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11. 23. 13:05ㆍReview
더 나은 세상을 고민하기 위한 방식
2021 혜화동1번지 7기동인_가을페스티벌 "법rule" : 관람 모드-있는 방식 리뷰
글_유경
‘있는 방식’, 무언가 빠진 것 같은 제목이다. 무엇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이 ‘관람모드’가 기존에 존재해왔던 어떤 규칙이 아닐까 추측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혹은 어떻게 있었던 방식인가.
<혜화동 1번지 7기 동인 가을 페스티벌 “법rule”>은 축제를 이렇게 소개한다.
“나를 돌아보고, 너를 확인한 뒤, 우리 사회를 바라보다.
법과 규범(rule)을 점검함으로써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고,
법을 다시 구성함으로써 아직 마주하지 못한 정의의 자리를 모색한다.”
규범은 “있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을 우리는 다시 구성해야 하고, 어떻게 하면 아직 마주하지 못한 정의의 자리를 모색할 수 있을까. “있는 방식”이 달라지기 위해서는 앞의 빈칸을 채워야 한다.
“관람 모드-있는 방식” 그 빈칸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다. 이룸 센터에 모여 김포 향유의 집으로 향하는 긴 여정 동안 그 빈칸은 아주 촘촘한 생각들로 채워져 하나의 단어를 이룬다.
여의도역 앞에 이룸센터가 있다. 여의도역 앞 보도와 차로 사이의 펜스에는 장애인 권리보장을 외치는 리본이 묶여 흩날리고 있다. 그 앞의 작은 도로에서, 우리는 휠체어 리프트가 있는 커다란 관광버스에 모두 차례차례 올라탄다. 휠체어 리프트가 있는 관광버스가 실제로 사용되는 것을 본 게 22년 만에 처음인 나로서는 마음이 이상하다. 왜, 본 적이 없었을까.
향유의 집으로 향하는 길은 특별한 라디오와 함께한다. 미리 참가자들에게 신청받아놓은 곡으로 꾸민 음악 감상 시간이다. 김동림 선생님이 음악을 튼다. 러브 포엠 다음에 나오는 아모르파티(엄청난 디제잉이다). 우리는 김포에서도 점점 외진 곳으로 달려 향유의 집에 도착한다. 휑한 마당에 있는 커다란 건물, 잠겨있던 문이 열리고 우리는 사회가 잠가 버린 이야기 속으로 걸어간다.
<관람 모드-있는 방식>은 “다큐멘터리의 공간화”다. 향유의 집 곳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우리는 그곳에 살았던, 혹은 일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중증장애인 요양 시설이었던 향유의 집은 2021년 4월 30일 문을 닫았다. 공간은 목욕 바구니와 바가지, 여전한 낙서, 텔레비전과 매트리스, 안내문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공간에 설치된 문구들과 목소리는 향유의 집에 어떤 생이 있었는지를 들려주었다. 공간을 둘러보고 나면 향유의 집 정제원 원장과 향유의 집에 살던 마로니에 8인 중 한 분이자, 탈 시설하여 탈시설 장애인을 돕고 있는 김동림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다.
*
그리고 나는 상상한다.
1988년과 크게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 그 공간에서 나는 이곳에 살았을 당신을 상상한다.
당신은 방바닥을 기어 다니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휠체어를 끌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따금 찾아오는 봉사자들은 당신이 기어 다니는 복도를 밖에서 신고 다니던 신발을 신고 들어와 당신을 동물보다 못한 눈으로 봤다. 석암재단이 당신의 장애 수당과 향유의 집으로 오는 보조금을 횡령하고, 당신은 먹지 못할 수준의 밥을 먹는다.
당신의 방은 그리 크지 않다. 안방, 정도 되는 크기의 방에 어떨 때는 4, 5명, 어떨 때는 7명씩 살았다. 모두 한 귀퉁이를 차지해 그 공간을 자신의 공간이라 칭해보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 화장실은 두 방 당 커다란 화장실이 하나 있다. 그러니까 한 화장실을 10명도 넘는 사람들이 쓴다. 차례차례 쓸 수 없기에 한 화장실에 여러 명이 들어가서 쓰기도 한다. 밤이 되면 열 몇 명의 장애인을 한 명의 보호사가 책임져야 한다.
당신의 일과는 이렇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야 하고, 정해진 시간에 잠들어야 한다. 당신은 한참을 기다려서 씻고, 볼일을 본다. 몸이 불편하다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눈을 떠서 텔레비전을 보고나 이쪽 벽, 저쪽 벽을 바라보는 것이다. 당신이 혼자 있고 싶을 때도, 당신의 좁은 방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복작거리며 살고 있다. 모두 거동이 불편하고, 모두를 챙겨줄 사람은 없다. 이곳의 사람들은 너무나도 바쁘다.
형편없는 밥을 먹을 때, 당신의 마음은 급해진다. 당신이 제일 위 층에 산다면, 가장 늦게 배식을 받고 빨리 먹고, 빨리 식판을 반납해야 한다. 직원들이 퇴근해야 하기 때문에 당신은 4시쯤 저녁을 먹는데, 아래에서 올라온 배식용 휠체어가 다시 제시간에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서 당신의 식사 시간은 누구보다 짧다.
함께 대화를 나누는 휴게실은 이따금 시체안치소가 된다. 사람들이 자꾸만 죽는다. 이곳은 걸어 다니던 사람이 걸을 수 없게 되는 곳이다. 55세 전후로 사람들이 죽었다. 이곳은 바로 병원으로 사람들을 보낼 형편이 되지 않았다. 가족에게 가지 못한 시신은 휴게실 병풍 뒤에 잠시 안치된 뒤 화장된다. 휴게실에서는 향냄새가 난다. 말을 듣지 않는 시설 이용인이 있으면 “휴게실 병풍 쳐라”라는 농담을 했다. 그러면 말을 잘 들었다.
한 사람이 시체실, 아니 휴게실에서 떠나고 나면, 어김없이 한 사람이 들어왔다.
시설은 항상 부족했으므로.
당신은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경사로가 너무 급해 당신은 휠체어의 속도를 줄이려고 애쓴다. 경사로 중간에는 아슬아슬하게 매트리스가 세워져 있다. 저 아슬아슬한 것이 당신을 보호할 수 있을까. 당신은 의문이 든다. 복작거리는 사람들을 지나 한 귀퉁이에서 다시 잠을 잔다. 말을 정말로 듣지 않는다면 어쩌면 옥상의 쪽방으로 가는 벌을 받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또 하루가, 똑같은 또 다른 또 하루가 지나가고, 또 지나갈 것이다. 1달을, 1년을, 10년을. 당신은 여기서 ‘죽어야지만 나갈 수 있다’라고 생각한다.
나는 거울에 쓰인 문구를 마주한다.
“과연 그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어요.”
*
재단이 장애 수당을 빼돌린다는 사실을 한규선 선생님이 고발한 이후, 재단과 시설이 어떻게 ‘사람들을 아무것도 할 수 없게끔 만드는지’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관련 피의자들은 실형을 선고받기는 했으나 항소로 더욱 감형되었다. 석암베데스다요양원은 프리웰재단에서 운영하는 향유의 집으로 바뀌었다.
향유의 집은 ‘탈시설’의 중심에서, 모든 시설 이용자를 시설 밖으로 나갈 수 있게끔 도왔고 스스로 문을 닫았다. <관람 모드-있는 방식>에서는 석암베데스다요양원과 향유의 집의 경계가 흐렸다. 1980년대에서 멈춘 것 같은 그 방과 화장실들. 차가운 바닥과 날카로운 경사면들. 그것은 바뀐 것이 없었다. 끔찍한 인권유린의 장소에서 벗어났다기에는, 여전히 그대로인 것이다.
정제원 원장이 향유의 집이 한 노력을 보여줄 때도, 그러한 경계는 뚜렷해지다가도 흐려졌다. 2층 여성 전용 복도 중간에 세워진 나무문은 시설이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쪽 복도와 저쪽 복도를 자꾸만 왕래하는 한 분에 대해 다른 분들이 항의했고, 그분을 막기 위해 나무문을 세운 것이었다. 향유의 집은 오랜 기간에 걸쳐 ‘탈시설’을 이뤄냈고, 시설에 있는 장애인에게도 할 수 있는 노력을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권 문제는 석암배데스다요양원일 때도, 향유의 집일 때도 존재했다. 종사자와 장애인 사이에도, 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에도 계속해서 인권유린이 존재했다. 시설 장애인은 많고, 시설 종사자는 너무나도 적었다.
베데스다요양원과 향유의 집의 경계가 흐린 이유는 그것이 비리재단만의 문제를 넘어 시설의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비리재단이 물러난 뒤에도, 시설은 그대로의 형태를 유지했다. 시설 이용자가 줄고 종사자가 늘었을지라도, 시설은 변하지 않았다. 2008년 석암재단 고발 이후, 2009년 마로니에 8인이 향유의 집 앞 공원에서 “시설을 나오자”고 결의했다. 도슨트와 디제잉을 맡았던 김동림 선생님도 그중 한 분이었다. 그들은 마로니에로 향해 “시설에 가지 않겠다”고 말하고, 선생님은 2009년 시설에서 나온다. 결혼도 하고, 탈시설 장애인을 돕는 일을 한다. 시설 이용 당시에도 누워만 있을 사람들을 위해 향유의 집 음악감상실에서 DJ를 하셨던 선생님은 오늘, 시설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도 DJ가 되어주었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장애인이 ‘시설’에 있는 것이 “있는 방식”인 시대에, 장애인은 사회에 존재함에도 자꾸만 ‘없어’진다. 탈시설은 비장애인뿐만 아니라 여러 장애인 또한 반대하기도 한다. 이는, 우리 사회가 ‘시설 밖’에 나온 장애인들이 자립해서 살아갈 수 있냐는 물음이기도 하다. <있는 방식>은 질문을 바꾼다. 과연 “시설 안”에서는 살아갈 수 있냐고. 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시설 안”에서는 살아갈 수 있냐고.
탈시설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에게 김동림 선생님과 정제원 원장은 “좋은 시설도 시설”이라고 이야기한다. 향유의 집이 비리재단 이후 더 나은 시설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시설이다. 개인의 공간은 사라지고, 개인의 삶은 사라진다. “좋은 시설”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은 더 많은 “좋은 시설”이 될 뿐 그것이 결코 “좋은 세상”은 아닐 것이다. 세상은 시설의 문제를 세상의 문제가 아닌 시설만의 문제로 몰아넣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가두어놓았던 수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그것은 보호가 아니다. 시설은 ‘보호’를 명분으로 이미 걸을 수 있던 사람을 못 걷게 만들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수많은 이야기를 통해 알고 있다. <있는 방식>은 사회에서 우리가 장애인을 시설로 몰며 어떻게 배제해왔는지, 외면했는지 주목한다.
<관람 모드-있는 방식>이라고 보여주던 버스는 이제 방향을 바꿔 <함께 있는 방식- 탈시설>이라는 문구를 내보인다. 긴 시간 동안 “함께”라는 단어를 “탈시설”로 채운다. 다시 도착한 이룸센터에는 ‘장애인권리보장법’과 ‘장애인 탈시설 지원법’이 크게 작힌 플랜카드가 흩날리고 있다. 출발하기 전과, 도착하고 난 뒤의 같은 글자는 조금 다르게 읽힌다.
그리고 지금, 시설 바깥에 있을 당신을 생각한다. 시설 바깥에서 당신은 아마 당신의 공간을 당신의 물건들로 당신의 숨들로 채운다. 당신은 함께 시설에서 나온 사람들과 서로 도울 것이다.
사실 나는 탈시설을 넘어 그 이후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싶다. 시설에서 나와야만 더해질 수 있는 많은 이야기. 그리고 우리 모두가 해결해야 할 이야기. 당신이 어떻게 혼자 살아가고 있는지, 어떻게 가족을 만드는지, 어떻게 자립하였는지. 살 수 없는 시설 안에서 시설 밖으로 나온 당신이 시설 밖에서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혹시 당신의 문 바깥이 당신을 가두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싶다. 단지 물리적으로 당신과 내가 함께 있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모두 함께 지내는 ‘동네’가 만들어지고 있는지. 노란 보도블록이 당신을 안전히 연결하고, 점자 표시가 잘 되어있으며, 당신이 쓸 수 있는 화장실과 대중교통이 있고, 당신이 홀로 설 수 있는 일자리가 있는지. 사람들이 당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는지.
차곡차곡 쌓아 올린 단어 “함께”에 탈시설을 넘어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더 많이 담길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저 질문들을 상상할 수 있는 세계가 오기를, 질문하지 않는 세상이 올 수 있기를 바라 본다.
필자소개
유경_조금은 묘한 이야기를 미묘한 마음으로 씁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들었고, 오래된 이야기가 되고 싶어요.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사랑할 수 있기를.
공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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