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9. 17:54ㆍReview
잘 놀 수 있다는 농담 혹은 선언
<그러나 서커스_촬영 중입니다> @신촌
글_김민수
팬데믹으로 인한 거리두기 단계가 4단계로 격상한 지 3달이 지났다. 백신 접종이 잘 진행되고 있으니 거리두기 단계가 금방 완화될 거라는 기대도 있었지만, 그 기대가 되레 많은 이들을 지치게 했다. 코로나로 예술계가 힘들다는 얘기는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거리예술계에서 활동하는 이들에게 4단계 방역 조치는 특히 괴로운 일이었다. 정규 공연장으로 등록된 공간이 아닌 곳에서의 공연은 모두 금지되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축제와 야외 공연 역시 취소되거나 극장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지루하다기보다 지난한 일상이었다.
그런 날들 가운데 불쑥, 그것도 평일 오후 신촌 한복판에 이상한 인파가 모이기 시작했다. 종이 가방에 눈을 뚫어 뒤집어쓰고 신촌 거리를 걷는 이들은 태연하게 도시를 횡보하다 드문드문 자리를 펴고 앉기 시작했다. 불쑥 음악이 나오며 공연이 시작되었고 사람들은 주머니에서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축제라기엔 애매하고, 공연인 건 분명한데, 촬영을 표방하는 <그러나 서커스_촬영 중입니다>였다.
<그러나 서커스>는 지난해 11월부터 기획되어, 지난 3월 서대문구와의 협의 끝에 5월 중으로 축제 일정을 정하고 참여 예술가 모집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계속되는 팬데믹 속에 한 차례의 연기와 한 차례의 취소를 경험한 뒤 촬영으로 방향을 수정하게 된다. 영상 촬영 및 송출을 통한 온라인화는 많은 축제가 선택한 방식이기도 했다. 이때, <그러나 서커스>는 촬영의 주체를 전복시킨다. 전문 영상팀이 공연을 담아 온라인으로 배포하는 대신, 사전 신청한 관객들이 일회용 카메라로, 또 열린 공간에서 우연히 공연을 만난 이들이 각자의 카메라로 담는 것이다. 그리고는 태연하게 이런 문장이 쓰인 안내문을 나눠준다.
“함께 촬영을 위한 가벼운 나들이를 떠나려 합니다. 그 장소가 신촌의 어딘가일 뿐이고! 우연히도 그 장소에서, 정말이지 우연히도 때마침 그 시간에 서커스 작품들이 진행될 것만 같습니다. 저희의 날카로운 예감이 그리 말해주네요”
뻔뻔하게 우연을 강조하는 모습은, 이 프로젝트에서 촬영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음을, 되려 그것은 구실일 뿐임을 알려준다. 행정이 관여하지 않는 틈을 헤집으며, 촬영의 주체는 시민이 되고 <그러나 서커스>는 일종의 문화 운동으로 성격을 전환하게 된다.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도시에 대한 권리>를 통해 자본에 점령당한 도시 내의 시민성을 강조한다. 그는 시민들이 도시의 주인으로서 공간에 대한 권리를 다시 찾기 위해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는 그를 프랑스 68혁명의 정신적 지주로 세운다. 소유와 대조되는 전유의 개념 속에서 시민은 자본을 넘어 도시의 주인이 되고, 행정과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시민성을 갖게 된다. 60년대 파리와 지금의 서울은 많은 상황이 다르지만 누군가가 도시공간에서 소외되고 있다는 명제 앞에선 비슷한 답을 내리게 된다. 전시(戰時)와 같은 팬데믹 속 공공의 통제력이 커지는 가운데, 밀려나는 것은 ‘자본’이 아닌 ‘자본을 갖지 못한 이들’이었다. 길가 벤치에 접근 금지 팻말이 붙으면, 고작 폭염 속에 잠시 자리에 앉는 것만을 위해 적어도 4천 원은 필요해졌다. 집에 머무르라고 말하는 사이 집이 없는 이들은 지워져 갔다. 도시가 모두의 안전을 위해 작은 이들을 밀어내고 있을 때, 공공공간 예술은 무얼 할 것인가. <그러나 서커스_촬영 중입니다>가 가진 태도가 중요해지는 지점이었다. 그들은 누구를 위하여 선을 넘을 것인가?
<그러나 서커스_촬영 중입니다>는 공연창작집단 사람의 대표이자 에어리얼 로프를 중심으로 서커스 작품을 만드는 서상현 작가를 중심으로 모인 서커스 단체들의 공연으로 구성되었다. 공연의 프로그래밍은 버스킹 중심의 광대극과 컨템포러리 서커스가 두서없이 배치되어있었다. 각 작품 역시 검증된 공연을 초청한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1일 차 공연 가운데에선 음클라운 <스트릿코믹광대쇼>는 모자/볼 저글링, 풍선, 오카리나 연주 등 기초적인 수준의 기예가 병렬적으로 늘어지며 하나의 작품으로서 의미를 갖기 어려웠으며, 서남재 <폴로세움>은 위트를 끌어내는 방식의 일관성이나, 차이니스 폴을 지탱하기 위해 시민을 불러 세우는 과정이 길고 지루하게 연출되는 점이 아쉬움을 남겼다. 오히려 나무 직육면체와 쇠로 된 원기둥이 갖는 오브제의 성질을 집중적으로 연구한 231쇼 <적응>이 훗날을 더 기대하게 하는 인상적인 작업이었다.
프로그래밍이 주제 의식이 아닌 장르를 바탕으로 구성된 만큼, 축제의 태도를 보여주는 데엔 한계가 명확했다. 이를 보조하는 것은 불쑥 눈구멍이 뚫린 종이가방을 나눠주며 함께 도시를 걷는 장면이었다. 공연 공간 사이를 연결하여 관객을 안내하는 기능 외에도, 관객에게 익명성과 동질성을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소수의 관객이 함께한 만큼 익명성보다 무리의 일원이 되는 감각이 더 컸다. 이는 곧 축제적인 감각과 연결되어 신촌 일대를 점거하며 노는 경험을 기대하게 하였으나, 사람들은 천천히 걸었고 차가 오면 길을 터주며 다른 시민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거창하게 문화 운동을 표방하였지만, <그러나 서커스_촬영 중입니다>는 의제를 능청스러움으로 버무려내고 있었다. 차가 오면 잠깐 비키면 되고, 모이는 게 위험하면 공간도 넓으니 떨어져 앉으면 되며, 공연이 위험하면 촬영이라고 하면 된다는 태도는 광대극이 가진 유머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밀려난 이들을 조명하거나 공공 공간의 주인에 대해 설파하는 대신, 그냥 스스로 주인으로 행세하는 것을 선택하였다.
서커스는 이런 역할에 적합한 장르였다. 공연자가 유도하기 때문에 나오는 박수라 할지라도, 박수가 위치하는 것으로 의도된 구성 안에서 이 행위는 관객을 작품의 구성원으로 끌어낸다. 그들은 악보를 들어주거나 모자를 던져주기도, 차이니스 폴을 잡아주기도 하며 더욱 적극적으로 공연의 주체가 된다. 축제 역시 촬영의 주체를 관객으로 만들며, 코스튬을 통해 소속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도시의 주체가 되는 그 모든 과정을 누구도 버거워하지 않을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은 <그러나 서커스_촬영 중 입니다>의 가장 큰 미덕이다. 본 작업을 통해 도시 공간에 새로이 서는 것은 서커스 장르의 창작자들과 관객들이었다.
하지만 이 뻔뻔한 위트는 작업의 깊이를 얕게 하기도 한다. 삼엄한 방역 조치 속, 샛길을 찾아내는 주체성은 분명 길고 어려운 협의 끝에 싸워서 얻어낸 것이겠지만, 관객 앞에서 그 과정은 적극적으로 숨겨진다. 샛길이 강조될 때 오히려 이 프로젝트는 ‘불편하지 않게 시위하라’는 시대의 명제 속에 포괄된다. 프로그램 북에서 보이는 저항성이 작품으로, 혹은 다른 방식으로 현장에서 구현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서커스에선 종종 실수가 의도적으로 연출되곤 한다. 기예의 성공으로 가는 길에 드라마를 제공함으로써 긴장감을 올리고 그 성공을 보다 크게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관객은 단순히 퍼포먼스의 완성도 자체에 박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기예가 연출되는 맥락-시도와 실패, 재도전 끝의 성취-에 감동한다. <그러나 서커스_촬영 중입니다>는 1년여의 시간 동안 수많은 실패와 재도전 끝에 작은 성과를 남겼다. 그것은 천연덕스러운 위트로 버무려낸 잘 놀 수 있다는 선언일 것이다. 그 성취에 닿기까지의 과정에 더욱 큰 박수를 보내며, 다음의 실패와 재도전을 기대해본다.
필자소개
김민수_거리예술을 비롯한 공연예술축제를 만듭니다. 가끔은 음악가로도 불립니다. 인디언밥, 민수민정, 밤의 소요, 블루프린트, 스튜디오1992와 같은 소속과 친구들을 자랑스러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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