 변화를 보여주는 연역법도, 전제의 부정을 제시한 후 그 부정이 부정되면서 전제의 참됨을 드러내는 귀류법이나 여러 사례에서 보편적 결론을 끌어내는 귀납법, 정명제와 반명제가 합명제로 나아가는 변증법 모두 단 한 개의 막으로 이루어진 단막극에서는 활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단막극은 그 형식상 한마디의 말, 외침, 선언을 자신의 내용으로 끌어들이게 된다. 외침, 선언은 타협도 설득도 없이 외부에서 침습해 들어오는, 느닷없이 나타나 어떤 충격을 유발하는 것이다.
연극 〈위험한 커브〉는 별안간 안톤이 크리그바움을 공격하면서, 끝내 언어가 인물의 행동 그리고 상황을 설명해내지 못하고 부유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이 마지막은 인물들의 서로 다른 입장이 갈등한 끝에 도출된 장면이 아닌데, 언어의 무능을 언어로써 폭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연극 〈위험한 커브〉의 마지막 장면은 강한 원심력에 커브 길에서 밀려나는 자동차처럼, 차라리 돌출한다. 설명 불가능한 것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기. 마지막 장면의 돌출은 바로 이런 점에서 부조리극과 단막극이라는 두 테마의 교착점 위에 놓여 있다.
연극 〈위험한 커브〉가 마지막 장면을 돌출시켜 언어의 무능을 폭로했을 때, 그러한 선언은 하나의 아이러니를 생성한다. 만약 언어가 그토록 무능하고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면, 과연 연극은 어떠한가? 연극 〈위험한 커브〉는 시인 지망생 안톤과 행정 관료 크리그바움을 등장시켜 문장과 행정 명령이라는 음성(문자) 언어를 문제 삼지만, 연극 또한 신체 언어를 비롯한 무대 언어(조명과 음악의 큐, 소품의 배치 등을 포함하는)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언어들은 이른바 ‘로고스(logos, 말, 이성의 원리)’적이기보단 감성적인 무엇이므로 이 연극에서 문제시되는 것과는 그 성질이 다르다지만, 과연 그 다름이 연극의 언어에 대한 신뢰를 지켜줄 수 있을까? 자신의 시집을 내기 위해서는 커브 길에서의 사고가 계속되어야 할 것을 깨닫고 혼돈에 빠지는 안톤의 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에서 예술과 예술가를 향한 은근한 질문이 엿보일 때, 그에 대해 연극은 무어라고 대답할 수 있는가?
이러한 아이러니 앞에서 연극을 구해내기 위해 연극을 구성하는 몇몇 요소들을 어떤 예외적인 것으로 지칭하여 연극을 그토록 불안한 ‘언어’의 영역에서 구출하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연극을 이러한 아이러니의 영역 한복판으로 밀어붙여 보자. 그리고 그렇게 밀고 들어갔을 때 발견되는 것이 바로, 구출이나 반성 혹은 좌절보다도 이전에 놓이는 ‘함’, ‘하기’, 즉 ‘연극-하기’이다.
〈시지프 신화〉에서 알베르 까뮈는 부조리한 세계 속 부조리한 인간을 사유하면서 ‘왜 자살하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신께서 명령하셨기 때문에? 그러나 도저히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는 인간, 세계를 조직하는 최고의 합리성으로서의 신이 부재하는 이 세계의 부조리함을 알게 된 인간은 모든 것이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살아야 할 어떤 확고한 근거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부조리한 세계에서 삶의 가치, 살아야 할 의미를 찾지 못하고 좌절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 ‘부조리함’을 더 멀리 밀고 나아간다. ‘왜 자살해야 하는가?’. 세계의 부조리함은 인간의 이성으로 세계 전체를 설명해낼 수 없기에 발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성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낼 수 없음이 곧 삶의 의미 없음을 뜻하지도 않는다. 이성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낼 수 없지만, 또한 살지 않아야 할 이유도 찾아낼 수 없다. 그래서 부조리한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서도 의미와 의미 없음 모두에 반항하며, 좌절을 어깨에 이고서, 세계를 향해 해결되지 않을 질문을 던지며 그 질문의 궤적을 따라 아무런 기약 없이 걸어간다. 그이가 언젠간 세계의 전체를 목도하리라고, 삶의 의미를 찾아내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순간에서든 그는 ‘세계’와 ‘삶’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만을, ‘목도하다’라거나 ‘발견하다’라는 말이 설명하는 바와 다른 방식으로 감각하게 될 터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그토록 무능하다면, 왜 연극은, 연극이라는 언어는 하여져야 하는가? 그것은 연극이 어떤 예외적인 권능으로 세계를 파악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무능함에 좌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그바움을 살해한 안톤의 공허한 언어는 안톤의 행위를 설명해내지 못하지만, 바로 그 설명하지 못하는 장면으로 인해 그 배후의 공모, 위험한 커브 길의 사고로부터 이득을 편취하는 안톤과 루돌프의 공모가 설명된다. 그렇다면 그러한 공모는 왜 발생하고 또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연극 〈위험한 커브〉는 이 질문 앞에서 그 자신의 최종적인 무능함을 드러내지만, 바로 그렇기에 관객은 연극의 안과 바깥을 누비며 스스로 새로운 설명을 창조해낸다. 그러한 관객의 설명은 분명 완전치 못할 테고, 그러므로 그는 또 새로운 설명, 또 다른 불완전하고 그 자체로는 무능한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이어지는 끝없는, 죽음 직전까지 계속되는 삶의 여정에서, 그이가 삶 속에서 만나는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연극은 그를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질문을 던지고, 그로 인해 관객은 그에게 던져진 질문의 주변부를 탐사하며 동시에 자기 자신의 삶을 탐사하게 된다. 따라서 그 무능함‘에도’ 연극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무능함 ‘때문에’ 연극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왜 단막극은 하여져야 하는가? 설득하지 않는 외침으로서의 단막극은 그러한 연극의 무능함, 대답이 아닌 질문으로서 연극의 기능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때문이고, 따라서 단막극은 연극의 기능인 질문-하기, 그것의 가능성과 한계를 아주 기초적인 부분에서부터 탐사하기 위한 입구이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것들과 같이, 연극은 질문한다. 그 질문에는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만이 이어진다. 그 말은, 한 번 공연되고 말 연극은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연극은 어제와 오늘은 공기가 다르고 배우들의 연기가 다르고 무대의 모든 것이 달라지는 탓에, 매일매일 다른 질문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심지어 연극 〈위험한 커브〉처럼 그 부조리함으로 무수한 질문의 공간을 우리에게 열어놓는 연극인 바에야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연극은 계속돼야 한다. 단단 페스티벌과 같이 관객들에게 다양한 연극, 그러니까 다양한 질문을 선사하는 연극제 또한 그러해야 한다는 생각을, 극을 보고 나오는 길에 했다.
필자소개
갈피: 술과 책을 좋아하고, 연극 보고 나서 기분에 의지해 글쓰기를 좋아하는 공학도.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넓혀가는 중입니다. 연극, 뮤지컬 보느라 책값도 술값도 떨어져 가서 난처해 하는 중.
공연소개
'Review'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뷰]일상은 어떻게 가시화 될 수 있는가 <DIOS EX MACHINA> (0) | 2022.03.31 |
---|---|
[리뷰]법과 함께 춤추는 몸들 <혜화동1번지 2021가을페스티벌 “법rule”> (0) | 2022.03.31 |
[리뷰] 탐사대원A의 회고록 <환영으로 채운 굴과 조각보로 기운 장벽 탐사대> (0) | 2022.01.21 |
[리뷰] 모멸감을 삼키고 다시 일어서기까지 <만나면 좋은 친구> (0) | 2022.01.13 |
[리뷰] 떠나고 사라지며 발화되는 것들 <46일째 인디여행> (0) | 2021.12.10 |
[리뷰] 잘 놀 수 있다는 농담 혹은 선언_<그러나 서커스_촬영 중입니다> (0) | 2021.11.29 |
[리뷰] 사랑하라, 단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_영화 <성덕> (0) | 2021.11.27 |
[리뷰]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기 위한 방식_혜화동1번지 "법rule":관람 모드-있는 방식 (0) | 2021.11.23 |
[리뷰] 영화되는 오류, 관망의 자세_ 2021 인디포럼 기획전 <인디나우 2: 기억의 업데이트> (0) | 2021.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